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누나들의 밥 한 끼가 나를 살렸다” – 『정돌이』, 한 소년이 써내려간 80년대 연대의 기록
1987년 군부독재 시절, 가정폭력 속에서 14살 소년은 고향 경기도 연천을 떠났다. 몸 하나 의지할 곳 없이 서울 청량리 역전을 헤매던 그는, 수배 중인 고려대학교 운동권 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정돌이’는 이름을 얻었고, 정경대 학생회실에서 형·누나들과 밥을 먹으며 ‘가족’을 만났다. 그리고 시위대의 북소리 앞에 선 그는 훗날 장구 명인이 된다. 『정돌이』(김미경 지음, 어나더북스 刊)는 한 소년의 삶이 어떻게 시대와 공동체를 통해 회복되어갔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밥 한 끼, 그리고 사람들”
책은 단지 한 사람의 성장 서사가 아니다. 고대 농악대의 일원이 되어 풍물과 운동을 함께 했던 정돌이의 삶은, 1980년대 대학가를 살아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정돌이는 말한다. “저와 같은 시절이나 그 이전이나, 힘들게 살아왔던 모든 분들에게 그 시절의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매일같이 들었던 말은 “정돌아, 밥은 먹었니?”였고, 때로는 하루 여섯 끼를 먹기도 했다. 그 따뜻한 밥상이 없었다면, 지금의 정돌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위해 밥을 차려주던 이들을 기억하며, 오늘도 제자들에게 밥을 지어준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들었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죠. 그래도 제 장구치는 삶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작은 밀알이라도 됐으면 좋겠어요.”
“몸으로 배우던 시절, 장구가 길이 되었다”
정돌이는 장구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어릴 적, 몸으로 노는 것밖에 없던 시절에 장구를 접했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사람들 속에서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제 장구 소리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들을 보며 ‘내가 이걸 선택하길 참 잘했구나’ 싶었습니다.” 정돌이에게 장구는 단지 악기가 아니라, 자기 삶을 증명하는 언어이자 시대를 두드리는 북소리였다.
“386은 정치인이 아니라 삶을 지켜낸 사람들이었다”
책과 함께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정돌이>(김대현 감독)는 그가 살아온 여정을 따라가며, 386세대를 향한 오해와 비판 속에 가려진 ‘또 다른 진실’을 꺼낸다. “386이라는 단어는 정치인 몇 명으로 대체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품고 있다”고 말한 김대현 감독은, 정돌이를 통해 그 시대의 빛과 그늘을 함께 보여주고자 했다.
김대현 감독과 송귀철(정돌이) 씨
실제로 정돌이는 어떠한 정치 세력과도 선을 긋고, 오늘도 제자들에게 밥을 해주며 장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양심을 팔지 않고, 맑은 기운으로 살아온 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밥에서 밥으로, 삶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연대의 기록”
『정돌이』는 누군가의 과거가 아닌,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는가를 묻는 책이다. 영화 속 한 대사처럼,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정돌이는 말했다. “조금 고생은 했지만, 앞으로도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자고 제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이면서도,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시대의 기록이다. 고대 민주광장을 누비던 그 날의 장구 소리는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에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