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무형유산 발굴터, 화랭이의 경기도당굿

  • 등록 2025.04.22 11: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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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당굿 군웅노정기 연희장면

 

무형유산 발굴터, 화랭이의 경기도당굿

 

필자는 경기도당굿이란 단어를 태평무 반주 장단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접했다. 좌·우도 농악, 사물놀이 가락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함께 타악을 공부하던 도반들의 학습 영역이 장단으로 확장되면서부터이다.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았던 터벌림, 견마치, 올림채, 도살풀이 등 장단은 이름만큼이나 현란하고 다채로운 가락으로 짜여 있어 학습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예사롭지 않은 가락의 원천을 직접 확인하고자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평동 벌말도당굿 현장을 찾았다. 기대가 커서였을까 도착한 도당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그간 찾았던 안동 하회별신굿, 은산 별신당, 제주 칠머리당의 굿당과는 완연히 달랐다. 굿을 펼치기에도 좁은 현장에 구경꾼이 있을 곳은 골목의 길 언저리뿐이었다. 그나마 도당 뒷마당에서 부녀회에서 준비한 음식으로 잔칫집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니 마을굿 현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도당(都堂)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상상의 초월적 존재를 통해 해석하곤 하였다. 천재지변, 질병, 가뭄, 홍수 등은 당시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신화가 생겨났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종교도 형성된다. 그러나 그 종교가 시대에 맞는 합리성을 갖추지 못할 경우, 미신이나 이단으로 간주돼 도태되기도 하였다.

 

우리 전통사회의 마을 수호신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를 당산나무, 서낭나무라 부르며 모시기도 하였고, 돌무더기와 돌탑을 쌓아 서낭 혹은 성황탑으로 칭하여 모시기도 했다. 사당을 세워 위패나 수호신의 상징 그림을 모시는 경우에는 ‘서낭당’ 또는 ‘성황당’, ‘당집’, ‘별신당’ 등으로 불렀으며, 경기도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이를 ‘도당’이라 불렀다.

 

경기도당굿은 한강 이남의 부천, 인천, 수원, 오산, 안성과 해안지역에서 주도해 온 마을굿으로 한국전쟁이전에는 활발하게 전승되었으나 60년대 새마을운동이 벌인 미신타파의 대상이 되어 급격하게 소멸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문화재관리국 주도로 전국 단위의 민속예술 조사와 무형유산 발굴 작업이 본격화되었고,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통해 ‘무형문화재’ 보호 체계가 정비되면서 복원작업이 활발히 펼쳐졌다.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제도’와 ‘보유자(인간문화재)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다행히 그 기능을 보유하고 있던 이용우, 조한춘, 서간난에 의해 복원되었다.

 

사실, 우리 전통의 축제인 마을굿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와 공동체가 어우러지는 신명난 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안녕을 비는 의례는 전통 종교인 유교, 불교, 무속의 기원 방식 중에서 선택되었으며, 그래도 무속이 서민의 삶에 깊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속적인 의식을 갖는 마을굿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마을굿을 단지 종교적 의미로만 제한해 해석하거나, 그로 인해 협소하게 ‘미신’으로 치부하기보다는, 문화 현상으로서의 축제적 가치에 주목하며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화랭이의 탁월한 예술

 

무속은 한강을 기준으로, 이북은 신내림을 받는 강신무권, 이남은 무업을 세습하는 세습무권으로 구분된다. 강신무는 공수와 점을 통해 신의 뜻을 전하는 역할이 중심인 반면, 세습무는 신을 모시지 않고, 굿의 절차에 따라 의식을 집행하는 예능 중심의 무당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한강 이남의 경기도당굿은 세습무권에 속하지만, 한강과 접한 지리적 특성상 강신무와 세습무가 혼재된 특징을 보인다. 굿의 주요 역할은 남성 세습무가 담당한다. 이들은 부모나 친족으로부터 기예를 대물림받아, 높은 난이도의 예능을 오랜 기간 숙련 과정을 거쳐 익힌다. 탁월한 예술성 덕분에, 이들은 자신의 지역을 넘어 타 지역 마을굿에도 자주 초청되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노래, 춤, 악기 연주뿐 아니라 재담, 땅재주, 줄타기까지 두루 갖춘 예인이었다.

 


1910~2000년대 화랭이의 활동지역(출처 경기도당굿 화랭이 연희의 전통예술사적 의의와 가치)

 

한편, 경기도당굿에서 여성 무속인은 ‘미지’라 불렸는데, 이는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이면서도, 혈연에 따라 무업을 계승한 세습무의 성격을 함께 지닌 존재였다. 이와 함께, 미지와 혼인한 남성이나 집안의 가업으로 무업을 이어받은 남성 무속인은 ‘화랭이’라 불렸다.

 

그런데 ‘화랭이’라는 명칭의 근원은 신라의 화랑(花郞)에서 찾기도 한다. 신라시대 화랑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도와 무예를 수련하던 미소년 집단이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속 의례를 수행하는 남자 무당들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수식하는 명칭으로는 아주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남자 무당을 박사(博士)라고 부른 것도 비슷한 연유일 것이다. 이 밖에 산신의 내력을 세습한 사람이란 의미로 ‘산’ 혹은 ‘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화랭이’라는 호칭에 거부감을 표현한 이들의 증언도 눈에 띈다. 개화기에는 천민 출신이 아닌 악사들도 굿판에서 활동했기에, 굳이 과거의 신분을 드러내며 차별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화랭이의 춤과 장단, 연주의 탁월한 예술성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었으며, 활동에 많은 영감을 주어 태평무, 도살풀이춤, 진쇠춤, 터벌림춤 등 한국 전통무용의 창작과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경기도당굿 무악(巫樂)에 새로이 창작된 우리 춤과 경기시나위

 

필자를 경기도당굿의 무대로 이끈 태평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태평무(太平舞)는 한국 전통무용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한국 전통춤의 거장으로 불리는 무용가 한성준(1874~1941)이 경기 지역의 무속 춤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춤은 왕과 왕비의 복장을 한 무용수가 나라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진쇠, 낙궁, 터벌림, 도살풀이 등 다양한 경기 무악의 장단 위에 화려한 궁중 복식과 섬세한 발디딤새, 절제된 춤사위가 어우러진다. 현재는 왕비의 춤만 전승되고 있다. 태평무는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영숙류 태평무<2024 본(本) https://link24.kr/G3D3u8x>


경기도 안성 출신의 전통무용가로, 세습무가(世襲巫家)에서 태어나 무속과 민속춤을 예술적으로 발전시킨 김숙자(1927~1991)는 경기도당굿의 마지막 절차인 ‘뒷전’에서 청신(請神), 오신(娛神), 영신(迎神)의 과정을 마무리하며 추는 도살풀이춤을 무대화하였다. 살풀이는 인간에게 붙은 액(厄)이나 살(煞)을 제거하는 의식을 말하는데 도살풀이는 도당 살풀이를 줄인 말이다. 이 예술적 아름다움도 국가에서 인정하여 국가 무형유산이 되었다.

 

게다가 김숙자는 경기도당굿의 부정굿, 군웅굿, 터벌림 등의 절차에서 유래한 무속 의식을 공연예술로 재구성한 작품인 '부정놀이춤'을 1983년에 무대화하였다. 부채와 방울, 홍철릭 소맷자락 등을 활용하여 신을 모시고 축원하는 의미를 담는다. 이 밖에도 경기도당굿의 제석춤, 터벌림춤, 손굿의 깨낌춤, 군웅굿의 올림채춤 등을 무대화하였다. 2018년 경기도에서는 이 춤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경기도당굿 시나위 춤이란 이름으로 경기도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김숙자류 도살풀이춤<2022 GIDF 김운선 https://link24.kr/6tbettJ>


진쇠춤은 왕이 연회석상에서 각 고을의 원님들을 불러 꽹과리를 들고 춤을 추게 했다는 설이 전하는 춤으로 이동안이 무대에 소개했다. 14세에 화성 재인청의 총책임자인 도대방이 될 정도로 뛰어난 예인이었던 이동안(1906~1995)의 전승을 통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당굿의 빠르고 역동적인 '진쇠' 장단에 맞춰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춤사위를 자랑한다.

 


진쇠춤<이동안의 전형을 찾아 춤추다 https://link24.kr/EI3U6Yf>


무속의례에서 신을 청하고, 신과 교감하고, 신을 보내는 과정에서 무당의 노래(무가)와 춤(무무)에 즉흥적으로 맞추는 기악 합주를 시나위라고 한다. 신과 함께 하는 신(神)을 아우르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나위’라고 하면 전라도권의 남도 시나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경기시나위는 도살풀이(섭채), 도살풀이모리, 발버드레, 가래조, 삼공잡이 등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장단과 선율 구조, 시김새를 지니며 남도 시나위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젊은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화려한 경기시나위 가락에 빠져 보자.

 


경기시나위<경기도도당굿 장단에 의한 경기시나위 https://link24.kr/3j81d3o>

 

이렇듯 뛰어난 음악적 가치를 지닌 경기도당굿은 다양한 춤과 음악으로 창작되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비록 협소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행사였지만, 팜플렛에 담긴 인물들 면면이 익숙하다. KBS 국악한마당, 국악원 등에서 연주하는 전문가로서 나름 명성 있는 연주자들이 전수생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어, 그 음악적 깊이와 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연주자들이 함께하는 축제임에도 국가와 지자체의 관심이 미미해 마치 버려진 듯한 골목 한켠에서 행사가 치러지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제석신과 삼신할미 이야기가 담긴 당금애기 신화

 

오늘의 굿은 마을 곳곳 다니면서 모든 부정을 막는 지신밟기 같은 돌돌이 의식에서 시작된다. 당집에 도당신을 모시고 굿의 시작을 알리는 장문잡기, 잡귀를 쫓는 부정청배, 팔도명산의 산신을 청하는 도당모시기, 귀신을 쫓는 의미를 지닌 붉은 팥이 올려진 고사떡이라고도 불리는 시루떡을 놓고 마을과 가정의 평안을 비는 시루굿, 그리고 제석신을 청하는 제석굿으로 이어진다. 제석굿에는 ‘당금애기’라는 팔도를 대표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부처님께 치성을 드려 어렵게 얻은 ‘당금애기’는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외출한 사이 한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온다. 당금애기는 쌀을 가득 퍼담아 바랑에 넣어 주었는데, 바랑에 난 구멍으로 쌀이 바닥에 쏟아지고 만다. 당금애기가 바닥에 떨어진 쌀을 손으로 쓸어 담자 부처님께 올릴 쌀을 정성껏 다루어야 한다고 스님이 나무라고 이 말에 당금애기는 젓가락으로 정성을 들여 쌀을 담는다. 어느덧 날은 저물고 스님은 하룻밤 머물기를 청하고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일 후 임신을 한 당금애기는 처녀가 임신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다. 당금애기는 아들 셋을 낳고, 무럭무럭 자란 삼 형제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 여정에서 죽은 소를 살리기, 종이 신을 신고 강을 건너기 같은 신통력 시험을 거쳐 마침내 부자지간임을 증명한다. 이후 아들 셋은 제석신인 삼불제석이 되고 당금애기는 아기를 점지하고 복과 명을 주는 ‘삼신할미’가 된다.


군웅굿에 담긴 청나라 사신의 여정과 동학 농민군의 역사

 

자손들의 명(命)과 복(福)을 기원하는 제석굿을 마치고 손님 노정기로 이어진다. 여기서 ‘손님’은 손님마마를 뜻하는데, 이는 천연두와 같은 돌림병을 일으키는 마마신으로, 굿을 통해 그 노여움을 달래고 역병을 막고자 한다. 이어서 굿판을 넓히며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는 ‘터벌림’이 진행된다. 그 뒤를 잇는 도살풀이는 긴 수건을 활용해 공간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춤사위가 인상적이며, 굿판의 예술성과 상징성을 극대화한다. 이어 활을 들고 춤을 추며 장군신을 모시는 ‘군웅굿’이 벌어진다. 군웅굿은 전쟁에서 죽은 조상들의 한을 풀고, 그 영혼을 달래며 위무하는 의미를 지닌다.

 

제석굿을 통해 자손들의 명과 복을 빌고, 손님 노정기로 이어진다. 이 굿에서 손님은 손님마마로 천연두와 같은 돌림병을 일으키는 마마신이 노여움을 가라앉혀 역병을 막는 굿이다. 이어 굿판을 넓히며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며 지신을 밟는 터벌림, 긴 수건으로 아름답게 공간을 그려나가는 춤사위가 일품인 도살풀이, 그리고 활을 들고 춤을 추며 일종의 장군신인 군웅을 모시는 군웅굿을 벌인다. 군웅굿에는 전쟁에서 죽은 조상들의 한을 풀고 달래고 위안하는 의미를 지닌다.

 

군웅굿에서는 군웅노정기라고 하여 화랭이가 서서 판소리처럼 노래하는 대목이 있다. 굿판에서 이처럼 육자배기토리의 판소리처럼 노래하는 것을 판패개제(制) 소리라고 한다. 노래의 내용은 군웅마누라가 압록강과 임진강을 차례로 건너 평양을 지나 개성, 그리고 다시 임진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여정은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따르던 행로와 유사한 점이 있으며, 이러한 공통점은 아마도 과거 화랭이들이 산대희에 동원되어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군웅노정기의 내용에는 대금(저), 바라, 회적, 나팔, 북(고), 쌍금고 등 다양한 악기를 앞세우고, 청기, 적기, 백기, 흑기, 황기의 오방기를 든 무리가 등장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또한 ‘일등패’의 오른편에는 긴 창을 든 말 탄 병사 57명이 나타나는 등, 구체적인 군대 진형을 연상케 하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는 1894년 우금치 전투 당시 동학군의 행렬을 기록한 내용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했던 화랭이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군웅노정기의 노래 속에 반영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번듯하게 대접받는 경기도당굿을 기대하며......

 

군웅굿이 끝나면 곧이어 신장대감굿으로 넘어간다. 이때 미지는 오늘 굿을 준비한 부녀회원을 불러내 오방기를 뽑게 하여 재수를 점치고, 공수를 내려주며 마당을 떠들썩하고 흥겹게 이끈다. 이어서 자연스레 구경꾼들과 하나 되는 신명나는 무감의 장으로 이어지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굿은 이제 마무리 뒷전을 향해 달려간다. 서낭대가 내려지고, 화랭이는 재담과 판패개제 소리로 갖가지 흥을 돋운다. 이때 ‘정업’이라 불리는 거대한 생식기를 단 허수아비가 등장하는데 이를 가지고 노는 장면은 익살스러움과 해학이 가득하여 매우 인상적이다. 이 뒷전을 끝으로 굿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경기도당굿 뒷전의 정업


예술적으로 탁월한 장단과 가락, 아름다운 춤이 어우러진 오늘의 축제 마당은 막을 내렸다. 오늘 확인한 경기도당굿 화랭이의 예술은 다양한 전통음악 장르에 영향을 미쳤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그 깊이 있는 예술을 배우고자 전수생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예술이 펼쳐지는 현장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하다. 아니, 방치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원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아직도 시골스러운 당산나무와 그 곁에 자리한 소담스러운 도당집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터가 정식 전통예술 공연장으로 자리 잡고, 지역 주민들이 그 공간과 함께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예술가들의 기예가 마음껏 펼쳐지는 마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더욱 크다.
이곳이 단지 굿판이 아니라, 무형유산의 발굴터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살아 있는 전통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며, 경기도당굿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참고자료>
황루시·이보형, 『경기도 도당굿』, 열화당, 1983.
목진호, 『경기 도당굿 ’화랭이’ 연희의 전통예술사적 의의와 가치』, 민속원, 2017.
원명숙, 「경기도당굿 춤장단이 한국전통무용에끼친 영향에 관한 연구」, 용인대학교 석사학위, 2002.
변진섭, 「경기도 남부굿과 민속춤의 상관성 연구」, 한국무속학회 26권, 2013, 159~187쪽.
이미란, 「김숙자의 삶을 통해 본 도살풀이춤에 내재한 의미 연구」, 체육사학회지 23권 1호, 2018, 55~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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