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상원사 동종 주악상(奏樂像) 공후와 생황

  • 등록 2025.02.18 18: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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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동정각(動靜閣)


상원사 동종 주악상(奏樂像) 공후와 생황

 

상원사 동종(銅鐘)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는 유서 깊은 사찰인 상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 선덕여왕 때 지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오랜 역사와 깊은 불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을이 깊어 가는 어느날 찾은 상원사는 이미 겨울 초입에 접어들어 나무는 벌거벗고 나뭇잎 하나 없이 스산한 한기가 느껴졌다.

 

이곳 상원사는 조선 세조와 관련된 설화로도 유명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온몸에 종기가 나고 피고름이 흐르는 병으로 고통받던 그는 치료를 위해 오대산을 찾았다. 그가 오대천에서 몸을 씻던 중 한 동자승이 나타나 등을 밀어주었고, 신기하게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세조는 이 동자를 문수보살의 화신이라 주장하며, 자신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는 신성한 의미를 덧붙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곳 상원사는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梵鐘)이 있는 곳이다. 성덕대왕 24년(725년)에 만들어져 경주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보다 46년 앞서 제작되었다. 동정각(動靜閣)이라 쓰인 종루(鍾樓)의 중앙에는 이 종의 진본이 투명한 밀폐공간에 보존되어 있으며, 오른편에는 복제품이, 왼편에는 종에 부조된 주악상(奏樂像)이 새겨진 비석이 놓여 있었다. 필자를 이곳까지 끌어들인 것이 바로 이 동종에 부조된 주악상이다.

 

불교에서 음악은 의식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대중의 신심을 하나로 모으며 수행과 교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악은 불교 의식의 성스러움을 강조하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열반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많은 불교 예술작품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주악상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상원사 동종에는 공후와 생황을 연주하는 주악상이 부조되어 있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상원사 동종의 주악상 공후와 생황

 

주악상의 왼편에 보이는 악기가 공후이다. 공후는 학창 시절 배운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나오는 악기이다. 공무도하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한민족이 남긴 문학작품이자 서정시이며, 노래로 평가된다. 중국의 문헌에 전하던 고조선의 노래 공무도하가는, 한나라 채옹(蔡邕, 133-192)의 『금조(琴操)』에 실린 것이 가장 오랜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이방(李昉)의 『태평어람(太平御覽)』, 곽무천(郭茂倩)의 『악부시집(樂府詩集)』 등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박지원의 『연암집』, 한치윤의 『해동역사』, 장지연의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소개되어 있다. 그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고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가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사람(白首狂夫)이 술병을 들고 말리는 아내를 뒤로하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슬피 울며 공후를 연주하고는 이내 물에 뛰어들어 같이 죽는다. 이를 하염없이 지켜본 곽리자고는 집에 돌아와 그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니, 그 아내도 슬퍼하며 공후를 가져다 공무도하가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공무도하가는 공후인(箜篌引)이라고도 불린다.

 

公無渡河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임은 기어이 물을 건너시네

墮河而死 물에 빠져 죽으니

當奈公何 가신 임 어이할꼬

 

고조선의 악기 공후(箜篌)

 

고조선의 악기 공후의 연주는 지금은 찾아 듣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 궁중음악에도 민간 음악에도 편성되어 연주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를 가슴설레게 했던 공후에 대한 기록은 도서관에서 발견한 『조선 음악사』라는 책이었다. 북한에서 출판한 책이었는데, 공후, 해금 등을 우리 민족이 만든 악기로 소개하고 있었다. 친일 역사관에 갇혀 우리 민족을 부족한 집단으로 여기는 수많은 논리에 저항하는 의식이 싹트다 보니, 반대로 우리 것이 최초이고, 제일이어야 한다는 편협한 강박이 만들어낸 설렘이었던 것 같다.

 

원시 공후의 모습 (출처 : 나무위키 ‘메소포타미아 음악’)

 

공후처럼 생긴 악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 시기인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인들이 만들어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사냥도구였던 활의 줄을 튕기면 소리가 난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고대인들이 쉽게 만들었을 법한 악기이다. 이 악기가 유럽으로 전해져 하프가 되었고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졌다. 고조선이 최초로 만든 악기가 아니라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인류가 500만년전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출발하여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가 문명을 이룩했음은 과학이 밝혀낸 사실이다. 동아시아 끝자락 요하(遼河)와 흑룡강(黑龍江 : 아무르강) 사이 만주벌판에 자리 잡은 고조선이 선진문화를 수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민족이 열등해서가 아니다. 세계로 전파된 이 현악기는 백제에서 일본으로도 전해진다.

 

남이섬에 전시 중인 정창원 복원 악기 공후

 

일본 역사서인 『일본후기(日本後紀)』, 『유취국사(類聚國史)』, 『유취삼대격(類聚三代格)』에 ‘809년 병인일 가가쿠료(雅樂寮)에서 정하기를 고려악사 4명은 횡적, 군후, 막목, 춤 등의 선생이고 백제악사 4명은 횡적, 공후, 막목, 춤 등의 선생이며, 신라악사 4명은 가야고와 춤 등의 선생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백제에서 일본으로 공후를 전해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헤이안(平安)시대인 10세기경에 편찬된 『왜명유치초(倭名類聚抄)』에는 ‘공후는 백제국금(百濟國琴)으로 일본 이름으로 구다라고토(久太良古止)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에서 전해 준 이 공후는 정창원(쇼쇼인)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으로 귀화한 중국 음악가 류홍쥔은 정창원 천평악부 음악감독이 되어 고악기를 복원하였고, 그가 복원한 악기들이 남이섬에 전시 중임을 일전에 칼럼 "시라기고토" 편에서 소개한 바 있다. 남이섬에 가면 그가 복원한 공후도 만날 수 있다.

 

와공후(臥箜篌) 논란

 

공후는 그 모양에 따라 소공후, 대공후, 수공후, 봉수공후, 와공후 등 다양한 이름으로 쓰였다. 조석연은 본인의 저서 『고대 악기 공후』에서 C자형을 봉수공후와 L자형을 수공후로 구분하였다.  공후는 하프류(Harp Family)의 악기로 보았으나, 와공후는 누울 와(臥)에서 예상되듯 줄을 평평한 공명통 위에 놓고 튕기는 거문고, 가야금과 같은 지터류(Zither Family)의 악기로 보았다. 다음은 와공후와 관련된 자료이다.

 

(왼쪽부터) 가욕관 북위 진묘탄 와공후(출처:국악원 국악사전), 한나라 청상악에 쓰인 와공후(출처:백제 그리고 음악), 난징 부자묘 보관 실물 와공후(출처:백제 그리고 음악)

 

국립국악원 홈페이지 국악사전에서 공후를 검색하면 ‘와공후를 지터류의 악기로 한국의 거문고를 뜻한다.’고 소개하며 중국 간쑤성박물관(甘肅省博物館)의 가욕관 북위 진묘탄 와공후를 첨부하여 설명한다. 이종구의 『아무도 말하지 않은 백제 그리고 음악』에도 한나라 청상악에 쓰인 와공후 그림, 난징의 공자를 기념하기 위한 부자묘(夫子廟)에 보관 중인 악기 중 맨 앞줄 오른 편에 위치한 와공후 사진을 첨부하였다. 일본학자들은 『일본후기』에 백제와 고구려의 악기로 소개되는 군후라는 악기를 와공후와 같은 악기라 하고 있으며, 저명한 국악 학자 고(故) 이혜구 박사도 거문고의 고대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출발한 하프류의 악기인 공후가 개량화되면서 거문고처럼 울림통을 눕혀서 현의 소리를 내는 지터류의 악기로 진화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와공후

 

그런데, 1937년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장이었던 함화진이 북경에서 소공후, 수공후, 와공후를 구입하여 국악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데 와공후가 C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어, 와공후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생황(笙簧)

 

상원사 동종의 오른쪽 주악상은 생황을 연주하고 있다. 생황은 크고 작은 17개의 죽관을 하나의 박통에 묶어 세워놓은 관악기로, 하나의 취구로 바람을 불어 넣으면 죽관 아래에 붙인 금속 황(簧)을 울리고 이것이 관대에 공명(共鳴)하여 소리가 난다. 각 관의 측면에 뚫린 작은 구멍을 막았을 때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생황은 다른 말로 생(笙)이라고도 했는데, 36개의 황을 가진 것은 우(竽), 13개의 황을 가진 것을 화(和)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생황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 오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연향악과 제례악에 쓰일 악기로 유입된 기록도 있고, 조선시대에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에서 중국으로 악사를 파견하여 제작 기술을 전수하게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기록도 전한다.

 

                                                 김홍도 포의풍류도(布依風流圖)                       신윤복의 연못가의 연인

 

조선 후기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에 생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풍류방에서 선비들이 즐겨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여기(女妓)들 또한 애용한 악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황은 제조 기술이 까다로워서 국내 제작이 힘들어 수입에 의존했기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악기라는 점이 더욱 특별한 가치를 지녔을지 모를 일이다.

 

조선 사회는 18세에 접어들어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경제 주체인 중인 계층이 부상한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학, 예술, 학문적 활동을 활발히 교류하는 풍류방(風流房)이라는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 풍류방은 조선시대 상류층인 문인들과 가곡(歌曲)을 잘 부르는 가객(歌客)이나 거문고, 가야금, 해금 등에 능통한 율객(律客) 등이 서로 모여 예술 활동을 교류하며 고상한 여유와 미적 즐거움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생소병주 수룡음 (https://www.youtube.com/watch?v=XbLSdTCk9HY)

 

이들이 풍류방에서 즐긴 많은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 가운데, 시조를 우아하게 노래한 가곡과 그를 반주한 연주는 많은 파생곡을 낳았다. 가곡 계면조의 <평롱> · <계락> · <편수대엽>의 반주곡을 관악기로만 변주(變奏)한 음악을 〈수룡음(水龍吟)〉이라고 하는데, 생황과 단소의 이중주 연주가 유명하다. 생소병주(笙簫竝奏) 수룡음(水龍吟)을 오늘 칼럼의 감상곡으로 추천한다. 전통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인 생황의 아름다운 음색과 단소 가락의 조화로운 연주를 감상해 보기 바란다. 수룡음(水龍吟)이라는 곡명의 의미를 생각하며 물속의 용이 어떻게 읊조리는가 생각하며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참고자료>

(주)천재교육, 『해법문학 고전시가』, 천재교육, 2019.

문성렵, 『조선음악사(고대~고려편)』, 사회과학출판사, 2010.

조석연, 『고대악기 공후』, 민속원, 2008.

이종구, 『아무도 말하지 않은 백제 그리고 음악』, 주류성, 2016.

국립국악원, 『한국의 악기 1』, 돌베개, 2014.

나무위키 ‘메소포타미아 음악’ (메소포타미아 음악)

국립국악원 국악사전 ‘공후’(https://www.gugak.go.kr/ency/topic/view/1855)

 

 

 

최은서 bionav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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