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기억의 실타래, 비단과 채색으로 직조된 순간들: 김선정·김숙경 2인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갤러리초이에서 김선정, 김숙경 작가의 2인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이 2월 1일부터 2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두 작가가 각자의 조형 언어로 여성의 삶과 시간,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비단, 배경이 아니라 회화의 주체로
김선정 작가는 오랫동안 비단을 매개로 여성성과 시대성을 탐구해 왔다. 그녀의 작업은 전통적인 비단의 구조와 채색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조형적 의미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비단은 길이는 무한하지만, 폭은 110cm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 물리적인 한계를 가지지만, 이러한 제약이 오히려 독창적인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비단 위에 그녀는 겹쳐 채색하는 기법을 활용해, 화면에 깊이와 공간감을 더한다.
특히 그녀의 작업에서 비단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회화적 요소의 주체가 된다. 여러 겹으로 배치된 비단은 투명성과 중첩을 통해 미묘한 색감과 공간감을 형성하며, 회화와 오브제 사이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현대와 전통이 만나는 순간
김선정 작가의 대표작 <색동 블라인드>는 전통적인 색동 한복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으로, 비단 위에 청묵과 색동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감성을 담아냈다.
그녀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신윤복의 그림 속 여성들에게서 나타나는 색 조합을 작품에 적용해, 시대를 초월한 미감을 구현하려 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이러한 색감의 활용은 단순한 고증을 넘어서, 전통과 현대의 감각이 공존하는 새로운 미적 경험을 선사한다.
김선정 그녀_색동블라인드 83x76cm 비단에 청먹과 색동 2025
특히 그녀는 작품 속 인물들을 창조할 때 실제 모델이 아닌 다양한 요소를 조합하여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출한다. "눈은 한 사람에게서, 코는 또 다른 인물에게서, 입술은 전혀 다른 곳에서 가져와 구성한다"는 설명처럼, 그녀의 인물화는 단순한 초상을 넘어선 새로운 해석의 결과물이다.
파묘에서 영감을 얻은 ‘컨버스 운동화’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현대적 요소가 전통적 이미지와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김선정 작가는 "영화 파묘에서 김고은 배우가 전통적인 무당 복장을 하면서도 컨버스 운동화를 신는 장면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며, 이번 작업에 운동화를 포함시킨 이유를 설명했다.
전통적인 한복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지만, 그녀의 발에는 현대적인 컨버스 운동화가 놓여 있다. 작가는 "전통적인 직업을 가진 인물이지만, 여전히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코드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요소는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여성의 삶을 표현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보통 푸른색은 남성적인 색으로 여겨지지만, 나는 이 색이 인간의 존엄과 깊이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고 작가는 전했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푸른색이 가진 힘과 상징성이 강조되며,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또한 그녀는 신윤복의 풍속화를 참고하여 푸른색 치마를 입은 여성들을 작품 속에 자주 등장시키는데, 이는 조선 후기 여성들의 복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상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색의 조합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면서도, 시대적 맥락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엿보인다.
여성을 그리는 여성, 김숙경 작가의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삶, 그리고 사랑
김숙경 작가의 작업은 한 여성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작가는 “내 삶이 마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며, 그림 속 인물들이 인생의 다양한 순간을 맞이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장하고, 사랑을 받고, 삶을 마주하며 결국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녀의 그림 속 인물들은 사랑 속에서 자란다. 한 소녀가 처음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그 세계는 아름답고 순수하다. 엄마가 준 색동실처럼 그녀의 인생은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지고, 각기 다른 감정과 경험들이 하나의 실타래처럼 엮여간다.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시간의 흔적이 쌓인다.
김숙경 생의찬미2-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하기를…162x130cm 2024
작가는 “이 그림을 보면서 관객들이 자신이 받은 사랑을 떠올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축복을 받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의 작품은 조용히 이야기한다.
인생의 흐름 속에서 찾아낸 '나'
김숙경 작가의 작품 속 여성들은 특정한 순간을 맞이한다. 작품 속에서 한 여성은 결혼을 앞두고 반지를 받으며 자신의 새로운 삶을 마주한다. 또 다른 여성은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가족과의 연결을 다시금 되새긴다. 그녀는 편지 속 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를 따라가며, 부모와 자식 간의 끊어질 수 없는 유대를 형상화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한 인간이 겪는 복잡한 감정과 경험을 담고 있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깊고 다채로운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노년의 아름다움,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노년의 아름다움을 조명한다. 그녀의 그림 속 할머니는 노인이 아니라, 인생을 온전히 살아온 사람이다. “보통 전시장에서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고, 결국 할머니가 된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그리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녀의 작품 속 할머니는 삶을 온전히 살아낸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흔적이 가득하지만, 그녀는 당당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다. 주변에는 그녀를 추앙하는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이 놓여 있고, 그녀는 여전히 젊은 세대와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작가는 “이 할머니는 노인이 아니라,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증거를 가진 존재”라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걸어왔는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작품 속에는 ‘거울’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은 작품 속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림 속 여성이 누구든, 결국 이 작품의 주인은 작품을 보는 당신”이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와닿는 순간이다.
작가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 이 작품 속에서 찾길 바랐다”며, “그림이 끝나는 지점은 관람객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젊은 관객들에게도 이 전시가 의미 있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인생의 어느 순간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그림이 각자의 이야기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갤러리초이 김미경 대표는 “이번 전시는 단순한 여성의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며 겪는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작업”이라며 “관람객들이 각자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떠올리며 작품과 교감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 정보
- 전시명: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
- 작가: 김선정, 김숙경
- 장소: 갤러리초이 (서울 마포구 토정로 17-7)
- 기간: 2025년 2월 1일(토) ~ 2월 26일(수)
- 운영 시간: 화-토(10:00~19:00) (토요일 18:00까지) / 일요일 12:00~18:00 (예약 관람) /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