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무(名舞) 이동안의 춤 유산, 왜 무형유산 종목으로 지정되어야 하는가?
전통문화 칼럼니스트
김승국
화성재인청의 마지막 도대방 이동안의 꿈이 좌절되다
조선 후기, 재인(才人), 무부(巫夫), 광대(廣大) 등 예인들의 자치 조직이었던 화성재인청(華城才人廳)의 마지막 도대방(都大房)으로 알려진 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 선생은 1906년 12월 6일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태어나 1995년 6월 20일 90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생전에 국가무형유산 발탈의 예능보유자였으나, 그의 예술적 세계는 발탈을 넘어 줄타기, 전통춤 등 전통 예능 전반에 걸쳐 깊고 넓었다.
이동안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줄광대로 이름을 떨쳤다. 1976년 줄타기 무형유산 지정 조사 당시, 이동안 선생과 함께 김영철, 조송자 등이 후보로 올랐지만, 70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아쉽게도 배제되었다. 대신 그보다 14살 연하였고 당시 줄타기로 전성기를 누리던 김영철 명인이 줄타기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이동안 선생은 그의 춤 스승 김인호(1850?~1930?) 명인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춤으로 예능보유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이 역시 좌절되었다. 하지만 1983년, 그의 소망과는 달리 국가무형유산 발탈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꾸밈없는 전통춤의 원형, 이동안 춤의 독보적 가치와 미학에 주목한다
이동안 선생은 '조선의 마지막 춤꾼', '타고난 광대'로 불렸다. 그런데도 화성재인청 춤의 원형을 보유한 김인호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춤은 전통의 원형에 가장 가깝고 구조가 명확하다고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유하였던 전통춤이 아직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스승 김인호에게 물려받은 30여 종의 춤 중 태평무, 살풀이춤, 진쇠춤, 신칼대신무, 한량춤이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지정받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살아생전에 우리나라 춤은 첫째로 장단을 알아야 하며, 가볍게 추거나 쓸데없이 돌거나 춤집을 인위적으로 꾸며서는 안 되며, 자연스럽게 추어야 하며 또한 무겁게 추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화려함으로 꾸며지지 않은, 꾸밈으로 포장되지 않은 우리네 그대로의 멋과 흥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전통춤의 색깔과 원형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야박한 말 같지만, 이동안의 춤이 아직도 종목 지정이 되지 않은 것은 무용계 원로들과 무형유산 전문가들의 책임도 크겠지만 무형유산 종목 지정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직계 제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전통춤의 뿌리 찾기 : 김인호와 화성재인청, 그리고 잊혀진 역사
흔히 한성준(韓成俊, 1875?-1941) 선생을 우리 '근대 한국춤의 아버지' 혹은 ‘근대 한국춤의 비조(鼻祖)’라 부른다. 그가 창안하거나 재구성한 춤은 우리 춤 중에서도 탁월하고 정통성 있는 춤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중 승무와 태평무가 후대에 각각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와 제92호로 지정되었으니 ‘한국춤의 비조’라 부를 만도 하다. 그러나 한성준 선생보다 더 먼저 근대 한국 춤의 문을 열었던 당대의 명무(名舞)이자 안무가였던 김인호(金仁鎬, 1855?~1935?)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김인호 선생은 용인 태생으로 화성재인청 출신으로 어전(御殿) 광대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1902년 서울에 세워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옥내 극장인 협률사(協律社) 단원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민속 연희에 참여한 유랑광대이자, 1898년경에 세워져 1930년까지 문을 열었던 광무대(光武臺)의 인기 있는 재인이기도 했다.
그의 출생연도와 사망연도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스승이 19세기 최고의 예인으로 명성을 날린 이날치(李捺致, 1820-1892)라는 점, 광무대 시절 기록이 1914년에 집중적으로 매일신보에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오다가 1930년에 한 번 나오고 아주 끊어진 점, 순종 때 그의 어전광대로서의 일화가 전해지는 점 등 관련 문헌 자료로 미루어보면 1855년쯤 태어나 1935년쯤 별세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준 선생이 1875년생이니 김인호 선생은 한성준 선생보다 스무 살 연상으로서 춤에서도 한참 선배인 셈이다. 한성준 선생이 김인호 선생의 춤반주 단골 고수였다 하니 당시 김인호 선생의 위상을 알만하다.
제도적 소외가 불러온 전승의 위기
그런데 사람들은 한성준 선생을 아는데 김인호 선생을 왜 모를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제자들의 활동상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한성준 선생의 직계 제자이자 외손녀인 한영숙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에서 승무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고, 역시 그의 직계 제자인 강선영도 태평무로 예능보유자가 되어 스승인 한성준 선생을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 혹은 비조'로 자리매김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영숙 선생은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장차 한국춤계의 지도자가 될 인재들을 양성하였고, 그녀의 제자 이애주 선생과 정재만 선생도 스승의 대를 이어 예능보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애주 선생은 서울대학교에서 정재만 선생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을 양성하였고, 강선영 선생의 제자들도 여러 대학에 포진하여 후학을 양성하여 한성준의 위상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당대의 춤의 명인으로 자리매김했던 김인호 선생 역시 많은 제자를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이동안(李東安, 1906~1995) 선생이 가장 특출하였다. 이동안 선생 역시 김인호 선생과 같이 화성재인청 출신으로 1922년 광무대로 진출하여 김인호 선생으로부터 전통춤과 장단을, 김관보(金官寶) 선생에게 줄타기를, 장점보(張點寶) 선생에게 대금, 피리와 해금을 배웠으며, 방태진(方泰鎭) 선생에게 태평소를, 조진영(趙鎭英) 선생에게 남도잡가를, 박춘재(朴春在) 선생에게 발탈을 배워 다양한 예능에 두루 능했다.
이동안 선생이 김인호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춤은 태평무, 승무, 진쇠춤, 검무, 살풀이춤,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성진무, 학무, 화랑무, 신로심불노, 희극무,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등 대략 30여 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동안 선생이 생전에 기억하고 있던 재인청류의 춤은, 기본무, 살풀이춤, 승무, 태평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성진무, 화랑무, 도살풀이, 검무, 남방무, 선인무, 팔박무, 진쇠무, 승전무, 장고무, 노장무, 소고무, 희극무, 아전무, 바라무, 나비춤, 장검무, 신노심불로, 입춤 신선무, 오봉산무, 학무, 하인무, 춘앵무, 화선무, 포구락무, 연화대무 등 41여 종에 이른다.
이동안 춤의 무형유산 지정,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이동안 선생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춤을 아낌없이 전승하였고, 생전에 춤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1983년에 국가무형문화재 발탈로 예능보유자가 되어 지내다 1995년 세상을 떠나니 그의 스승인 김인호 선생도 역시 한국춤계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춤계가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쪽으로 줄을 서는 상황에서 이동안 선생이 죽고 난 후 그로부터 춤을 배웠던 박정임, 김백봉, 장월중선, 최현, 김덕명, 문일지, 배정혜, 정승희, 김백초, 최경애, 김진홍, 오은희, 김명수 선생 등은 이동안 선생이라는 구심점을 잃자 전승의 힘을 잃고 대부분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이동안의 직계 제자인 정경파 선생이 승무와 살풀이로 1996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작고하고 지금은 김복련 선생으로 이어져 전승을 지속하고 있고, 정주미, 박경숙, 박경현, 이선영, 이승희, 윤미라, 정현숙, 김기화, 김정아, 박지언 선생 등이 전승을 이어가고 있으나 이동안 선생이 남긴 수많은 춤은 전승 기반이 너무나도 허약하다.
이동안 선생은 악·가·무·희·극(樂·歌·舞·戱·劇)에 두루 명인이었으나 특히 춤에서는 불세출의 명인이었다. 그가 춤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지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춤계에서도 큰 손실이 되고 만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한국춤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동안 선생의 춤을 재조명하여, 이제라도 그의 다양한 춤의 온전히 전승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전승 기반을 마련해주는 등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