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백제금동대향로 :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경이적인 걸작

  • 등록 2024.07.14 2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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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 :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경이적인 걸작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香爐)를 알게 된 것은 뒤 늦게 공부한 대학원의 「국악기론」이란 과목을 공부하면서였다. 그다음 만난 것은 우륵박물관에서 마주한 실물 절반 크기의 모조품이었다. 책에서 본 흑백사진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이 멋진 입체적 모습에 반하였다. 혹시나 하여 인터넷을 뒤져 3D로 프린팅된 향로를 두 개 구해 국악칼럼을 써보라 응원해 준 친한 벗과 한 개씩 나누어 갖고, 내 것은 거실 TV 곁에 두고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지난봄에는 학생들과 함께 찾은 용산전쟁기념관 지하 1층에서 실물 크기의 모조품을 또 마주하였다. 그 크기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당당해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실물을 보자! 볼 때마다 나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그 매혹적인 녀석을 찾아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를 향하였다. 드디어 도착한 부여, 운전의 피로를 씻어줄 냥 대향로로타리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부여 대향로로타리


백제의 수도는 세 곳이었다. 첫 번째 수도는 위례성(한성)으로 서울 몽촌토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백제(百濟)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본처의 아들인 유리(琉璃)를 세자로 삼자, 둘째 처였던 소서노(召西奴)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위례성을 근거지로 건국한 나라이다. 졸본부여 백 개의 집안이 소서노를 따라 바다를 건너와 건국했다는 의미의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나라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번째 수도인 웅진성(공주)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강을 내어 주고 급하게 도읍을 옮긴 곳이다. 그러나 웅진성은 지형이 넓지 않아 도시가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바다도 멀어서 국제교역을 하는 데에도 불편하였다.

 

오늘 찾은 이곳 부여는 세 번째 수도로 백제의 성군(聖君)으로 불리던 성왕(聖王)이 백제 중흥을 꿈꾸며 천도한 곳이다. 당시의 지명은 사비성(泗沘城)이었다. 이 시기 일시적이지만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어 부여의 후계자임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후 찬란한 백제의 문화를 꽃핀 사비시대는 130년간 지속되었다.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은 통일신라 경덕왕이 지명을 한자로 만드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펴면서 부여(扶餘)로 개명하게 된다. 신라는 이 땅의 지명을 새로이 명명(命名)하면서 만주를 누비던 예맥족의 부여가 마지막까지 역사한 곳으로 기억해 주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 우연이 반복된 필연 

 

부여 능산리에는 백제 왕릉이 많다. 정부는 고분(古墳)의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주차장을 만들려고 이곳 땅을 매입한 뒤 혹시 모를 유적을 찾아 시험 발굴하였다. 그런데, 이 혹시나 한 발굴에서 어마어마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니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백제금동대향로이다. 하마터면 이 아름다운 유물이 주차장 아스팔트 바닥에서 영원히 사장될 수도 있었다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1,400년이 넘는 세월을 땅속에 묻혀있었다기에는 너무도 완벽한 모습으로, 이 걸작은 운명적으로 우리에게 왔다. 

 

이 향로는 대장간에서 작업할 때 필요한 물품을 저장하는 목제 수조에서 발견되었다. 발굴터 가까이에서 성왕의 딸이 사리를 봉안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이 출토되어 왕실의 절이 있던 절터로 보고 있으며, 건물 바닥이 위로 떠받쳐 있는 고상식 가옥의 흔적도 나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궁(神宮)이 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발굴 당시 향로는 몸체가 위아래로 분리된 채 기와 조각이 켜켜이 위로 쌓아 놓은 모양새가 위급한 상황에서 다급히 보물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나당 연합군에 패하고 7일 밤낮을 불탔다고 한다.

 

이 향로의 매몰 순간이 화염 속 백제 최후의 날로 연상되며 상상 속 스크린에 영화 필름이 펼쳐졌다. 우연을 가장한 역사의 필연이었던 것일까? 다급히 감춘 백제금동대향로는 진흙과 돌무더기가 잘 버무려져 완성된 완벽한 진공 공간에서 1,400년이 넘는 세월을 온전히 보전된다.

 

불효자 창왕은 웁니다.

 

향로가 출토된 곳에서 발견된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의 명문(銘文)에는 창왕(위덕왕)의 누이가 사리를 봉양한 것으로 쓰여 있다. 이로 보아, 왕실 차원에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왕도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하는 등 성군(聖君)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군주였던 성왕의 죽음은 황망하게 찾아왔다. 그의 아들 창(昌)은 왕자 시절 대신들의 반대에도 신라 공격을 감행한다. 이를 지지한 성왕은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관상성(공주) 전투 현장을 방문하였는데 매복한 신라군에 그만 전사하고 만다. 이에 아들 창은 즉위를 거부하고 승려가 되려고 할 만큼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신 때문에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원찰을 지었으니 그 정성 얼마나 컸겠는가? 그 짙게 배어든 죄책감이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을 절정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의 명문(銘文)
백제 창왕 13년 태세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정해년 매형공주 공양사리(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중국에서 준 선물이라고?

 

발견 초기에 일부 학자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유물로 추측하기도 했다. 향로의 모양이 중국의 박산향로를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제금동대향로를 제작할 시기는 이미 중국에서는 박산향로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지가 수백 년이 지난 뒤였다. 이 걸작이 백제인에 의해 제작된 증거가 차차 밝혀져 지금은 백제의 예술품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먼저,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백제금동광배의 연꽃 문양이 향로의 다리 부분 문양과 일치하는 것이 증거가 되었다. 백제금동광배는 부처님 등 뒤를 장식하는 유물인데, 이 유물의 연꽃 문양은 백제만의 독특함을 지닌다고 한다. 용의 다리 옆에 붙은 이 문양의 조형물은 원래 의도와 달리 용의 다리만으로는 향로가 안정적이지 않아서 덧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덧댄 조형물의 문양이 백제 작품의 증거가 된다니 재미있는 우연이다. 이와 같은 백제인의 유연함은 향이 나오는 구멍에도 그 흔적을 남겼는데, 향이 잘 안 타서 완성 뒤 구멍을 넓힌 것으로 보인단다. 그 융통성 있는 마무리가 필자의 성격과도 닮아있어 너무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백제금동광배와 백제금동대향로의 연꽃 문양

 

그 외 다른 증거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이 있다. 이 유물의 문양 구성은 산악도, 구름무늬, 연꽃, 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구성이 백제금동대향로의 구성과 흡사하여 또 다른 증거가 되고 있다. 이 외에 산악도 위에 수렵도가 장식된 점, 봉황을 중심에 두고 오악사와 기러기가 배치된 상징 체계 등도 중국의 다른 향로에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라고 한다. 그 모습이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답기에 중국 학자들은 중화 중심의 사고 속에서 지들 조상의 작품이라 자랑하고 싶어 했겠지만 아쉽게도 백제인의 예술품인 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상징


백제금동대향로는 받침과 몸통 그리고 뚜껑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금동향로의 받침은 용이다. 용은 반시계 방향으로 몸을 감아 오르며 입으로 연꽃을 받치고 있는데 용의 몸 사이에 역동적으로 물결이 표현되어 있고 연꽃 장식도 우아하게 붙어있다. 용은 대게 천상과 지상의 물의 순환을 관장하는 물의 신으로서의 상징을 갖는다. 용이 물고 있는 몸통은 연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부처님이 앉은 연화대에서 알 수 있듯이 연꽃은 불교와 밀접한 상징물이다.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깨끗한 꽃을 피우는 연꽃의 모습을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에서도 찬연히 꽃피운 부처의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백제금동대향로

 

불교 전래 이전에도 연꽃은 낮에 피고 밤에 오므려드는 특징이 있어 태양을 숭배하는 상징으로도 사랑받아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 장식되었다. 꽃잎마다 물속이나 물가에 사는 27마리의 물고기, 새 그리고 2명의 인물상 등이 장식되어 수중계의 의미를 담아낸다. 뚜껑은 중국의 박산향로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74개의 봉우리에 42마리의 호랑이, 코끼리를 비롯한 각종 동물, 나무, 바위 그리고 17명의 인물 등 지상계와 인간계를 상징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산들은 도교적 의미로 신선들이 사는 신산(神山)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불교적 우주관을 반영하여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뚜껑의 최정점에는 천신(天神) 혹은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다섯 명의 악사에 둘러싸여 있어 천상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유교적 관점의 예악사상을 담아 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악사의 앞, 뒤로 구멍이 뚫려 향 연기가 피어오르면 중앙의 상징물인 봉황과 악사들이 아른대는 연기 속에 자태가 신비하게 연출된다. 고구려 고분벽화 천상도에 천인(天人)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적지 않게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이 생각한 천상계는 음악과 노래가 끊이지 않는 곳이란 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오악사(五樂士) 앞의 다섯 봉우리에는 기러기가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며 한 마리씩 앉아 있는데 삼한시대 소도라고 하여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한 지역을 표시했다는 솟대 같은 느낌도 든다. 백제는 수도를 5부(部)로 지방을 5방(方)으로 나누었는데 다섯 봉우리와 오악사가 그 체제를 의미하며 가운데 임금인 봉황을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학자들은 고대 백제인의 이상향과 정신세계가 백제금동대향로의 상징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보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백제 오악사

 

백제금동대향로의 다섯 악사가 연주하는 악기는 배소(혹은 소), 종적(혹은 피리, 퉁소, 장소), 북, 백제금(혹은 거문고, 쟁), 백제 삼현(혹은 월금, 완함, 비파)이다. 너무 오래전 악기라 명칭과 관련한 논의가 여러 가지로 이루어졌지만, 박물관 3D 영상 상의 악기 명칭을 기준으로 이 악기들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배소                                            종적                                            북

 

배소는 팬플룻처럼 생긴 관악기이다. 배소라는 명칭은 당나라 이후에 쓰였기 때문에 백제 시절에는 소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악학궤범에 나오는 비슷한 악기인 조선시대의 소와 구별하기 위해 배소라 명칭한 것으로 보인다. 종적은 세로로 부는 관악기의 통칭이다. 피리보다는 길어 퉁소로 불리는 것도 적당해 보이지만 퉁소는 당나라 때 서역의 종적을 개량한 악기로 우리에겐 그 이후에 왔으므로 백제 시기의 명칭으로는 적정하지 않다. 그 외 단소보다는 길다는 의미의 장소라고 지은 명칭도 있으나 통상적인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종적 지공(指孔)이 일곱 개인 것으로 보아 그와 음악적 계보를 같이한 백제 종적도 같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북은 그 형태가 다소 특이하여 타악기가 아니라 관악기로 추측한 연구도 있었으나 대부분 학자는 북으로 보고 있다.


백제금은 중국의 쟁을 닮아 쟁으로, 거문고를 닮았다고 거문고로 보기도 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거문고 잔해가 출토되기도 했기에 거문고로 볼만한 이유도 있다 하겠다. 고구려와 백제 두 국가 모두 부여의 후계자이니 음악적으로도 유사성이 깊었을 것이다. 하지만 향로의 악기 모양은 중간 부분이 볼록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에서 건너온 현악기를 구다라고토(百濟琴)라고 이름하였다. 물론, 그 악기는 모양으로 보았을 때 공후로 보이지만, 백제 현악기의 통칭으로 백제금(百濟琴)이란 단어가 쓰였던 것이다.

 

백제금

 

앞선 칼럼에서 거론했던 광주 신창동 현악기 유적과 대전 월평동의 양이두 조각 등으로 보았을 때 백제만의 현악기가 존재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현악기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서동으로 더 익숙한 무왕 37년(636년) 3월에 왕이 신하들과 사비하(泗沘河 : 지금의 백마강)에서 연회를 베풀고 흥에 겨워 금(琴)과 고(鼓)를 연주했는데 그 장소를 대왕포(大王浦)라 했다 한다. 대왕포는 왕포천이 백마강(금강)에 닿은 지역 어디쯤으로 추정한다. 

 

백제 삼현은 기타처럼 생긴 악기로 월금이라고도 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고대 중국이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정권교체를 하던 시기에 부패한 정치에 환멸을 느껴 죽림에서 음악과 술을 즐기며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들이 있는데 이들 중 완함(阮咸)이 즐긴 악기라고 해서 완함이라고도 불린다. 이 악기를 비파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비파와는 모양이 다르다. 백제 삼현이란 이름은 향로상의 악기에 현이 세줄 그어 있어서이다. 그냥 조소상 현의 표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중국 남부에서 세 줄로 된 월금이 발견되었다.

 

백제 삼현


대개 백제를 한반도 경기 남부, 충청, 전라권에만 위치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신채호, 정인보, 문정창 등의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활동한 영역이 부여가 있던 만주벌판뿐만 아니라 중국 남부, 동남아 지방에까지 다다랐다고 한다. 당시 중국 남부에 있던 흑치국(黑齒國)은 빈랑(檳榔)이란 나무의 열매를 씹기 좋아해 이가 까맣게 된 사람들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곳이 백제의 22담로(湛露 : 지방 거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곳 출신 장수가 흑치상지(黑齒常之)이다.

 

빈랑을 씹어 검게 된 치아

사진 출처 : 중앙일보

 

한양대학교 이종구 교수는 이 위치로 추정되는 중국 남부의 백제향(百濟鄕)이란 지역을 찾아 갔는데 백제(百濟)를 중국어  “빠이지”가 아니라 “박짜이”로 발음하고, 맷돌, 외다리방아, 서낭당 등이 있으며, 우리의 사물 북과 비슷하게 생긴 북을 사용하고, 강강술래와 흡사한 춤을 출 때 삼현의 월금으로 반주하는 등 놀랍도록 우리 문화와 유사한 풍습을 발견하였다. 이 삼현 월금의 존재를 근거로 백제 삼현이라 이름하였다.


부여군충남국악단 ; 부여에 와야지만 만나 볼 수 있는 백제의 음악 「백제오악사」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인연은 없다고 했던가? 연고(緣故) 하나 없이 찾은 부여였다. 간간이 취미로 소식을 주고받는 facebook 공간을 통해 필자의 부여 방문을 알고 지인이 열 일 제쳐놓고 나를 맞이하려 부여박물관으로 찾아왔다. 칼럼 소재로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러왔다는 말에 내 손을 붙들고 당신이 근무하는 부여군 충남국악단으로 끌고 갔다. 인구 6만 규모의 작은 소도시이지만 시민들이 우리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국악단을 운영하고 있으니 다른 지자체의 본이 된다 하겠다.

 

토요일 한가한 오후 시골 마을임에도 객석은 절반 이상을 채웠다. 그날의 첫 공연 작품 「백제오악사」는 그 연주가 이루어지는 곳이 부여이기에 더 가치 있고 부여군의 국악단원들 연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게 느껴졌다. 부여에 와야지만 만나 볼 수 있는 백제의 음악 「백제오악사」인 것이다. 공연 배경으로 연출되는 3D영상의 환상적인 미디어아트와 고증을 거쳐 재현한 백제금동대향로 상의 다섯 악기의 연주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듯 조화롭게 연출되었다. 음악은 참으로 아정(雅正)하였다. 백제시대의 음악이 이러했겠구나 상상하며 들으니 더 감흥이 깊어졌다. 백제음악을 복원하려는 국악단 음악가들의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부여군충남국악단 「백제오악사」 공연보기
(https://youtu.be/LJGYIHPZUCA)

 

필자의 짧은 견해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현재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향악이며 백제인의 음악인 수제천(백제가요 정읍의 아명)을 부여군 충남국악단이 복원한 백제오악사의 악기로 연주하면 좀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더 백제음악 같은 느낌이 들것 같은 기대도 든다. 

 

따뜻한 마음으로 달려와 반겨주고 「백제오악사」 공연을 연주자로 선보여 준 모승덕 아우님과 반갑게 맞아주신 김진수 소장님, 「백제오악사」 영상을 유투브와 이 지면에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좋은 인상의 서영례 악장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링크된 공연영상이 부여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부여군 충남국악단으로 이끄는 매개가 되길 바라며 독자님들께 공유한다.

 

끝으로 아래의 두 내용은 혼자만 알고 있기에 너무 아까워 부첨(附添)한다. 백제가 만주까지 진출했다는 기록과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은 왕이라는 존칭을 받았다는 기록이다.

 

중국의 사서 《송서(宋書)》, 《양서(梁書)》, 《통전(通典)》 등의 <백제전>에는 백제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한 뒤에도 요서의 진평이군(晉平二郡)을 경영했다는 기록이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백제의 병사들이 녹산(만주 지역)에 있는 부여를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진서(晉書)》 109권에는 고구려, 백제, 선비족 우문, 단부 사람들이 만주지역에서 모두 병마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속일본후기》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한지 183년이 지난 843년에도 자경(慈敬), 전복(全福), 승의(勝義), 여천(女天), 효충(孝忠) 등 5명의 백제왕이 왕이란 존칭을 받았으며 음악과 춤을 연주하여 일본 천황으로부터 품위를 받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를 찾아서, 학고재, 2001
국립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3.0 향을 사르다, 그라픽네트, 2023
이내옥, 「백제금동대향로의 사상」, 『진단학보』 109호, 2010, 1~28쪽
이종구, 「백제악기연구 (I)」, 『音樂論壇』 제24집, 2010, 273~317쪽
이종구, 「백제 현악기 연구」, 『音樂論壇』 제 27집, 2012, 119~165쪽
이종구,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향로 : 주악 조소상 오른쪽1 악사의 악기에 대한 연구」, 『국악원논문집』 20권, 2009, 191~216쪽
중앙일보 2021. 10. 9. “입속에 붉은빛…구강암 환자 90% 먹었다는 공포의 열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13612
백제오악사 - 부여군충남국악단(2024. 6. 29.) https://www.youtube.com/watch?v=LJGYIHPZU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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