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리는 귀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음악”... 진윤경 렉처콘서트 ‘피리 산조의 길에 들어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이자 피리 연주자·연구자인 진윤경이 11월 30일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렉처콘서트 ‘피리 산조의 길에 들어서다’를 열었다. 이번 무대는 피리 산조의 길을 실제로 개척한 두 거장, 정재국 명인과 박범훈 명인을 한자리에 초청해 대담과 연주를 엮은 자리였다. 진행은 단국대 연구교수 반혜성이 맡아 강연과 토크, 감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진윤경은 인사말에서 정재국·박범훈 두 스승을 “피리 산조의 길을 처음으로 내어준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피리는 음역과 구조상 산조에 적합하지 않다는 편견 속에서도, 두 거장이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들어 후학들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반혜성은 20대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옆에서 들어온 진윤경의 연주를 떠올리며 “피리는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악기”라는 말을 꺼내 이날 공연의 의미를 짚었다.
첫 대담의 주인공은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이자 ‘정재국류 피리 산조’를 만든 정재국 명인이었다. 그는 30세이던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최초의 피리 독주회를 열던 때를 회상하며 “피리로 독주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이지만,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악·민속악·피리 협주곡을 한 무대에 올리며 피리 음악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려 했던 당시의 결심과 부담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반혜성 교수와 정재국 명인
정재국은 피리를 “심장에서 바로 올라와 울대와 입으로 직행하는 악기”라고 표현했다. 연주자의 긴장과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무대에 서면 ‘내가 피리의 왕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불어야 떨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때는 “궁중음악 하는 사람이 산조를 한다”는 의구심을 받기도 했지만, 정악과 민속악, 창작을 가르는 선을 허물고 “음악인은 장르를 가르지 않고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분명히 했다.
두 번째 대담에서는 작곡가·지휘자·교육자로 활동해온 박범훈이 본인의 피리 산조 창작 과정을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대금을 하고 싶었지만 피리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 스승 지영희에게서 시나위를 배우며 산조의 기본 가락과 장단을 체득한 과정, 그리고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산조 시험곡”을 준비해달라는 학생들의 요구로 결국 직접 피리 산조를 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반혜성 교수와 박범훈 명인
그는 시나위의 가락을 바탕으로 진양–중모리–자진모리의 구조를 만들며 약 25분 분량의 산조를 완성했지만, 오랜만에 다시 전곡을 연습하며 “내가 만들어 놓고도 숨이 찰 만큼 힘든 곡”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산조는 그 악기를 가장 잘 아는 연주자가 직접 만들어야 생명력이 있다”며, 오늘날 연주자들이 정형화된 악보 재현에만 머물지 말고 자기 가락을 만들어가는 ‘열린 산조’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 철학에 대한 언급도 짧지만 인상 깊었다. 박범훈은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한국에서는 늘 ‘안 된다’는 말부터 들었지만, 외국에서는 ‘된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이는 피리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한다며, 학생의 시도를 틀렸다고 막기보다 “그 소리를 이렇게 꺾어보면 어떠냐”는 식으로 곁에서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긍정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관객과의 질의응답에서는 한 고등학교 피리 전공 학생이 “기존 산조를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산조를 어떻게 창작할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 박범훈은 이날 진윤경의 연주 안에도 이미 상당한 분량의 자기 가락이 담겨 있다고 짚으며 “처음엔 모방으로 시작하더라도 언젠가는 자기 감정과 상상력을 실어야 한다. 완벽한 복제보다 ‘나만의 가락’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답했다.
마무리 발언에서 정재국은 “정악과 민속악을 굳게 나누던 시대는 지났다”며,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폭넓은 감수성을 갖춘 연주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박범훈은 피리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안 된다”가 아닌 “된다, 다만 이렇게도 해보자”라고 말해주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당부했다.
진윤경은 오늘의 무대를 “전승의 다음 세대를 고민하는 자리”로 정의했다. 피리 전공자가 줄어들고 취미층도 거의 없는 현실에서 “10년, 20년 뒤 피리를 누가 전승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며, 아직 생존해 있는 스승 세대에게서 정악·민속악·산조를 최대한 온전히 배우고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말했다. 이어 “나를 거쳐 가는 학생들이 더 많은 아이디어와 방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다짐으로 이날의 긴 렉쳐콘서트를 마무리했다.

진윤경 명인
전체적으로 이번 공연은 피리 산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전승 방식을 동시에 비춰보게 한 무대였다. 피리가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악기’라는 언급처럼, 악기 하나를 둘러싼 역사와 삶, 교육과 미래가 촘촘히 드러난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