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희 명창의 ‘엇박’, 놀부가 다시 태어났다…“판소리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다”
‘전통 판소리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
수림문화재단의 창작 전통음악 공연 브랜드 ‘수림뉴웨이브 2026 《엇》’ 10주년의 첫 무대에 오른 정상희 명창의 공연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지난 8월 27일 서울 김희수아트센터 SPACE1에서 펼쳐진 정상희의 ‘엇박’은 판소리가 지닌 해학과 풍자, 소리와 연기의 힘을 오늘의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무대였다.
2017년 시작해 올해 10주년을 맞은 수림뉴웨이브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온 음악가를 조명하고, 매년 새로운 주제를 제시해 참여 예술가들이 이를 모티브로 신작 ‘뉴웨이브 오리지널’을 창작하는 공연이다. 올해의 주제는 익숙한 흐름에서 살짝 비껴나 새로운 긴장과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엇’이다.
첫 주자로 나선 정상희는 올해의 주제 ‘엇’과 흥보가의 ‘박’을 절묘하게 결합해 공연 제목을 ‘엇박’이라 붙였다.
동초 김연수-故 김명신으로 이어지는 소리 계보
정상희 명창은 동초 김연수 명창에서 스승인 故 김명신 명창으로 이어지는 정통 소리 계보를 잇고 있는 흥보가 이수자다.
여덟 살 때부터 판소리를 배운 정상희에게 스승 김명신 명창은 단순히 소리를 가르쳐준 선생을 넘어 그의 예술관과 삶을 만든 존재였다.
정상희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스승은 병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성대에 무리가 생겨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게 됐고 이후 약 15년 동안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소리꾼에게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예술적 생명을 잃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스승은 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정상희 역시 그런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스승은 손으로 음의 흐름을 하나하나 그려가며 어린 제자에게 소리를 가르쳤고, 정상희는 그 가르침을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이어갔다.
정상희는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사람이 견디는 모습, 그리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며 “선생님을 보면서 예술을 하려면 이렇게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야 나의 예술을 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고 배웠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몸에 새긴 전통의 힘이 있었기에 이날 정상희의 ‘엇나감’은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직접 작창한 현대판 ‘놀보가’…객석에서 터진 웃음과 환호
이번 공연에서 정상희는 자신이 직접 작창한 현대판 ‘놀보가’를 선보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흥보가에서 놀부는 욕심 많고 심술궂은 악인이다. 하지만 정상희는 여기에서 한 발짝 비껴섰다.
‘놀부는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는 놀부를 단순한 악인으로 단죄하는 대신 한 인간이 가진 욕망과 그 욕망이 만들어진 삶의 조건을 들여다봤다.
정상희는 “나는 무엇을 비껴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흥부처럼 착하게 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더 사랑받고 싶고 더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를 소리로 풀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정상희 명창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 가장 욕심 많은 인물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다 놀부를 떠올렸고, 놀부의 입장에서 그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엇박’이 탄생했다.
그렇게 탄생한 현대판 놀보가는 시종일관 객석에서 웃음과 환호를 끌어냈다. 옛이야기를 단순히 현대적으로 포장한 것이 아니라 전통 판소리의 어법과 재담, 아니리, 소리꾼과 관객 사이의 즉각적인 호흡을 살리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꿔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객석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과 추임새, 환호를 지켜보면서 ‘판소리의 세계화가 충분히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언어가 달라도 인간의 욕심과 희로애락은 다르지 않다. 여기에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뛰어난 소리꾼의 연기력이 결합한다면 판소리는 설명을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전통문화’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의 관객과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동시대 공연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정상희의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각설이·사당패·초라니패…정상희의 진가 드러난 ‘놀부 박타는 대목’
이날 공연의 백미는 역시 동초제 흥보가의 ‘놀부 박타는 대목’이었다.
정상희는 창작 판소리에서 출발해 자신이 오랫동안 갈고닦은 동초제 흥보가의 놀부 박타는 대목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흥부의 박에서는 온갖 재물과 복이 쏟아지지만 놀부의 박에서는 정반대의 세상이 펼쳐진다. 박을 탈 때마다 놀부를 혼내주기 위한 존재들이 등장해 그의 재산을 축내고 욕심을 응징한다.
정상희가 이날 설명한 동초제 흥보가에는 놀부 집안의 재산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력까지 담겨 있다. 놀부의 할아버지가 과거 상전 집안의 재산을 훔쳐 내려왔고, 첫 번째 박에서는 그 상전이 나타나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주머니를 앞세워 놀부의 재산을 거둬간다.
이어지는 박에서 등장하는 각설이와 사당패, 초라니패 등 갖가지 인물과 연희패를 표현할 때 정상희의 진가는 절정에 달했다.
한 사람의 소리꾼이 순식간에 각설이가 됐다가 사당패가 되고 다시 초라니패가 된다. 목소리와 표정, 몸짓, 장단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눈앞에 살아 움직이게 했다.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그 인물에 ‘빙의’된 듯 능청스럽고 익살스러운 연기와 재담을 쏟아내며 객석을 자지러지게 했다.
판소리에서 소리꾼은 노래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창과 아니리는 물론 발림과 재담, 연기, 관객과의 호흡까지 혼자 감당해야 한다. 특히 흥보가처럼 해학과 연희성이 강한 작품에서는 소리꾼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지녔느냐가 무대의 재미를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각설이와 사당패, 초라니패를 오가며 소리와 연기, 재담과 몸짓을 한꺼번에 풀어내 객석을 들었다 놓는 정상희의 재능은 독보적이었다. 정상희가 왜 오늘날 흥보가의 재미와 연희성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소리꾼 가운데 한 사람인지를 다시 확인하게 한 순간이었다.
“잠시 엇나가더라도 뿌리는 두고 싶었다”
정상희의 창작이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가 새로움을 좇으면서도 판소리의 뿌리를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연의 시작을 장식한 상여소리가 대표적이다. 정상희는 놀부가 전생을 마치고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상여소리로 표현했다.
특히 자신의 소리가 잠시 전통에서 ‘엇나가더라도’ 그 출발점만큼은 전통에 두고 싶었다고 했다. 이에 송만갑 명창이 남긴 상여소리 음원을 찾아 소리를 복원한 뒤 이번 작품에 맞게 아주 느린 호흡으로 재구성했다.
정상희는 “나는 여기서 이 공연에서 잠시 엇나가지만 그 뿌리는 두고 싶어서 그 소리를 복원해 아주 느리게 불렀다”고 설명했다.
이 한마디는 이날 공연 전체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전통을 깨뜨리기 위해 ‘엇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비껴갈 수 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진행을 맡은 천재현과 정상희 명창 이상화 고수
진행을 맡은 천재현 역시 정상희의 창작 판소리에 대해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면서도 “마치 옛날부터 이런 소리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며, 전통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금의 이야기와 삶에 맞춰 다시 정돈한다고 평가했다.
판소리는 ‘대화’…관객과 함께 완성한 무대
정상희는 판소리를 ‘대화’라고 정의한다.
소리꾼이 소리로 그림을 그려주면 관객은 그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고, 그렇게 무대와 객석이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의 판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정상희 명창과 고수 이상화
정상희가 재담 하나를 던지면 객석에서 웃음이 돌아왔고, 소리를 밀어붙이면 추임새와 박수가 따라붙었다. 소리꾼은 다시 그 반응을 받아 새로운 표정과 몸짓으로 되돌려줬다. 판소리가 본래 ‘판’에서 관객과 함께 만들어지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
진행자 천재현도 공연을 지켜본 뒤 “이렇게 즐겁고 재미있고 좋은 소리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국악의 대중화를 걱정하며 살까 하는 생각을 했다”며 이런 자리가 더욱 많아지고 이러한 소리꾼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상희의 가능성은 국내 무대를 넘어선다.
아이돌 못지않은 ‘끼’…세계무대의 정상희를 기대한다
요즘 세계를 누비는 K팝 아이돌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끼와 실력, 무대를 장악하는 에너지를 정상희는 갖고 있다.
여기에 어린 시절부터 한 스승에게 소리를 배우며 축적한 전통의 깊이, 긴 세월 독공을 견뎌낸 내공, 관객을 순식간에 자신의 판으로 끌어들이는 친화력과 재담, 각설이·사당패·초라니패 등 수많은 인물로 자유롭게 변신하는 연기력까지 더해졌다.
특히 전통을 지키는 것과 현대적인 창작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그의 태도는 판소리가 세계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상희는 이날 “전통 판소리를 고집하고 전통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다”면서도 “‘엇’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공식적으로 떳떳하게 엇나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전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기에 마음껏 엇나갈 수 있고, 아무리 멀리 엇나가도 다시 판소리의 본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수림뉴웨이브 10주년의 첫 무대 ‘엇박’은 정상희라는 소리꾼이 가진 힘을 유감없이 확인하게 한 공연이었다.
소리 잘하고, 연기 잘하고, 잘 놀고, 관객을 웃기면서도 전통의 무게를 잃지 않는 소리꾼 정상희
이날 객석을 가득 채운 웃음과 환호가 국내 무대에만 머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전통이라는 단단한 뿌리에 시대를 읽는 창작력과 타고난 끼를 겸비한 정상희 명창이 언젠가 세계의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며 우리 판소리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날을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