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고량진미(膏粱珍味)
기름진 고기에다
진귀한 맛난 음식
세상에 보기 드문
고급스런 귀한 음식
명예(名譽)가
갖추어 있다면
고량진미 바랄까
<語義> : 기름진 고기와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
(고급스럽고 맛있는 음식. 매우 훌륭한 요리)
<出典> : ① 孟子(맹자) 告者(고자) 上篇(상편) - “膏粱(고량)”
孟子(맹자)가 말하기를,
“귀하게 되려고 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같다. 사람마다 자기가 고귀한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남이 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다. 趙孟(조맹)이 귀하게 만들어준 것은, 조맹이 그것을 천하게 만들 수도 있다. 詩經(시경)에서 ‘술에 흠씬 취하였고, 德(덕)에 이미 배불렀네.’라고 하였다. 이것은 仁義(인의)의 德(덕)에 배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즐기는 기름진 고기나 좋은 곡식을 바라지 않게 되고, 좋은 평판이나 널리 알려지는 명예가 자기 자신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문양과 수놓은 옷을 바라지 않게 된다.”
<原文> 孟子曰(맹자왈) “欲貴子(욕귀자) 人之同心也(인지동심야) 人人有貴於己者(인인유귀어기자) 弗思耳(불사이) 人之所貴者(인지소유자) 非良貴也(비량귀야) 趙孟之所貴(조맹지소귀) 趙孟能賤之(조맹지천지) 詩云(시운) ‘旣醉以酒(기취이주) 旣飽以德(기포이덕)’ 言飽乎仁義也(언포호인의야) 所以不願人之膏粱之味也(소이불원인지고량지미야) 令聞廣譽施於身(영문광예시어신) 所以不願人之文繡也(소이불원인지문수야)”
※ 趙孟(조맹, 조무휼 또는 조양자. B.C.475 ~ 425) : 晉(진)나라의 大夫(대부)로 六卿(육경) 중의 한 사람. 진의 최대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知伯(지백)의 攻擊(공격)을 百姓(백성)의 團合(단합)된 힘으로 막아내고, 韓(한) ‧ 魏(위)와 聯合軍(연합군)을 形成(형성)하여 지백을 무찌르고 趙(조)나라를 세웠다.
<出典> ② 司馬光(사마광)의 枇杷洲詩(비파주시) - “珍味(진미)”
“周(주)나라 관리는 진귀한 음식[珍味(진미)]을 거두고, 漢(한)나라 정원엔 꽃들이 맺혔구나.”
위의 두 고사에서 즉 ‘膏粱(고량)’은 ‘맹자 고자 상편’, ‘珍味(진미)’는 ‘사마광의 비파주시’에서 나온 말로, 이 둘이 합하여 ‘膏粱珍味(고량진미)’라는 故事成語(고사성어)가 생기게 되었다.
※ 司馬光(사마광, 1019 ~ 1086) : 중국 北宋(북송) 때의 학자, 정치가, 시인. 유교 경전을 공부했으며, 과거에 합격한 후 고속 승진했다. 1069년~1085년에는 개혁가 王安石(왕안석)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는 당파인 舊法黨(구법당)을 이끌었다. 유교 경전 해석에 보수적 입장을 취했던 그는 단호한 조치보다는 도덕적인 지도력을 통해, 그리고 엄청난 변화보다는 기존 기구의 활성화를 통해 훌륭한 정부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죽기 직전에 왕안석 일파의 新法黨(신법당)을 조정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자신은 門下侍郞(문하시랑), 즉 재상에 임명되어 왕안석이 시행한 개혁정책을 대부분 폐지했다. 사마광은 편찬국 관리들과 함께 B.C.403~A.D.995년의 중국 역사를 다룬 資治通鑑(자치통감)을 편찬했는데, 이 책은 공자가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는 春秋(춘추)에 필적하는 편년체 역사서로,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서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유교적 도덕론의 관점에서 인물 ‧ 기구를 비평했다. 그의 관심은 대부분 정치적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祭禮(제례) ‧ 音樂(음악) ‧ 天文(천문) ‧ 地理(지리) ‧ 經濟(경제)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도 다루었다.
※ 司馬光(사마광)에 대한 일화
① 항아리를 깬 사마광
사마광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가, 한 아이가 커다란 항아리에 빠지게 되었다. 그 큰 항아리 속에는 물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모든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 때 사마광이 돌을 들어, 그 항아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항아리가 깨지면서 물이 와르르 쏟아졌고, 물에 빠졌던 아이는 살아날 수 있었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어른들이 사마광을 크게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기특한지고! 장차 크게 될 인물이로다.”
그는 후에 큰 학자가 되고 재상이 되었다.
② 자식에게 검소함을 가르친 사마광
사마광은 일생 동안 많은 감동적인 일화들을 남겼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사마광은 일을 하거나 가정에서 생활할 때, 특히 자식들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몸을 삼가하며 근검절약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자치통감이란 巨作(거작)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范祖禹(범조우), 劉恕(유서), 劉儉(유검) 등을 조수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인 司馬康(사마강)도 작업에 참여시켰다. 한번은 아들이 책을 읽을 때, 손톱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을 본 사마광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이 책을 애호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알려주었다.
역사 서적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거울을 만들기 위해 그는 15년 동안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늘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한번은 그의 친한 벗이 찾아와
“일을 좀 줄이라”고 충고하자,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先王(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려 있다 하셨네.”
그는 이렇게 생사에 초연한 자세로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했으며, 그의 이런 기풍은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상생활 방면에서도 사마광은 근검하고 소박했다. 그는 아들인 司馬康(사마강)에게 근검절약에 대해 훈계한 문장인 ‘訓儉示康(훈검시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는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대로 청렴하고 결백함을 이어왔다. 나는 천성적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금은 장식이 달린 화려한 옷을 주면 부끄럽게 여겨 입지 않았다. 20세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축하잔치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서도 홀로 꽃을 꽂지 않았다. 이때 한 친구가 ‘꽃을 꽂는 것은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한 송이를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