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작곡가, 세조는 지휘자였다” 박일훈 전 국립국악원 원장, 500년 전 궁중악보를 오선지로 되살리다
전통음악의 원형을 품은 고악보가 오늘날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오선악보로 되살아났다. 전 국립국악원장 박일훈이 2024년 11월 출간한 『세종실록 정간보·세조실록 오음약보 – 오선보 역보』는 조선 왕조의 궁중음악을 현대 음악어법으로 완역한 전례 없는 작업이다. 그는 2025년 6월 19일, 국악타임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직접 밝혔다.
“이건 음악계의 한글입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다면, 이 악보는 음악의 글자를 만든 것입니다.”
박 원장은 세종대왕이 만든 정간보는 단순한 기호 체계를 넘어 음악의 감정적 소통을 가능케 한 ‘음악 문자’라고 말한다. 그는 “세종의 32정간이 정확히 어느 정도 길이인지, 서양 음악의 박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그동안 아무도 정확히 해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세종은 국민과 함께 음악을 향유하기 위해 여민락을 작곡하고, 그 원리를 담은 악보 체계를 창안했으나, 수백 년간 해독되지 못한 채 학문적 장벽 뒤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박일훈 전 국립국악원 원장
박일훈 원장은 2022년 여름,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중단된 시기, 오래된 책장을 정리하다가 과거 자신이 해석을 시도했던 악보 뭉치를 발견한다. “버리려고 꺼냈다가 펼쳐봤는데, 거기서 답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정간보와 오음악보가 5선보와 정확히 딱딱 맞아떨어지는 걸 확인했죠.” 이후 그는 세종악보, 세조악보, 시용향악보, 대악후보까지 모두 분석하며 오선악보로 재정리했다. 그리고 이 결과물은 512쪽의 책으로 집대성됐다.
“왜 지금까지 못 했을까?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세종은 작곡가, 세조는 지휘자… 그 음악을 오늘에 되살리다”
박 원장은 오히려 이 악보가 “너무 쉬웠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한글도 처음엔 어려워 보였지만 누구나 쉽게 익혔잖아요? 정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만든 위대한 음악 문자입니다.” 오선악보화가 된 지금, 국악 연주자뿐 아니라 서양 음악을 전공한 이들도 조선의 궁중음악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박 원장은 세종과 세조의 역할을 “작곡가와 지휘자”로 나눠 설명했다. 세종이 절대음의 높이를 정하고 곡을 작곡했다면, 세조는 이를 실제 연주와 지휘를 통해 다듬고 간결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세조는 32정간을 16정간으로 줄이고, 연주자 중심으로 악보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종묘제례악으로 전해진 거죠.” 이러한 해석은 단지 역사적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그때 만든 음악이 지금까지도 음은 거의 그대로다. 이건 누가 감히 고칠 수 없는 위대한 음악 유산”이라 강조했다.
박일훈 원장은 이 작업을 학문적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음악은 듣고 연주되는 예술”이라며, “논문보다는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악보로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누구든 연습하고 연주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430페이지 이후에는 음악 분석과 리듬 구조까지 담아 실연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 역할도 한다.
송혜진 교수 “고악보 해석의 실천적 전환점”
미래를 위한 악보, 누구나 함께 연주하는 여민악(與民樂)
숙명여대 송혜진 교수는 이 책에 대해 “국악 고악보 해석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평가했다. 송교수는 “이 책은 단지 과거를 해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창작과 교육, 실연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살아있는 자료”라며, “정간보의 리듬 구조를 ‘대강’ 개념으로 정리하고, 체계적 음악 분석까지 더해 국악의 이해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고 강조했다.
박일훈은 이번 작업을 통해 “이제야 스승의 숙제를 마쳤다”고 말한다. 그는 이 악보집이 “세종대왕의 음악 철학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여민악’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던 고악보의 숲 속에서 길을 낸 이 작업은, 한국 전통음악의 깊이를 세계 무대로 확장할 수 있는 실질적 도약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세종실록 정간보·세조실록 오음약보 – 오선보 역보』는 고악보의 재해석을 넘어, 한국음악의 시작점에 대한 새로운 해답이자 정서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세종대왕의 창조정신과 세조대왕의 실천력이, 한 시대를 넘어 박일훈이라는 작곡가의 집념을 통해 다시 호흡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는 지도이며, 오랜 시간 침묵하던 정간의 음을 다시 울리게 한 ‘음악의 한글’이다. 국악타임즈는 이 위대한 작업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 악보가 국내를 넘어 전 세계 무대에서 여민락의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