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진정한 마지막 광대, 이동안이 남긴 이야기’ 국악타임즈 연재 두번째 이야기

제2회
연재자 (註)
이동안 선생의 진술에 의하면 화성재인청이 지금의 예총과 같은 성격인 각도의 예인집단인 재인청을 대표하는 곳이며, 수원의 화령전이 화성재인청이 위치한 곳이며, 예인들의 교육 장소로도 역할을 하였으며,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면 궁중 행사나 지방 관아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회원 자격증을 부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집안이 화성재인청의 우두머리인 도대방을 세습하였다는 것을 밝히며 자신이 화성재인청의 마지막 도대방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화성재인청이 한국의 전통예술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1920년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화성재인청 안에 무속 활동을 하던 무속인(무당)들이 집단인 신청이 있었으며, 이들이 화성재인청에 회비를 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화성재인청이 팔도도대방청이여
재인청이(구술자는 재인청과 도대방청이라는 명칭을 함께 사용하였다.) 뭐인고 허니 지금의 예총이나 한가지여. 화성재인청(구 화성재인청 자리가 현재의 화령전(華寧殿, 수원시 신풍동 소재, 사적 115호)이 독청이고 팔도에 있는 사람을 거기서 다 감시를 해. 지방에 있는 것은 대방청 지부여. 재인청이 도대방청이고 충청도 대방청, 전라도 대방청 그렇게 됐다 그말이여.
전라도며 경상도며 각도에 지부를 두구서 예술가들을 키우는 거여. 지방에서 잘하는 이들이 올라와서 재주가 좋아야 공부(전통예능의 학습)를 하고 졸업을 맞고 회원이라는 팻장(자격증)을 준거여. 그 팻장을 받아야 궁에도 들어가고 각고을에 행사도 모시고 누가 진사벼슬에 급제를 헌데든지 하면 삼현육각을 잡혀서 길군악을 치고 집까지 가는거여. 땅재주도 하고 줄도 타면서 말여.
누가 전라도지사를 하면 삼현을 치면서 서울서부터 전라도까지 걸어가는거여. 그걸 허는 사람들이 화성재인청 인가를 받지 않으면 못가. 그런 인정을 해주는 최고 우두머리가 도대방인데 육대조 할아버지부터 대대로 해오다가 우리 아버지(이재학)가 할 차례가 됐거든. 헌데 아버지가 안한다고 하니께 할아버지(이하실: 피리와 장고의 명인. 도대방을 지냄)께서 헐 수 없다 손자한테 물려줘라 그래서 내가 열네살 되던해에 도대방 자리에 오른거여.
어린애니께 뭘 알라 밑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해와서는 전라도에에서는 어떻고 경상도에서는 어떻다고 애길 해준거지. 그래도 어린 것이 도대방이니께 굽신거릴 수 밖에 없었지. 그러다 금방 일본놈들이 들어와설람은 한국예술을 없앨라고 다 때려부순거여 헐 수 없이 문을 닫고 말았지.(1920년)
재인청에 집이 여러 칸이었어. 한칸에는 악사하는 사람들이 꾀서(모여서) 밤낮으로 연주를 하고, 임금이 오면 뫼셔놓고 삼현을 치던 데도 있었고, 한짝에는 땅재주하는 사람들이 꾀고(모이고), 칸칸이 꾀는(모이는) 이들이 달랐지.
신청이라는 데도 있었는데 재인청 건물에 한칸을 차지하고 지냈지. 무당들이 꾀는(모이는) 자리여. 신청 사람들은 세금을 냈어. 도대방이 관할을 하고 세금을 받는거여. 그러니 그 사람들은 재인청 회원들한테는 꼼짝을 못혀. 말하자면 주인과 하인 처지나 매한가지였어.
다음 연재일은 12월 22일 오전 9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