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여! 이 땅의 모든 어머니께 복을 주소서- 강원도립극단의 창작 우리소리극 '까만 인절미'
- (전)KBS 부사장, 저널리스트 임병걸
"신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드셨다
God could not be everewhere, and therefore he made mothers"
- 유대 속담
강릉아트센터 신사임당홀에서 펼쳐진 어머니의 노래, 어머니의 사랑
강원도립극단이 올해의 공연으로 올린 우리소리극 '까만인절미' 를 보러 간 날, 경포대에도 오죽헌에도 하루 종일 궂은 비가 쏟아졌다.
제목도 그렇고 소리극의 테마와 소재 모두 한없이 무겁고 가슴 아픈 터라 공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마음마저 빗물에 흠뻑 젖었다
사각형에 투명한 유리 외관을 갖춘 모던한 강릉아트센터로 들어서는 순간 '사임당홀'이라는 대공연장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최고의 학자요, 관료였던 율곡 이이를 길러내신 현모양처의 상징!
신사임당의 고향이 강릉이고 보면, '까만 인절미'의 주인공인 다섯형제의 어머니 이성례의 자식 사랑과 거룩한 순교자의 이야기가 강릉에서 첫번째 막을 올린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한 여인은 명문 가문의 규수로 태어나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고 율곡이라는 대학자를 길러 냈고, 다른 한 여인은 삼정의 문란과 백성의 궁핍이 극에 달하던 조선 후기에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 필사의 몸부림을 치다가, 만민평등의 복음에 눈을 떠 갖은 고초를 겪고, 신앙과 모성애 사이에서 고뇌하다 순교로 모두 이뤄 낸 평범한 아낙이었다.
신사임당의 혼백도 '까만 인절미'를 보러 오셨을까?
지상의 임금과 하늘의 천주 사이, 죽음과 삶 사이에서
'까만 인절미'의 막이 오르고 숨어살던 '사학쟁이'들의 합창으로 '주기도문'이 어둡고 장중한 무대를 뚫고 객석으로 밀려들어오는 순간, 나도 객석도 숙연해졌다.

천주교 박해의 당위성을 둘러싸고 팽팽하게 이어지는 서슬퍼런 찬성의 주장과 반대의 항변이 이어지고, 박해를 피해 산골로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밀고자에 의해 발각되고 마침내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이자 이성례 여인의 남편 최경환까지 형장으로 끌려가는 잔혹한 장면에서 나는 이따금씩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19세기 초의 70여년간에 겪은 조선 교인들만큼의 수난을 겪었을까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학자 로빈슨의 이 말처럼 1791년 신해박해에서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세 세대 넘게 이어진 조선왕조의 천주교 박해는 그 규모와 방법에서 세계 종교박해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만큼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극의 시대적 배경이 됐던 헌종 시기는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와 양반,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비참해지던 시기였다.
반상의 차별을 부정하고 만인의 평등을 설파한 천주교의 가르침은 절망의 나날이었던 평민들과 노비들에게는 한 줄기 튼튼한 희망의 동아줄이었을테지만, 썩은 동아줄 같은 유교이데올로기를 움켜 쥔 기득권층에게는 그야말로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불온한 사상이었을 터,
맏아들은 천주교의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의 길을 떠나고, 남편마저 형장의 이슬로 보낸 다섯남매의 어머니 이성례 앞에 놓인 운명은 가녀린 한 여인으로서는 감당하기 너무도 버겁고 가혹했으리라.

'천주를 모르오' 한 마디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자식들 곁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회유 앞에서 가녀린 모성이 한없이 흔들리는 것은 인지상정.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께서 예언하셨듯 예수의 존재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처럼 이성례 여인은 천주를 부인한 댓가로 목숨을 부지하고 자식을 부둥켜 안았다.
하지만 양심을 거스른 죄책감과 배교에 대한 세상의 조롱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다시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죽음은 삶보다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처음 이성례 여인은 결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천주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들을 위해 부인한 것이었으니 그 삶은 결코 죽음보다 가볍지 않았다.
다음 이성례 여인의 신앙고백과 순교 역시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 죽음 역시 삶보다 가볍지 않았다.
자식들을 앉혀놓고 마지막 순교의 형장으로 향하는 어머니, 찢어지는 가슴, 흐르는 피 눈물을 삼키면서 자식들에게 형장으로 오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대목,
" 엄만 눈 감아도 다 보여, 하얀 너의 솜털
내 품을 파고들던 너의 냄새 선물같았던 하루 하루 "
이성례 역할을 맡은 박애리 명창의 한없이 애절하고 투명한 통곡에 객석에서는 여기 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언제부턴가 눈물샘이 메말라버린 나도 눈을 자꾸 꿈벅였다.
" 울 엄마 목, 한 번에 베주세요"
쌀은 커녕 피죽조차 변변히 구하기 어렵던 참혹한 굶주림의 시대, 구걸해 온 인절미를 품 안에 꼭꼭 감추었다 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에게 내밀며 온 몸을 땅에 내던지고 애원하던 아들 희광이의 절규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귓전에 울린다.
아들의 애끓는 호소는 남의 목을 베는 잔인무도한 칼잡이 망나니의 마음도 움직였는지 망나니는 이성례 여인의 목을 베기 전 자식이 건넨 까만 인절미, 때국에 절은 남루한 옷 속에 꼭꼭 몇날 몇일을 간직했을 그 인절미를 어머니에 건네고, 이성례 여인은 자식의 마음을 자신의 품에 묻은 채 처형된다.

소리극의 총연출을 맡은 김경익 예술감독의 말처럼 "그 거칠고 볼품없는 떡 한 조각이 이성례 여인에게는 인간의 영원한 두려움, 죽음을 극복하는 힘"이 됐으리라.
어머니, 세상 가장 뭉클한 말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알아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 김초혜 '어머니' 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몸으로 겪을 수 있는 사랑 가운데 감히 신의 사랑에 견줄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세상 둘도 없는 냉혈한도, 부랑배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두 눈에 뻗치던 살기는 걷히고 촉촉하게 충혈되는 장면을 우리는 영화에서 재판정에서 자주 목격한다.
김초혜 시인의 탄식대로 내세에서 서로 몸을 바꿔 태어나보기 전에는 그 깊고 거룩한 사랑을 헤아릴 수도, 갚을 수도 없지 싶다.
우리소리극 "까만 인절미" 가 조선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최양업 신부님의 부모를 모티브로 한 일종의 종교극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천주교 박해사에 투영된 한 모성의 희생사에 더 거룩한 방점이 찍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소리극을 기획한 김별아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의 설명처럼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사람을 사람답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가족들이 서로를 위해 흘린 눈물과 끝내 놓지 않았던 손이 어떻게 참혹한 고통을 견디게 했는지를" 천주교 박해사를 통해 보여주는 휴먼가족드라마가 아니었나 한다.
그 모티브가 먹거리 가운데 가난한 시절 소원 중에 소원이었던 쌀, 쌀떡이었다는 점이 어릴 적 보리밥을 유난히 싫어했던 내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했다.
" 아이들 입에 밥들어가는 것, 극락이구나"
고은 시인의 짧은 시 '아버지' 다
자신은 헐벗고 굶주려도 자식만큼은 등따숩고 배불리 먹이고 싶은 심정, 가난한 시절 세상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고 보면, 소리극의 제목 '까만 인절미'는 어머니와 자식, 자식과 어머니의 거룩하고 애닲은 사랑의 매개로서, 피조물에 대한 천주의 사랑의 메타포로서 강렬한 울림을 준다.
춤과 노래 연기의 복합체로서의 소리극, 그 무한한 가능성
이번 공연은 내용과 연기도 좋았지만 '소리극'이라는 형식도 퍽 인상적이었다. 국악의 판소리와 민요, 춤과 연희를 서양의 연극이라는 거푸집 속에 알차게 담아낸 신선한 실험이었다.
그동안 국극, 창극을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로 국악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공연도 자칫 박제되기 쉬운 전통 연희와 상업적 흥행에 매몰되기 쉬운 서양 뮤지컬의 장점을 살려 정신과 형식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내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판소리와 민요 명창으로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는 박애리 명창이 어쩌면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서구식 연극과 대사까지 떠안아 펼친 혼신의 연기는 객석의 뜨거운 열기과 찬사로 충분히 보상받았겠다.
함께 열연을 펼친 강원도립극단원들에게도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서양 음악에 길들여져있는 목청과 발성법을 극복하고 판소리와 민요를 연습한다는 것이 축구선수에게 야구를 하라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텐데 전문 소리꾼 못지 않게 소화해냈다. 그야말로 투혼을 발휘했다.

팜플렛을 읽어보니 매주 소리를 훈련하면서 성대결절을 겪을 만큼 어려움을 겪었다니 땀흘리지 않고 오는 감동이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국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특히 이번 공연의 작창과 소리지도를 맡은 이영태 음악감독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가 팜플렛에서도 밝히고 있듯, 창작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통소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극의 전체 색조는 비극이지만, 극 도중 아이들의 익살스런 노래소리, 인터미션에 해당하는 거지광대타령과 같은 해학도 표현해야 하는 만큼 슬픔과 기쁨, 거룩과 해학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을텐데 무난히 소화해 낸 작가의 역량이 놀랍다.

이영태 감독의 말처럼 장단에서도 흥겨운 자진모리 휘몰이 장단과 한스러운 진양조 장단을 적절히 배합했고, 선율에서도 슬픈 계면조와 함께 밝고 힘찬 우조와 평조도 가미했다.
도입부의 '주기도문'은 따로 떼어 성당의 미사시간에 당장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이밖에도 삶과 죽음, 배교와 순교, 공포와 용기,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우리 삶 속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갈아들면서 무한반복되는 것들을 상징하듯 설계된 수직 이동형 원형 계단과 죽음과 고통을 암시하는 검은 수직천과 수묵화의 배치 등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 독창적인 무대디자인과 철처한 고증을 거쳤다는 의상 등도 인상적이었다.
연기자도 예산도 자원도 관객층 확보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로컬 극단들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번 소리극은, 모성애의 다소 부족한 디테일이나 배교 순교의 전환과정의 미흡한 설명 등 몇가지 아쉬운 점을 감안해도 뜨가운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번 소리극은 9월 말까지 속초, 철원, 원주, 춘천 네 곳에서 공연이 이어진다니 신앙을 갖고 있던 무신론자이던 관계없이 가능한 한 많은 관객이 공연장을 찾았으면 한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우리소리극 '까만 인절미'를 봐야 할까?
"순교라는 사건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하여 완성되는 인간됨의 과정에 집중했습니다."
김경익 연출자의 이 말에 답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매일 매일 삶속에서 죽음과 삶, 두려움과 용기, 희망과 절망,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는 존재들이고, 이성례 여인과 그 가족들의 삶처럼 날마다 '죽으면서 태어나는' 아니 '죽으면서 태어나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