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20]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춤이 된 인생
4. 예혼의 불씨
춤을 추거나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이 전부로 보였던 선생께서도 알고 보니 즐겨한 소일거리가 있었다. 팔순에도 강에 나가 투망을 했고 바이크를 타고 시내를 종횡무진 달리던 선생. 소일거리를 접고 교습소로 돌아온 날은 그렇게도 못마땅해했던 발탈을 발에 끼고 단가短歌 ‘만고강산’을 흥얼거렸다. 좀체 기악에 손을 대지 않던 선생께선 유독 양금 소리를 즐겼다. 맑고 밝은 소리가 난다고.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까지 다녀왔는데 느닷없이 제자의 연구소에 나타나신 선생의 차림은 누런 지팡이를 빼고는 온통 흰색이었다. 흰 중절모, 아래위 모두 흰색 정장에 백구두. 태평무 사사를 마치고 네 장단을 뜨자 하여 찾아갔던 녹음실에는 귀동냥으로만 들었던 전설의 재인청 악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내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은 평균 연세 칠십은 넘을 어르신들의 표정이 어린이들처럼 맑고 밝았기 때문이었다.
단연코 압권은 선생이었다. “어서 와. 같이 놀자”라 말하는 듯한 아이의 표정! 나를 ‘앙금채야’라고 불렀던 이유를 알았다. ‘양’을 ‘앙’으로 발음하신 것은 전적으로 부실한 선생의 치아 때문이지만, 선생의 눈에 나는 맑고 밝았고 내 눈에는 선생의 그 표정이 맑고 밝았다. 그 표정을 내가 다시 보게 된 것은 무대에서였다. 밀양북춤의 명인 하보경 선생과 이동안 선생이 함께 무대에 서는 공연이었다.
두 분의 춤과 소리, 장단과 장단은 아무런 사전 약속도 없이 즉흥적으로 튀어올라 부딪치고 어울렸다. 두 분의 무대는 ‘노름마치’였다. 노름마치는 ‘놀다’와 ‘마치다’의 합성어로 놀이를 마친다는 광대들의 언어다. 일정한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결코 해낼 수 없다는 광대들이 펼치는 지고의 놀이, 두 분의 도합 나이는 무려 176세였다.
선생은 재인청 광대의 표상이다. 맷돌 세 개를 닳아 없애야만 장구채를 쥐게 했다는 재인청 예인들의 현란한 장단이 두 명인의 세포들을 뚫고나와 눈부신 빛으로 터지고 있다. 아무 거리낌도 없이 어디서나 신나게 터지는데, 어디선가 바이크 엔진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생전처럼 멋진 보헤미안 스타일의 선생께서 나타나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오늘도 이렇게, 나는 연구실의 문을 연다.
선생의 지팡이가 벽면에 걸린 액자를 가리킨다. ‘藝道舞極예도무극’. 그래. 예술의 길은 끝이 없다. 환한 얼굴의 우리 재인청전승보존회 회원들이 춤을 추고 있다. 춤사위가 반짝인다. 송글송글 맺힌 땀마저 반짝이는 춤! 재인청 예혼들이 천 년을 넘어 걸었던 빛의 항해를, 오늘도 우리는 거슬러 오른다.
우리 춤을 사랑하고 돕는 대단한 서예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찾아간 곳이 축구회관 4층에 자리한 서예가 열암 송정희 선생의 작업실이었다. “선생님, 제가 처음으로 개인 춤판을 여는데 선생님의 글이 필요합니다.” 하고 많은 시간을 기다리기만 했다.
‘예술의 길은 끝이 없다 – 예도무극’, 열암체를 구축한 송정희 선생의 글씨다. 이 글씨를 받아들자 깊은 상념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우리 춤판의 개인 공연은 자신의 이름을 따 ‘○○○의 춤’이라는 공연명을 유행처럼 쓰고 있었다. 끝이 없는 춤길, 그 길을 끝없이 걸으셨던 스승 이동안 춤꾼, 많은 생각이 겹치고 섞이다가 세상을 향해 내딛는 선언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이름은 ‘정주미 춤추러 간다’였다. 내친김에 다시 선생을 찾은 나는 공연명 글씨까지 받아 왔다. 우리 춤판에서 이 이름은 이름만으로도 꽤 오랫동안 화젯거리였으니 제법 성공을 거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