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지은 인생, 전통으로 품은 세월 – 오미자 명무의 한결같은 걸음
춤이 인생이고, 인생이 곧 전통인 사람이 있다.
이름 석 자를 말하기에 앞서, 그가 춰온 춤과 걸어온 길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
오미자 명무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춤과 함께 살아낸 한국 전통무용계의 살아 있는 증언자다.
팔순을 넘긴 지금도 매일 아침 연습실로 향하는 그는, 무대를 위한 훈련이 아니라 “살기 위해,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춤을 춘다고 말한다.
오사카에서 부산까지, 춤이 깃든 유년의 기억
1941년, 오미자 선생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라는 불안한 시대 속, 해방과 함께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귀국한 그는 일찍부터 남다른 끼와 감각을 지닌 소녀였다.
춤은 처음부터 예술이기보다는 놀이였고, 유희였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춤을 가르치며 웃고 즐겼던 그 시절은 훗날 무대 위에서 그의 몸짓에 담긴 따뜻한 정서를 낳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던 중, 부산여자상업중학교에서 오화진 선생을 만나며 춤은 오미자의 인생을 바꾸기 시작한다. 당시 무용은 일부 편견에 가로막혀 있었고, 어머니의 반대도 컸지만 그는 몰래 연습을 이어갔다.
스승의 권유로 출전한 경남무용경연대회에서 그는 ‘석양춤’을 추었고, 어린 소녀의 몸짓은 그 시대를 감동시켰다. 이 무대에서 받은 경남교육회장상은 단지 상이 아닌, 예인으로서의 여정을 향한 시작점이었다.
스승과의 인연, 삶을 춤으로 빚어낸 시간들
오미자 선생의 춤 인생을 이야기할 때, 스승을 빼놓을 수 없다. 무용을 본격적으로 배운 첫 스승은 박성옥(1908~1983) 선생이었다. 동래 출신의 민속무 권위자였던 박성옥 선생은 기본무와 검무, 가야금, 장고춤 등을 오미자에게 가르쳤고, 이 시기의 철저한 기초 훈련은 그의 춤이 흐트러짐 없이 고른 이유가 되었다.
동시에, 김미화 발레연구소에서 서양무용도 접했다. 〈분홍신〉 무대를 준비하던 시절, 그는 밤새워 직접 바느질로 ‘튜튜’를 만들어 입고 무대에 섰고, 이 무대에서 “어디서 맞췄느냐”는 스승의 질문에 “직접 만들었다”고 답하던 그 열정은 지금도 그의 예술혼을 증명한다.
서울로 무대를 옮긴 이후에는 이매방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스승과 함께한 수많은 지방공연 속에서 그는 정중동의 미학, 곡선의 정리, 대삼과 소삼의 구분을 몸으로 익혔다. 이매방 선생은 제자인 오미자에게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고 말했고, 오미자는 그 가르침을 춤뿐 아니라 삶으로 지켜왔다.
또 한 명의 스승, 강선영 선생과의 일화도 인상 깊다. 태평무 이수를 권유받았으나, 이매방류 전통을 잇기 위해 고사했던 오미자에게 강선영 선생은 “이매방 선생이 오미자를 빼았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한 길을 선택하고, 끝까지 그 길을 간 예인의 품격을 선택했다.
무용을 통해 맺어진 인연, 춤이 잇는 가정
춤은 오미자 선생에게 가족을 안겨준 선물이었다. 사교춤 파트너였던 안성묵 씨와 무용 연습실에서 인연을 맺었고, 윤바람(윤은석) 선생과 박성옥 선생이 “이 인연은 단순한 파트너로 끝날 일이 아니다”라며 둘의 결혼을 권유한 것이 지금의 가정이 되었다. 둘은 가정을 이루어 세 자녀를 두었다. 막내딸 소영 씨는 무용가의 길을 이어가며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전통무용을 강의하고 있다.
오미자 명무의 막내딸 소영 씨
2005년 한밭국악경영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을 때, 시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복덩어리”라며 그를 자랑스러워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매방 선생님도 "받을 사람이 받았다"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오미자는 “춤으로 가족과 스승에게 기쁨과 자긍심을 전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하다”고 회상한다.
전수조교 시험에서 보여준 예인의 도리
살풀이춤 전수조교 시험 당시, 이매방 선생의 부인과 함께 시험을 보게 된 상황이라 이매방 선생은 오미자에게 “실수로 수건을 떨어뜨리라”며 점수를 낮추기를 권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춤에 집중했고,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제자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며 물러섰다.
이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무용계가 잊지 말아야 할 아름다운 품격’으로 회자된다. 이매방 선생은 “이런 제자를 둔 나는 참 복이 많다”고 말했고, 이는 예술과 인간됨을 모두 겸비한 제자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자선공연, 후학 양성, 연구원까지… 전통을 살아내는 사람
오미자 명무는 현재 마포 망원동의 ‘오미자무형유산연구원’을 운영하며 제자 양성은 물론, 지역 사회를 위한 자선공연과 복지 공연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춤이 단지 예술이 아닌 ‘함께 나누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무대를 넘어 사람과 사회를 잇는 전통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미자 명무에게 춤은 곧 인생이자 삶의 호흡이 된 예술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순간, 스스로를 확인하고, 감정을 정화하며, 관객과 진심으로 소통한다.
“팔순이 넘었지만 매일 춤을 춥니다. 작품 속에 빠져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 시간이야말로 저를 가장 살아 있게 합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춤살림’을 이어가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삶은 곧 춤이고, 춤은 삶의 언어이며, 전통은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정신이다.
시대가 기억해야 할 사람, 삶으로 전통을 지켜낸 예인
오미자 명무는 단지 훌륭한 무용가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전통을 지켜낸 예인이다. 수많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후학에게 그 정신을 나누며, 무대와 가정을 춤으로 이어온 사람. 그의 이름은 이제 한 사람의 명무를 넘어, 한국 전통춤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만하다.
조용하지만 끊이지 않는 걸음,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울림 있는 그의 춤은 오늘도 그렇게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