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보름간의 야자타임, 안동 하회별신굿

  • 등록 2025.02.13 14: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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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현장

 

보름간의 야자타임, 안동 하회별신굿


안동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서, 마치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전통 한옥들이 그대로 남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대의 편리함이 주는 유혹 속에서도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여전히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의 삶의 가치를 지켜가고 있는 살아있는 민속촌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도착한 안동하회마을은 나지막한 산과 낙동강이 감싸 안은 은혜를 받은 듯한 포근한 터로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필자처럼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 해도 이곳이야말로 정말 명당이라 부를 만한 곳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번듯한 한옥들이 즐비한 모습은 이순신을 임금께 천거하여 왜란을 막아내도록 한 혜안(慧眼)을 지녔던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유서 깊은 집안의 터전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안동 하회마을 구글 위성지도


필자가 도착한 안동 하회마을은 주차장은 넓찍함에도 불구하고 차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에 쫓겨 향한 곳은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교육관. 이미 인파로 북적이는 마당에서 풍물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얀 천막이 돔처럼 지붕을 덮고 있어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잘 정비된 마당놀이 극장이었다. 동절기에는 주말에만, 그 외 기간에는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할 수 있다.

 

800년 세월을 견뎌온 한국인의 얼굴 하회탈

 

보통 다른 지역의 탈은 놀이가 끝난 후 부정을 막는 의미로 태우지만, 안동의 하회탈은 12세기 고려 중엽에 제작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 특별하다. 이 하회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 · 관리되어 오다가, 2018년부터는 안동시립민속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하회탈의 존재는 하회별신굿이 무려 8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하회탈의 제작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하회별신굿 이매탈(안동시립민속박물관)

 

고려 중엽, 마을에 우환과 재앙이 끊이지 않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사는 허도령은 꿈속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탈을 만들어 춤을 추어야 한다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는다. 산신령은 탈을 만드는 동안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허도령은 동네 어귀 으슥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도령을 사모하던 여인이 그가 탈 만드는 모습을 몰래 엿보았다. 그 순간 산신령의 경고처럼 허도령은 마지막 한 점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만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손에서 마무리되지 못해 턱이 없는 그 탈이 바로 언청이, 바보, 절름발이 캐릭터인 ‘이매’이다. 이렇게 허도령의 목숨과 바꿔 제작된 탈이니 어찌 마을 사람들이 부정을 막는다며 태워 없앨을 수 있었겠는가?

 

허도령을 사랑한 여인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마을 사람들은 화산 중턱에 서낭당을 짓고 그녀를 성황신으로 모셔 넋을 기렸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하회별신굿의 기원이다. 이후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허도령이 만든 탈로 탈놀이를 하며 마을굿을 이어 왔다.

 

하회 세계탈박물관 홈페이지


하회별신굿에서 사용된 탈은 원래 인물 탈 12개와 ‘주지’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 암수 한 쌍을 포함해 총 13종 14개였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각시, 양반, 선비, 부네, 초랭이, 할미, 백정, 중, 이매 등 9개의 인물 탈과 주지탈 2개뿐이다. 총각, 별채, 떡다리 탈 3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가져갔다고만 주민들의 입을 통해 구전된다.

 

하회탈 중 양반, 선비, 백정, 중 탈은 턱이 분리된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연희자가 말을 할 때마다 턱이 사실적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기법을 활용한 탈은 세계적으로도 드물어, 그 예술적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특히, 고개를 들면 입을 크게 벌려 웃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이면 입을 다문 화난 얼굴로 변하는 특징을 가진다. 얼굴의 좌우가 비대칭이며, 주름, 표정, 눈썹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생동감을 더한다. 또한, 무겁게 제작된 각시탈은 연희자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되어, 수줍어하는 처녀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한국인의 얼굴’이라 불리는 하회탈은 단순한 가면이 아니라,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예술품으로 세계적인 걸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마을의 마을굿은 매년 정월 15일과 4월 8일에 지내는데, 5년 혹은 10년에 한 번 정도는 마을의 큰 우환을 막기 위해 신의 계시를 받아 비정기적인 큰 규모의 별신굿을 모신다. 별신이라 하면 보통 마을신을 말하는데 마을신에 제사를 지내는 굿을 별신굿이라 한다.

 

음력 12월 15일에 신의 뜻을 물어 별신굿이 정해지면 29일 마을 대표들이 지금은 없어진 동사(洞舍)에 모여 제주인 ‘산주’의 주관 하에 탈놀이꾼, 무동, 회계를 맡을 사람 등을 선정하고 섣달그믐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지신밟기과 탈놀이를 하며 별신굿이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일반적인 마을굿 의식과 마찬가지로 신을 맞이하는 영신(迎神) 의식, 신을 즐겁게 하는 오신(娛神) 의식, 신을 보내는 송신(送神)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식은 산주의 주관 하에 행해지는데, 산주는 꿈에 신의 계시를 받은 자로 선발되었다. 산주가 소나무를 선정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그 소나무를 베어 서낭대와 내림대를 만들었다. 광대들은 의상과 준비물을 갖추고 동사에 모여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며 목욕재계하고 합숙을 하며 부정한 음식을 금하며 제의 의식의 신령한 기운을 지키려 정성을 다했다.

 

강신(降神) 의식에서는 섣달그믐날 화산 중턱 서낭당에서 산주가 방울이 달린 서낭대를 잡고 제문을 읊으며 신내림을 받는데 이를 대내림이라 한다. 이어 서낭대를 앞세우고 놀이패가 마을로 내려올 때, 서낭신을 상징하는 각시광대가 어깨 위에 올라타는 무동마당이 펼쳐진다. 동사로 내려온 놀이패는 서낭신을 모시고 집집마다 돌며 풍물을 울리고 탈놀이를 하며, 악귀를 쫓고 복을 기원하는 지신밟기를 정월 14일까지 이어나간다.

각 집을 돌며 마당에서 벌이는 지신밟기와 탈놀이는 서낭신을 즐겁게 하는 오신(娛神) 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하회별신굿의 탈놀이는 주지마당부터 시작된다. 상상의 존재인 주지 한 쌍이 서로 마주 보고 싸우거나 짝짓기 흉내를 내며, 탈판을 정화하고 다산을 기원한다. 이후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 · 선비마당으로 이어지며,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흥겨운 장면이 펼쳐진다.

 

보름간의 지신밟기는 산주의 집에서 시작하여 삼신당, 충효당, 남촌댁, 북촌댁, 대갓집 등을 돌며 성주굿, 탈놀이 등을 놀았다. 특히 대갓집을 방문하면 양반 · 선비마당의 탈놀이를 하며 대청마루에 올라가 류씨 양반과 직접 맞대면하여 수작을 걸고, 풍자적인 사설로 골려주기도 하였다 한다.

 

정월대보름 아침에는 서낭당으로 올라가 신을 보내는 송신(送神) 의식을 치르는데, 처마에 서낭대를 세우고 산주와 마을 어른들이 참여하여 당제를 지낸다. 헌작(獻酌)과 재배를 올린 뒤, 하루 종일 소지(燒紙)를 올리며 의식을 이어간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풍물을 울리며 탈놀이가 펼쳐지고, 해질 무렵 서낭대에 매달린 당방울을 푼 뒤 양반, 각시, 선비 광대만 남기고 모두 하산한다. 남은 광대들은 서낭각시를 혼례시키고 신방을 차려주는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을 펼치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가운데 하회별신굿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아무 관객이 없는 곳에서 하회탈의 제작자인 허도령과 그를 사모했던 처녀를 결혼시켜 그들의 혼령이나마 위로하고자 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마무리는 참으로 인상적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정기발표회(https://www.youtube.com/watch?v=GqzZNpbL27g)


보름간의 야자타임

 

유랑 예인들이 펼치는 탈놀이는 그 내용이 파격적이고, 기득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하게 담고 있다. 이는 탈이 가진 익명성이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연을 마친 후 유유히 떠나버리는 유랑 집단의 예능 특성상, 표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 더욱 용감한 표현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마을굿에서는 그만큼 과감한 표현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보통 설날부터 정월대보름 사이에 벌어지는 농악대의 마을굿에서의 탈놀이는 주로 잡색들이 가면을 쓰고 간단히 노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릉단오제의 관노가면극에는 이러한 한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몸짓만 봐도 알 수 있는 익숙한 사람들이 탈을 쓰고 연기했기 때문에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놀이꾼이 ‘관노’라는 신분적 제약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표현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안전한 무언극(無言劇)이었다.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연행자들 역시 풍산 류씨 집안의 농지를 빌려 농사짓는 농부들이었기에, 탈을 쓴다 해도 익명성이 보장될 수 없었다. 탈놀이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양반을 향한 날카로운 풍자는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유랑 예인 집단의 탈놀이 못지않게 풍자와 해학을 과감하게 담아냈다. 특히 초랭이는 양반과 선비 사이를 오가며 재치 있는 입담으로 위선적인 양반의 모습을 능숙하게 조롱한다. 이러한 특징을 두고 일부는 ‘의례화된 반란’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어떻게 이러한 과감한 풍자가 가능했을까?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양반은 흔히 부패하고 무능하며 이기적인 집단으로 그려지곤 한다. 물론 이기적이고 부패한 권력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정치집단이 부패한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우리 사회가 희망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양반들이 추구한 인간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덕목을 바탕으로 겸손과 겸양의 마음을 닦고 검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지닌 양반이라면, 자신들을 향한 풍자와 조롱을 불쾌하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여유로운 마음으로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을 지금까지도 반듯하게 지켜가는 안동 하회마을의 양반사회는 우리가 흔히 갖는 선입견보다 훨씬 더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러한 풍자와 비평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향한 비판을 억압적으로 막으려는 권력은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과 내적 불안감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현대사의 격변기를 통해, 언론을 통제하고 비판을 금지하는 권력이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직접 목격한 바 있다.

 

술자리나 친목 모임에서는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주고받기 위해 ‘야자타임’이라는 놀이를 하곤 한다. 일상에서는 수직적인 위계가 존재하고 존댓말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야자타임’은 그러한 질서를 잠시 허물어 상호 간의 경계를 낮추고 더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관계가 보다 부드러워지고, 친밀감도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1년 365일 중 탈을 쓰고 양반을 풍자할 수 있도록 허락된 15일이란 기간은 ‘야자타임’과 비슷한 기능을 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엄격한 신분 질서 아래 있던 사람들이 잠시나마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고 자유롭게 풍자와 해학을 즐기며, 사회적 관계가 보다 유연해지는 경험을 하며 이 유쾌한 기억으로 1년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삶에서 일탈과 놀이가 주는 축제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참고자료>

박진태,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도서출판 피아, 2006.
손상락, 『800년을 이어 온 해학과 신명 하회별신굿탈놀이』, 민속원, 2023.
전경욱, 『한국 가면극 그 역사와 원리』, 열화당, 1998.
2023.10.28 하회별신굿탈놀이 정기발표공연(https://www.youtube.com/watch?v=GqzZNpbL27g)

최은서 bionav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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