[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 위령제(慰靈祭)

  • 등록 2024.06.07 14: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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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 위령제(慰靈祭)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는 은산별신제 사당인 은산 별신당(恩山 別神堂)이 있다. 한적한 충청도 시골 마을 은산천(恩山川)을 끼고 자리 잡은 모습이 위풍(威風)도 당당하다. 별신제(別神祭)는 마을의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그런데 이 별신(別神)이란 단어는 그 뜻을 여러 가지로 추정하고 있다. 신을 특별히 모신다는 뜻에서 왔다는 이야기, 서라벌(徐羅伐)의 ‘벌’처럼 평야나 들을 뜻하는 말로 평야의 신을 모시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 ‘배신’, 즉 선신(船神)을 말하는 것이라는 이야기, ‘별’의 어원이 ‘밝다’라는 뜻에 있음을 두고 광명을 바라는 신앙을 뜻한다는 설 등등이 있으나 정확한 의미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은산 별신당(恩山 別神堂)

 

은산별신제는 매년 3월 말에 지내는 마을의 제사이자 축제이다. 이 축제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과거 은산면 지역에 괴질(怪疾 : 괴상한 질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어떤 한 노인의 꿈에 백제 장군이 나타나 자신과 함께 죽은 병사들의 유골을 수습해 달라고 청한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유골들을 찾아 잘 묻어주고 위령제를 올렸다. 그러자, 마을을 감돌던 전염병이 사라졌고 다시 평안을 찾았다. 이때부터 마을에서 신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것이 바로 이 '은산별신제'이다. 실제 별신당 뒷산에 백제의 항쟁 장소인 은산당산성이 있어 이야기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은산별신제는 원래 3년에 한 번 윤달이 든 해에 지내왔으나, 최근에는 짝수 해에 대제(大祭), 홀수 해에는 소제(小祭)로 구분하여 3월 말에 지내고 있다.

 

은산별신제를 직접 구경하기 위해 날을 잡고 기다렸으나, 올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쉽게도 공개행사를 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조용히 펼쳐져 있는 마을 곳곳의 이야기 현장만 사진에 담고 내년을 기약하기로 했다. 필자가 은산별신제를 꼭 보고 싶어 한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말을 타고 있는 장군이 제의절차(祭儀節次)에 등장하는 독특함 때문이다.

 

제의절차(祭儀節次)

 

은산별신제는 100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규모의 행사이다. 아쉽게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도서와 영상 등을 통해 확인한 대략적인 절차는 이렇다. 제사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음식준비, 걸립(乞粒), 진대베기, 상당행사 등을 진행하고, 이어 신께 제사를 지내는 본제, 상당굿, 하당굿을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화주가 산신에게 감사하는 독산제, 진대와 장승을 세우는 장승제를 지내며 행사를 마무리 짓는다. 

 

그 절차를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렇다. 먼저 술 담글 물을 얻기 위해 개울에 금줄을 쳐 3일간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데 이를 ‘물 봉하기’라고 한다. 그 물로 조라술이라는 제사에 쓰일 신주(神酒)를 담근다. 다음은 제사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는 절차로 화주(化主)라고 하는 은산별신제를 주관하는 사람 집에서 준비한다. 이때에 남자만 참여한다. 다음 절차로 마을 어귀에 세울 장승을 만들고,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돌며 지신밟기를 해서 무운을 빌어주는 ‘집굿’을 벌인다. 과거에는 이 걸립(乞粒)을 통해 별신제의 재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1939년 기념사진(출처 : 국립무형문화재연구소 기록도서)

 

다음 절차는 진대베기라는 행사인데, 은산별신제의 제의절차 중 가장 독특한 행사가 이 진대베기가 아닌가 싶다.  장군 복장을 하고 말을 탄 대장(大將)이 군졸을 이끌고  어린 참나무인 진대를 배어온다. 이 진대는 부정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장승과 함께 마을의 사방에 세워진다. 1930년대의 기록 사진에 말을 탄 장군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행사의 오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은 보존회 사무실 벽에 크게 인화돼 자랑스레 게시되어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이 행사가 지속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은 신당을 꾸미기 위해 절에서 준비한 형형색색의 지화(紙華)와 화등(花燈)을 받아 오는 절차이다. 이를 ‘꽃 받기’라고 한다. 이때 받아온 꽃은 화주(化主) 집에 보관했다가 제삿날 별신당으로 옮겨 장식한다. 제사 당일 아침에 화주 집에 보관 중인 술과 음식, 화등 등 여러 제물을 별신당으로 옮기는데 이를 '상당행사'라 한다. 이 행사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제물을 옮기는 사람들은 입에 한지를 물고 ‘말’에서 오는 부정을 막으니 긴 행렬이 경건하다. 

 

상당 행사를 마치면 별신당에 제사음식을 차리고 그날 밤 본제를 지낸다. 본제는 유교식으로 축문을 읊으며 지내는데, 이 축문에 많은 장군(將軍)들이 등장한다. 제사를 지낼때 참가자들은 절을 세번 하며 절을 할 때 마다 머리를 세번씩 위 아래로 총 아홉번 조아린다. 이러한 절을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고 한다. 이 삼배구고두는 병자호란에 패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의 황제에게 취해서 굴욕적인 장면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극한의 존경 의미를 담은 예법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날 오전에는 별신당의 앞마당에서 무당이 춤과 노래로 신령을 위로하는 상당굿이 벌어진다. 이때 키가 아주 큰 대나무 기를 세우는데 그 끝에 방울을 달아 놓았다. 이 대가 흔들리며 방울 소리가 나면 신이 내린 징표로 삼는다. 이를 ‘대 내림’ 의식이라 한다.

 

은산별신제의 제의절차

 

오후에는 굿당 아래에 있는 보존회 앞마당에서 하당굿을 벌인다. 이 제의식(祭儀式)은 별신제에 초대받지 못한 여러 원혼을 위로하는 행사라고 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대동굿이 벌어진다. 여기까지가 본 행사이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행사를 주관하는 화주는 행사를 잘 마치게 해 준 산신에게 감사를 드리는데 혼자 제를 올린다. 이를 독산제(獨山祭)라 한다. 마을의 재앙을 막고 무운을 비는 장승제는 장승과 진대를 마을의 네 어귀에 세우는 행사인데  독산제와 동시에 진행된다. 이 절차까지 마치면 은산별신제라는 대규모의 축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은산별신제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행사장에 금줄을 둘러 부정한 기운을 막고, 입에 한지를 물어 말을 금(禁)하는 등 치성(致誠)을 드리는 모습 등에서 행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견한 마음자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유교식 제사, 불교식 꽃장식, 무교의 굿 의식 등이 섞여 연출되는 모습의 장대함에도 놀라움을 갖게 된다.  마을 주민들이 기성회를 결성하고 함께 만드는 마을굿이며, 산신을 모시는 산신제, 장군을 모시는 장군제, 백제부흥군을 위로하는 위령제의 의미 등 다양한 성격과 형식을 담고 있어 매우 독특하게 느껴지는 행사이다. 영상을 통해서라도 이 전통의 종합예술축제를 한번 감상해 보길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추천드린다.

 

은산별신제의 음악 : 무악(巫樂), 농악(農樂)

 

은산별신제에 쓰이는 음악은 무악(巫樂)과 농악(農樂)이다. 무업(巫業)을 하는 무당(巫堂)은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집안에서 무업(巫業)을 이어받아 무당이 되는 세습무(世襲巫)와 신내림을 통해 무당이 되는 강신무(降神巫)로 나뉜다. 주로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은 세습무, 북쪽은 강신무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세습무는 가계를 통해 내려온 음악적 능력이 강신무는 신령성을 느끼게 하는 의식이 각각 돋보이는 특징이 있다. 은산별신제는 한강이남(漢江以南)의 굿으로 호남지방의 굿과 음악적인 결을 같이하고 있다. 무녀(巫女)는 살풀이장단, 시님장단에 육자배기토리 소리로 ‘축원가’와 ‘당산굿소리’ 두 곡을 삼현육각(三絃六角 :  향피리 2개, 대금, 해금, 장구, 북 등의 국악에서 흔하게 쓰이는 악기편성) 반주에 노래한다. 최근에는 화려한 무속 복색을 하고 노랫가락, 창부타령 노래를 부르는 등 한강이북(漢江以北) 지방의 강신무(降神巫) 무속이 가미되는 등 볼거리가 늘어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은산별신제 감상하기
https://youtu.be/UKUA0hCBCcU?si=vYsviNhcRYN5ooXM

 

농악은 길굿 장단, 행진 장단, 삼배구고두 장단, 재례 장단 등이 제례의 절차에 맞게 구성되어 쓰이는데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 계열의 비교적 단순한 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주되는 동안 태평소는 시나위 가락이나 능계 가락 등을 연주한다.

 

백제부흥운동 : 복신장군(福信將軍), 토진대사(土進大師) 그리고 부여풍(扶餘豐)

 

                   복신장군                                     산신도                                              토진대사

(출처 : 국립무형문화재연구소 기록도서)

 

은산 별신당에는 산신 영정 좌우에 복신장군(福信將軍)과 토진대사(土進大師)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은 1936년 조사된 자료의 축문에는 나오지 않다가 1961년 조사된 축문부터 등장한다. 이를 근거로 예전에 없던 이야기가 삽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는데, 이 추측에 대해서 예전에는 복신과 토진의 장군의 이름을 직접 쓰는 대신에 복신은 백마장군으로 토진은 영차장군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대응(對應)한 대답도 있다.

 

복신장군은 《삼국유사》 백제본기에 나오는 인물로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담은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의 조카로 승려 도침과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이다. 토진대사는 아마도 이 승려 도침의 오류가 아닌가 추측된다. 백제부흥운동이란 역사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인물은 복신과 도침보다는 부여풍(扶餘豐)이었다. 부여풍은 무왕의 아들로 의자왕과 왕위를 두고 경쟁 관계에 있던 왕자였을 수도 있고, 의자왕의 아들일 수도 있다. 왜에 살고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은 왜군을 이끌고 백제 부흥운동에 참전한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이 부여풍을 그들의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인질이라고도 주장하지만 어림없는 이야기임은 뒤에 서술하겠다.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에 왜군을 참여시킨다. 부여풍이 거느리고 온 왜군의 규모는 가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2만7천명, 《삼국사기》에 의하면 1,000척의 병선(兵船), 《구당서》 유인궤전(劉仁軌傳)에 따르면 백강구에서 불탄 왜선이 무려 400척이란 기록이 있다. 663년 8월27~28일 양일에 걸친 백강 전투에서 백제의 구원을 위해 출병한 왜군은 당시 세계최강 군대였던 당군과 4번을 싸웠으나 패하고 만다.

 

실패한 백제부흥운동 그 마지막 씁쓸한 이야기

 

필자는 백제부흥운동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한 복신장군과 승려 도침은 무려 20여 성을 회복하며 백제 부흥의 기치를 높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부 권력 다툼이 일어나 일을 그르치게 된다. 권력욕이 컸던 복신은 도침을 살해하여 그의 군대를 빼앗고 부여풍마저도 살해하려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 의도를 부여풍에게 들켜 역으로 당하여 죽는다. 이후 부여풍은 백강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나 고구려 패망 이후엔 당의 포로가 되어 유배된 것으로 전한다.

 

한편, 백제부흥운동에는 흑치상지(黑齒常之)라는 장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백제의 명장으로 소문난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자리 잡자, 그 뜻을 따라 백제 부흥군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열흘 만에 무려 3만 명에 이르는 규모를 이루게 된다. 이 위세로 그는 200여 성을 회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백강 전투의 패배로 그의 세력도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하필 자기가 모시던 백제의 마지막 태자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임존성에 당도한다. 이를 맞대한 흑치상지는 결국 부여융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투항하고 만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이 지키고 있는 그 임존성을 공격하는 믿기지 않는 만행(蠻行)을 저지르고 그 성을 함락시킨다. 부여융과 흑치상지의 배신은 이렇게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흑치상지의 선택이 더 많은 백제 유민들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이 맞으려면 그는 차라리 성문을 열고 부여융에게 항복했어야 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흑치상지를 배신자로 평가했다. 수없는 친일파들을 경험한 그였기에 백제부흥운동을 배신한 그에게서 친일 부역자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본 해방이 될지 몰랐다는 친일부역자의 변명이 떠오르며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배신자 흑치상지는 당에 가서 어마어마한 전공을 쌓아 영웅적 존재가 된다. 측천무후(則天武后 : 중국 역사 유일의 여황제)가 저런 명장이 있는 나라가 어찌 망했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동료의 모함을 받아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말로(末路)를 맞이하게 한다. 

 

일본천황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다!!!

 

이쯤에서 분위기를 전환하여 고대 한반도와 왜의 관계는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자.

 

  •  가야금을 만든 가야의 가실왕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시쯔’라는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
  •  《신창성씨록》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계의 성씨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대 한반도의 왕족과 귀족이 왜로 건너가서 성씨를 이룰 만큼 크게 번성하였음을 증거한다.
  •  백제부흥운동을 위해 부여풍은 왜군 2만7천명을 1천 척의 배에 태워 참전시킨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가 인질에 불과한 왕자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보내졌을까?
  •  중국에서 당나라 시대(678년)에 세워진 비석에서 日本이라고 쓰여진 글자가 발견된다. 이에 일본 언론에서는 자국 국명이 사용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나왔다며 대서특필(大書特筆)했는데,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학교 교수는 그 일본(日本)이란 글자는 국명이 아니라 당(唐)에서 볼 때 동쪽 즉, 해가 뜨는 곳 백제(百濟)를 의미한다고 밝힌다. 즉, 당(唐)나라에서는 백제를 일본(日本)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  왜는 백제가 패망하고 부흥운동마저 실패 한 뒤부터 일본이란 국호도 쓰기 시작한다. 서기 710년에는 그들의 수도를 '나라'로 천도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갖춘 나라시대(奈良時代)를 연다. 이때부터 공식적인 국호가 일본(日本)이다.
  • 2002년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을 보면 일본 천황이 자신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직접 밝힌다. 

 

  이 일련의 이야기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의 다음과 같은 상상은 과도한 것일까? 백제의 멸망으로 왜로 건너온 수 많은 귀족과 함께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백제 무령왕의 후손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은 신라와 당에게 패망한 옛 백제보다 더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라로 수도를 천도하고 당나라가 부르던 백제의 다른 이름인 일본(日本)을 공식 국호로 선포한다.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이필영,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 은산별신제, 화산문화, 2002
홍태한, 은산별신제 연구, 민속원, 2016
한만영, 이보형. 「은산별신제의 음악적 연구」. 『동양음악』 제1집, 1977, 61~81쪽
노정숙, 「은산별신제 농악 연행에 관한 연구」, 『동양음악』 제49집, 2020, 9~45쪽
김현구. 「심포지움 1 : 백제부흥운동과 백강 ; 백강전쟁과 그 역사적 의의」,  『백제문화』 제32권, 2003, 129~140쪽
양종국, 「의자왕 후예들의 과거와 현재」, 『백제문화』 제32권, 2004, 159~188쪽 
양종국.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재검토의 필요성」, 『先史와 古代』 제55권, 2018, 67~89쪽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별신굿」
인산티비 은산별신제(2022년 공개행사)
https://www.youtube.com/watch?v=UKUA0hCBCcU

한겨레신문 2012년 6월6일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6435.html#csidx191f9cc57c55bd38f32285aaeb88d88
KBS 역사스페셜 1부(2002.02.16.) - 미스터리 추적 일본 천황은 백제인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On8o7gJb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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