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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리뷰] ‘서울기본무’의 뿌리를 찾아서…1950년대 무용연구소와 춤 교육의 기억을 복원하다

서울경기춤연구회, 서울돈화문국악당서 ‘서울 무용연구소 시대의 기록: 서울 기본무’ 포럼·공연 개최
조흥동 원로무용가의 생생한 증언부터 윤중강·최혜리의 발제까지…“기본무는 하나의 정형이 아닌 시대와 스승이 만든 다양한 춤의 체계”

 

‘서울기본무’의 뿌리를 찾아서…1950년대 무용연구소와 춤 교육의 기억을 복원하다

 

1950~70년대 서울 곳곳에 자리했던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한국춤의 기본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승됐는지를 되짚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경기춤연구회는 지난 8월 30일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서울춤연구시리즈4 ‘서울 무용연구소 시대의 기록: 서울 기본무’ 포럼 및 공연을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근현대 서울 춤의 중요한 교육 공간이었던 무용연구소를 통해 ‘서울기본무’의 형성과 변화, 전승 과정을 살펴보고, 기록 속에 희미해진 원로 예술가들의 춤과 기억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마련됐다.

 

서울경기춤연구회 윤종현 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그동안 연구회가 서울·경기춤의 실체를 찾기 위한 작업을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특히 앞선 연구가 1930~40년대 근대 전통춤의 맹아와 전승 계보를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네 번째 시리즈에서는 시선을 1950년대 무용연구소 시대로 옮겨 서울기본무의 형성과 교육체계를 살펴보는 데 의미를 뒀다.

 

윤 회장은 “1950년대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우리 춤의 기본과 교육체계가 태동하고 정립되던 중요한 전환기였다”며 당시 서울지역 무용연구소들이 일구어낸 서울기본무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이 이번 포럼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서울경기춤연구회 황윤지 부회장 역시 개회사를 통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수십 곳의 무용연구소가 활동하며 한국무용의 중요한 교육 기반을 형성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당시 무용연구소에서 만들어지고 가르쳐졌던 초기 기본무의 다양한 개성이 작품 중심의 전승과 표준화 과정에서 점차 기억의 뒤편으로 밀려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조흥동 “서울 사대문 안에 무용연구소 50여 곳…기본은 모두 달랐다”

 

이날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원로무용가 조흥동의 생생한 구술 증언이었다.

 

조흥동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1950~70년대 서울 무용연구소의 풍경과 김진걸·김윤학·김보남·김천흥·송범 등 당대 무용가들의 교육방식과 춤에 관한 기억을 풀어냈다.

 

원로무용가 조흥동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서울 사대문 안에는 수많은 무용연구소가 존재했고, 오늘날처럼 한국무용의 ‘기본’이 하나의 정형화된 방식으로 통일돼 있지 않았다. 연구소마다 스승의 예술관과 계보, 음악적 기반에 따라 서로 다른 기본을 가르쳤으며 ‘고전무용’, 신무용, 궁중무용, 민속무용 등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조흥동은 1970년대 무렵 한국춤 기본동작과 명칭을 통일하려는 논의도 있었지만, 같은 동작을 두고도 지역과 스승에 따라 명칭이 달라 합의가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발레와 달리 한국춤은 용어와 동작을 하나의 체계로 표준화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김진걸 무용연구소에서 수학했던 기억을 전하며 당시 연구소에 유치반·중등반·고등반·일반반 등 다양한 교육과정이 있었고, 장구와 구음이 중요한 교육수단이었다고 증언했다. 녹음기와 카세트테이프 등 음향기기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장구와 구음이 춤 교육의 중심에 있었다는 설명이다.

 

또한 당시 사회적으로 춤에 대한 시선이 지금과 크게 달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춤을 배우는 것을 집안에서 반대하거나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서울 사대문 안에 수많은 무용연구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춤 문화의 저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윤중강 “기본무는 획일적인 하나의 춤이 아니었다”

 

이어진 발제에서 윤중강 평론가는 ‘기본무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1950년대에서 70년대 서울 무용연구소의 기억’을 주제로 당시 서울의 무용연구소와 그곳에서 이루어진 교육을 구체적인 장소와 자료를 통해 추적했다.

 

윤중강은 무용연구소의 역사를 춤 자체만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당시 서울의 공간과 생활문화, 음악, 교육환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비롯해 조택원, 김백봉, 송범 등 여러 무용가들의 연구소와 교육 현장을 짚으며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무용연구소가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풀어냈다.

 

윤중강 평론가

 

그가 강조한 핵심은 “기본무는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굿거리와 자진모리 등 일정한 장단과 동작으로 구성된 기본무를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 어린이들은 ‘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 ‘양산도’ 등 친숙한 음악과 춤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본을 익혔다. 부채와 바구니, 칼 등의 소도구를 단계적으로 활용하는 교육 역시 하나의 기본 훈련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윤중강은 이를 통해 “기본무를 획일적으로 ‘이것이 기본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다”며 연령과 상황, 지역, 교육자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기본무가 존재했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춤과 음악의 불가분성이었다. 당시 무용연구소에서는 장구와 구음뿐 아니라 LP와 릴테이프 등이 적극 활용됐고, 어떤 곳에서는 가야금과 양금, 장구 등을 먼저 배우며 리듬을 몸에 익힌 뒤 춤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윤중강은 기본 훈련이 단순히 동작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리듬을 익히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최해리 “기본에서 기본무로…몸의 지식이 체계가 되는 과정”

 

두 번째 발제에 나선 무용인류학자 최해리는 ‘기본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기본무의 체계화와 무보화 과정을 살폈다.

 

최해리는 과거의 ‘기본’과 오늘날 말하는 ‘기본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사회에서도 장단과 디딤, 걸음, 춤사위를 반복하며 몸을 만드는 기본훈련은 분명 존재했지만, 이는 스승의 몸에서 제자의 몸으로 이어지는 구전심수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근대 이후의 기본무는 무용가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움직임을 선별하고 분류하고 명명해 반복 가능한 교육체계로 조직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무용인류학자 최해리

 

특히 최해리는 최승희를 비롯한 근현대 무용가들의 무보 자료를 통해 기본무가 단순한 동작의 집합이 아니라 자신의 춤을 분석하고 분절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일종의 근대적 지식체계였다고 분석했다.

 

최승희의 경우 민족무용 기본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발레의 훈련체계를 참고해 지지 동작과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단독 기본 등을 구분하고, 굽힘과 걸음에서 도약·회전으로 발전하는 단계적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도 소개됐다.

 

그러나 이날 논의는 “기록이 곧 전승은 아니다”라는 중요한 문제로 이어졌다.

 

 

지정토론에서는 무보가 남아 있더라도 원리와 호흡, 장단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실제 춤으로 온전히 복원하기 어렵다는 경험이 제시됐다. 특히 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음악적 시간과 장단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며, 무보와 함께 직계 제자들의 몸을 통한 전승이 이어졌을 때 기록의 의미가 더욱 살아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논의는 AI와 디지털 기술 시대의 춤 기록 문제로도 확장됐다. 최해리는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춤이 저절로 기록되고 재현되는 것은 아니며, 결국 어떤 자료를 수집하고 어떻게 입력하고 해석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오히려 전승공동체의 연구와 기록, 교육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학술적 논의를 몸으로 확인하다…김천흥·최승희·박금슬 기본무 실연

 

토론회 2부에서는 앞선 학술적 논의를 실제 춤으로 확인하는 서울기본무 실연 무대가 이어졌다. 먼저 김천흥전통춤보존회 이하경·윤이재가 ‘김천흥류 심소기본무’를 선보였다. 김천흥의 기본무는 궁중정재의 절제된 신체 정렬과 민속춤의 장단·굴신이 한 몸 안에서 어우러지는 춤으로, 손과 발의 기초동작을 비롯해 보법과 수법, 이동과 방향 변화 등을 통해 장단과 신체, 공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어 최신아예술단은 1980년대 버전으로 재현한 최승희의 발동작과 상체기본동작을 무대에 올렸다. 꼬리치마의 선을 극대화하는 엄격한 신체 정렬과 발가락을 들어 올려 고추즈를 신은 듯 딛는 독특한 발디딤 등 최승희 무용의 특징적인 움직임을 통해 근대 한국춤의 신체 훈련 방식을 되살렸다.

 

마지막으로 박금슬춤전승회 김은희 명인은 박금슬류 춤동작 기본인 하체·중체·중하체·상체동작과 살풀이를 선보였다. 박금슬의 기본무는 기(氣)와 도(道), 인서사팔(仁恕娑八)의 정신을 기본 원리로 삼아 호흡에서 출발하고, 하체와 상체의 움직임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춤사위를 완성하도록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2부 실연은 김천흥·최승희·박금슬로 이어지는 서로 다른 기본무의 원리와 신체 운용법을 한자리에서 비교해 보여주며, 이날 토론에서 제기된 ‘기본무는 하나의 획일적 형식이 아니라 각 무용가의 철학과 시대적 환경, 교육방식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춤의 체계’라는 문제의식을 몸으로 확인하게 하는 의미 있는 무대였다.

 

‘서울기본무’, 하나의 정답 아닌 서울 춤의 살아있는 역사

 

이번 토론회가 던진 가장 중요한 화두는 ‘서울기본무’를 하나의 정형화된 춤으로 규정하기보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수많은 스승과 제자, 무용연구소와 음악가들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춤 문화의 역사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무용연구소에서 울려 퍼지던 장구와 구음, LP와 릴테이프, 어린이들이 배우던 민요춤과 소도구춤, 원로무용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구성했던 기본동작까지 모두가 오늘날 한국춤의 몸을 만들어낸 자산이었다.

 

특히 문헌만으로는 복원하기 어려운 원로예술가들의 구술과 개인 사진, LP 재킷, 공연 프로그램, 무보, 옛 무용연구소의 주소와 위치 등을 함께 기록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이번 포럼을 통해 거듭 확인됐다.

 

윤중강은 행사 말미 조흥동의 기억을 토대로 서울의 옛 무용연구소 현장을 직접 돌아본다면 “서울 춤의 지형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 논의가 서울경기춤연구회의 향후 과제를 제시한 셈이다.

 

1950년대 무용연구소의 작은 연습실에서 시작된 발디딤과 장단, 호흡은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의 ‘서울기본무’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포럼은 그 기본무를 하나의 고정된 형식으로 규정하기보다 사라져가는 기억과 기록, 음악과 몸의 전승을 함께 복원해야 할 서울 춤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