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가야금의 발자취를 찾아 악성 우륵의 고장 고령을 가다.

  • 등록 2024.04.24 12: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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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의 발자취를 찾아 악성 우륵의 고장 고령을 가다.


대가야를 찾아서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2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풍물 동아리를 지도하던 취미가 뒤늦은 학구열로 이어졌다. 무턱대고 시작한 공부가 박사 공부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앎이 미천하여 남들이 물으면 엉뚱한 답이나 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지난겨울부터 우리 음악 유산을 답사하는 여행을 시작하였다. 첫 여행의 주제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우리 전통 현악기인 가야금으로 잡았다. 가야금의 본고장을 찾기 위해 제2 중부내륙고속도로 타고 성주를 지나 고령JC에서 광주-대구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고령 IC로 나갈 때쯤 다양한 크기의 거대한 봉분이 비누 거품처럼 보글보글 솟아있는 경치를 만났다. 2023년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대가야의 고분군이었으며, 72호 무덤까지 번호를 매겨놓을 정도로 그 규모가 상당했다. 오늘의 새로운 여정을 위해 우선 가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대가야 고분군

 

가야의 역사적 발자취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가야는 역사 시간에 들어는 보았으나 자세히 알지 못하는 고대국가의 이름 정도로 기억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백제, 신라, 마한, 진한, 변한 등과 혼재되어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드러났다. 여행하기에 앞서 가야와 관련된 책을 검색하여 인터넷 서점을 통해 이러 저러한 책들을 주문하였다. 새로이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 실로 많았다. 한반도의 고대 부족 국가는 북쪽은 세력이 강한 고구려에 복속되고 마한의 부족들은 백제로, 진한의 부족들은 사로로 편입되어 왕이 다스리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변한(弁韓)의 부족들은 어느 시점이 계기인지 알 수 없으나 가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일본말로 한자 韓, 伽羅, 酣樂은 모두 ‘가라’라고 표현하고 선진국을 뜻할 때 쓰이는 辛도 ‘가라’로 발음된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삼한의 한(韓)의 고대어 발음이 ‘가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시대부터 그 지역의 부족을 가야를 뜻하는 ‘가라’로 불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야는 철기 문명이 매우 발달했던 나라로 덩이쇠를 주변 국가와 왜로 수출하였는데 이렇게 이룩한 경제적 토대를 기반으로 부유해진 부족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점령하기보다는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맹을 이루며 주변국 정세에 대응하여 존재하였다. 특히, 탄소를 주입하여 철을 쉽게 제련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동시대에 다른 지역에는 인도 지역에만 존재하던 것으로 가야와 인도와의 교역을 유추하게 해 준다.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김수로왕의 부인인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왕옥 이야기와도 연관되어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고대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일본을 당시는 왜라 부름)의 관계가 긴밀했음도 여러 자료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임나일본부설이라는 통탄할 만한 주장도 있는데, 이는 왜가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을 통해 가야를 지배하였다라고 하는 친일 역사학자와 극우 일본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주장을 말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라는 역사책에 등장하는 단어로 ‘임나’는 가야의 또 다른 명칭이며 가야에 일본부라는 군사 관청을 설치해서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당시 왜는 한반도로부터 철기뿐만 아니라 예술과 사회문화의 다양한 것들을 공급받아 고대국가로 형성되었기에 역으로 우리를 지배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오히려 백제나 가야, 신라, 고구려 등에서 몰락한 귀족들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큐슈, 오사카, 나라 등지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그곳의 지배 세력이 되어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가야사론』이라는 책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거론되고 있는데 그 중 임나일본부는 외교관의 직책을 칭한다는 고려대학교 이명식교수의 이야기가 나에게는 가장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지구 위에서 본 우리 역사』란는 책에서는 가야에 관한 과거의 기록을 당시의 사람들이 별자리를 관측한 지점을 가지고 예측했을 때 가야의 활동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산둥반도, 요동지방, 왜에 이르며 이를 근거로 거대한 해상 대국이었을 가능성을 점치었는데 이 이야기들은 나의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였다. 변한의 변(弁)이라는 한자의 뜻이 ‘고깔’임을 들어 변한과 가야인들이 쓰던 고깔 모양의 모자와 연관 지어 설명하던 책의 내용은 인상적인 잔상으로 내게 남아 꿈이었는지 상상이었는지 스머프처럼 모자를 쓰고 서로 어울려 살던 고대 가야인들의 모습이 아른대며 떠올랐다.

 

우륵 박물관(사진 출처 : 우륵박물관 홈페이지)


우륵 박물관 전경

 

고령의 우륵박물관에 도착했다. 산자락 깊숙한 시골 동네에 고즈넉하게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령군 대가야읍의 서북쪽에 있는 쾌빈리(琴谷)에는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 12곡을 작곡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가야금 연주소리가 정정하게 울렸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정정골’이라 불려 오고 있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의 내력이 깊은 마을에 우륵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우륵의 동상 뒤로 자리 잡은 박물관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가야금의 역사 가실왕과 우륵의 이야기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순서대로 전시물들을 관람하면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가야금과 우륵에 대해 더욱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온 시골 풍경에서 과거 우륵이 그의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마을을 울렸다던 가야금의 ‘정~정~정~’ 울리는 소리가 나는 듯해 정정골 마을의 정취가 더 깊게 느껴진다.
이렇게 유서 깊은 곳에 박물관 뿐만아니라 ‘충북 영동의 국악기 체험촌’ 같은 국악을 연마하는 학생들을 위한 도량이 만들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악기인 가야금은 대가야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인 쟁을 참고하여 만든 악기로 소개되고 있다. 《삼국사기》 제32권 악지(樂志)에는 ‘가야금은 중국 악부의 쟁(箏)을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줄과 괘는 12달을 모방한 것이니.....현은 12줄이니 이는 사계절을 상징한 것이며, 괘의 높이는 3치이니 이는 삼재(三才, 천ㆍ지ㆍ인)를 상징한 것이다....가야금이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실왕이 중국의 쟁을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 한반도에는 현악기가 없었을까? 

 

신창동 현악기 복원
 

항아리의 신라 토우장식

 

우륵 박물관에서는 광주 신창동의 삼한시대의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10현의 고대 현악기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주 계림로 30호 고분에서 나온 항아리의 토우장식에도 양이두(羊耳頭)라고 해서 양의 귀 모양을 한 우리 가야금의 특징적인 모습을 한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전 월평동 출토 양이두(羊耳頭) 복원

 

대전 월평동에서 발견된 양이두 복제품도 전시되어 있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중국의 쟁을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말한 것이 무색할 만큼 그 이전에 존재 했던 우리 전통의 현악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금은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인 쟁을 참고하여 만든 악기라기보다는 기존부터 있던 우리 고유의 현악기를 가실왕이 중국의 쟁을 참고하여 발전시켰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또 하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던 시기에 중국은 당나라가 존재하기 이전이다. 가실왕의 생몰연대를 알기는 어려우나 우륵이 진흥왕(534~576)이 다스리던 신라로 망명한 것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비슷한 시기에 대가야를 통치하던 왕으로 보아야 할 것인바 이 시기는 수나라, 당나라는 이전의 남북조 시대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시기에는 중국에 대한 통칭으로 당나라로 표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 두 차례 거론된 가실왕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은 『삼국시대 음악사 연구』란 책에 담긴 내용이 의미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가실왕이 실존 인물임을 일본의 고대 성씨를 정리한 책인 《신창성씨록》에 따르면 성씨 ‘가시쯔(かしつ 道田連)는 임나국 가라(賀羅) 가실왕(賀室王)에서 나왔다‘라는 기록에서 찾고 있다. 필자는 기록을 통해 가실왕의 실존 여부에 대한 것보다 가야의 왕이 일본의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창성씨록》에는 815년 당시의 1,182개의 성씨의 계보가 실려 있는데 이 기록에는 백제계 104, 고구려계 41, 신라계 9, 가야계 9 성씨가 소개되어 있다. 이는 고대 한반도의 왕족과 귀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성씨를 이룰 만큼 크게 번성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륵이 만든 12곡의 의미 ; 12줄의 가야금, 가야 12 연맹의 결속을 다지다~

 

우륵은 가실왕의 명에 따라 12곡의 악곡을 지었다고 전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기록할 때 활용한 신라의 역사를 담은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르기면 가실왕(嘉實王)이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데 그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악사(樂師) 성열현(省熱縣; 지금의 제천)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曲)을 만들게 하였다고 전한다.

 

우륵이 만든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伎),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상기물(上奇物),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등 12곡이다. 이 중에서 보기, 사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10곡은 당시의 군현(郡懸) 이름과 같아서 해당 지방의 민요 성격을 띄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기와 사자기도 거론된 군현 이외 두 지역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륵이 악곡을 정리할 당시에는 가야가 10소국(보기, 사자기 두 곡을 제외할 시) 혹은 12소국의 연맹체였고 그 중심에 대가야가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이 시기 우륵이 12곡을 정리한 것이 가야 연맹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는데 그곳에서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는 느낌과 같지 않을까? 가야금의 제작 시기는 510년 혹은 520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시기 가야가 직면한 문제는 섬진강 유역 강성해진 백제의 공략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대가야의 가실왕은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가야 소국들의 대표들과 수시로 회의를 소집하여 대응책을 논의해야 했고 그 자리에서 우륵이 만든 각 연맹국의 음악을 연주하여 연맹의 결속을 강화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륵은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만들게 된 것이다.

 

우륵 신라로 망명(亡命)하다 ; 진흥왕과의 운명적 만남

 

가실왕의 총애를 받던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망명한다.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닌데 신라로 망명을 선택한 우륵,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잠시 우륵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가실왕은 백제의 공세를 막기 위해 12연맹의 결속과 외교를 통해 팽창하는 백제와 맞서고자 신라와의 공동 대응을 준비했을 것이다. 가야의 이러한 정책은 내부적으로 친신라파와 친백제파의 갈등을 불러왔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러던 가운데 친신라의 입장을 견지하던 우륵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을지, 가실왕은 이 여파를 피해 그의 일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성씨의 시조가 되었고 남겨진 우륵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신라로 망명한 것은 아닐지, 우륵의 입장에서 그의 망명이란 선택을 변명 해 본다.

 

신라로 망명한 우륵은 낭성(娘城 ; 지금의 충주)에서 진흥왕을 만나게 된다. 551년 진흥왕은 우륵을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 연주를 시켰는데 이 연주에 감명을 받은 왕은 신라의 관료인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에게 우륵을 스승으로 삼고 그의 음악을 전수 받도록 명한다. 계고는 우륵에게 가야금을 법지는 노래를 만덕은 춤을 배운다. 한편 신라의 신하들은 진흥왕에게 "가야를 망친 망국의 음악이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가야의 음악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언하지만, 진흥왕은 "가야왕이 음란해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드신 뜻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 법도를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고는 음악과 아무 상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가야의 음악을 신라의 궁중음악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낙이불류(樂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

 

《삼국사기》에 따르면 계고, 법지, 만덕은 우륵이 전수한 12곡을 음란한 음악이라며 5곡으로 줄여버렸다고 전한다. 우륵은 이에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제자들이 만든 음악을 들어보고 나서는 "즐거우나 지나치게 들떠 흐르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다"고 평하며 그들이 바꾼 음악을 인정하였다고 전한다. 이 음악이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채택되어 우리 음악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정(雅正)한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논평하는 말로 ‘낙이불류(樂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은 공자가 『시경』의 「관저(關雎)」편에 ‘관저의 시는 즐겁지만 음탕하지 않고,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지는 않는다.’는 논평에서 나온 말이다. 우륵은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의 단어를 하나씩 바꿔 조어하여 제자들의 음악을 평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장면의 평가를 조금 더 우륵의 입장에서 생각 해 보기로 하였다. 가야의 음악을 망한 나라의 음악이라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계고, 법지, 만덕은 왕의 명이라 우륵에게 음악을 배웠지만 그 음악을 고깝게 여기고 용렬하게도 그 음악을 자신들이 멋대로 편곡한다. 우륵은 화가 부글 부글 끓어 오르지만, 그는 그저 나라 잃은 악인(樂人)에 불과하다. 결국 그는 제자들의 음악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경(詩經)의 첫 번째 시인 관저(關雎)를 읽어보면 떠오르는 심상은 그리움이다. 우륵은 자신의 음악을 폄하 당하고 제자의 음악을 억지 칭찬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패망한 나라를 그리워하며 복잡한 심경을 담아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여덟 자를 떠 올리며 ‘낙이불류(樂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라 그들의 음악을 칭찬하지는 않았을지 생각해 본다.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의 왕의 총애를 받던 궁중악사 우륵은 망명한 이국(異國) 신라 땅 충주 탄금대에 올라 마음 깊은 애환(哀歡)을 달랬으리라......

 

관저(關雎)

關關雎鳩(관관저구) 在河之州(재하지주) 관관 우는 기러기는 물가에서 노네 
窈窕淑女(요조숙녀) 君子好逑(군자호구)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네
參差荇菜(참치행채) 左右流之(좌우류지) 올망졸망 노랑어리연꽃 풀을 이리저리 헤치고
窈窕淑女(요조숙녀) 寤寐求之(오매구지) 요조숙녀 자나 깨나 찾는데
求之不得(구지부득) 寤寐思服(오매사복)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해 자나깨나 생각하네 
悠哉悠哉(유재유재) 輾轉反側(전전반측) 끝없는 그리움에 이리저리 뒤척이네
參差荇菜(참치행채) 左右採之(좌우채지) 올망졸망 마름 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뜯고
窈窕淑女(요조숙녀) 琴瑟友之(금슬우지) 요조숙녀는 금슬을 벗 삼는데 
參差荇菜(참치행채) 左右芼之(좌우모지) 올망졸망 마름 풀을 이리저리 고르고요
窈窕淑女(요조숙녀) 鐘鼓樂之(종고락지) 요조숙녀는 종과 북을 울리며 논다네  

 

-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김성혜, 삼국시대 음악사 연구, 민속원, 2009
송혜진, 한국악기, 열화당, 2001
김정학 외, 가야사론,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서울출판서비스(주), 1993 
이영식,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기행, (주)지식산업사, 2018
이진아, 지구 위에서 본 우리 역사, 루아크, 2017
배선표, 일본 속 한민족의 흔적, 이지출판, 2019
나무위키 「신창성씨록」
월드코리아 2019.11.11.자 (https://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35649)

최은서 bionav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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