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정돌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숨겨진 이야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지난 25일 서울 성신여대 인근 아리랑 시네센터 영화관에서 영화 <정돌이>의 상영이 진행된 후, 전찬일 평론가의 진행으로 김대현 감독과 주인공 송귀철(정돌이)이 참여한 관객과의 대화(GV)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영화가 전하는 시대적 의미와 제작 과정, 그리고 386세대에 대한 논의가 심도 깊게 이루어졌다.
경기도 연천에서 고대로, 정돌이와 운동권 학생과의 운명적 만남
경기도 연천에서 아버지의 주취 폭력을 피해 가출한 소년은 청량리 역전을 배회하다가 수배 중인 고려대 운동권 학생을 우연히 만나 심야 만화방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다음날 아침, 수배 학생은 소년을 보호할 수 없어 고대로 데려가고, 정경대 학생회실에서 기거하게 된 소년은 ‘정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87년 4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로 인해 대학가는 격랑에 휩싸였다. 6월 민주항쟁이 본격화되면서, 정돌이는 형, 누나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단순한 참여를 넘어 1987년 12월 대선 개표 부정과 관련한 구로구청 점거 투쟁까지 함께할 정도로 학생운동의 일원이 되었다.
정돌이는 운동권 형, 누나들과 함께 생활하며 국악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장구에 소질이 있음을 깨닫고 고려대 농악대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북을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훗날 장구 명인이 된 정돌이는 당시 성북경찰서 형사들 사이에서 ‘정돌이만 잡으면 고려대 운동권 조직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학생운동과 밀접한 삶을 살았다.
“장구를 잡았던 손, 마이크를 잡으며 말하다”
GV의 시작을 알린 전찬일 평론가는 “매번 같은 영화를 보지만, 그때마다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도 새로운 느낌이 든다”라며 영화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에 대해 주인공 정돌이는 “장구를 많이 잡아봤지만, 마이크는 익숙하지 않다”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학교에서 장구를 배우고, 풍물패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악과 함께한 삶을 살게 됐다. 그런 내 모습이 영화 속에 담긴 것이 낯설지만 감사하다”고 전했다.
김대현 감독은 “정돌이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하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의 기록을 남긴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컸다”고 제작 동기를 밝혔다. 그는 특히 “386세대가 위선적이라는 프레임이 고착화되면서, 당시의 진실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정돌이를 통해 학생운동의 또 다른 얼굴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송귀철(정돌이)과 김대현 감독
고대에서 성신여대까지, 인연이 이어지다
GV 중에는 정돌이가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성신여대 누나에 대한 이야기도 화제가 됐다. 그는 “1988년 고성 오광대 행사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졌고, 함께 대학가를 누비며 편지를 35통이나 주고받았다. 그 인연이 최근 다시 이어졌다”며 감회에 젖었다.
영화 개봉 후, 블로그를 통해 연락이 닿았고,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상영회에서 재회했다고 한다. “서로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난 감동을 전했다.
80년대의 기록, 지금도 유효한가?
이날 GV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연결되면서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김대현 감독은 “386세대를 향한 무조건적인 비판과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특히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스스로 그 시절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역사 왜곡이 심화되는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정돌이처럼 정치권과 무관하게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그 시대의 가치관을 지키고 있는 이들의 삶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전찬일 평론가와 김대현 감독 송귀철(정돌이)
이와 관련해 전찬일 평론가는 “386세대가 한 명의 정치인으로 대표되는 것이 문제”라며, “실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삶은 매우 다양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80년대를 다루는 방식이 신선했다”고 평가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저마다 깊은 감상을 남겼다. 한 관객은 “<서울의 봄>이 사람 인체의 겉모습을 그렸다면, <정돌이>는 그 속의 장기와 핏줄을 담아낸 작품”이라며 감탄했다.
또 다른 관객은 “저는 386을 평생 욕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386을 욕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정돌이는 “촛불 집회에 나간 사람들의 눈빛이 선하고 진실해 보였다. 국민을 믿는다”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형들과 누나들이 함께했던 시절이 행복했다.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양심을 팔지 않고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80년대에서 현재까지, 연결되는 의미
GV를 마무리하며 김대현 감독은 “이 영화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찬일 평론가는 “이 영화가 80년대의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고 평가하며, 뜨거운 박수 속에 행사를 마쳤다.
영화 정돌이는 현재 독립영화관을 중심으로 상영 중이며, 오는 3월까지 일부 극장에서 계속 만날 수 있다. OTT 공개 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김대현 감독은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공동체적 경험의 가치를 강조했다.
김대현 감독은 “이 영화가 꼭 해야 할 이야기를 전달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정돌이는 영화를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과 위로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