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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심(不動心)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부동심(不動心)

 

마음에 중심 있으면

동요하지 않게 되지

 

마흔 살 나이 되면

군자의 도(道) 밝아지니

 

양심의

명령 따르면

그게 바로 참 용기

 

<語義> : 움직이지 않는 마음, 동요되지 않는 마음.

             (마음이 외부의 충동을 받아도 흔들리거나 동요되지 아니함)

<出典> : 子(맹자) 公孫丑(공손추) 上(상)

 

 

중국 춘추시대, 孟子(맹자)와 제자 公孫丑(공손추)와의 一問一答(일문일답)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공손추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께서 齊(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道(도)를 행하시게 되면, 비록 이것으로 말미암아 覇王(패왕)을 이루시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내 나이 사십 세가 되어서부터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原文> 公孫丑問曰(공손추문왈) 夫子加齊之卿相(부자가제지경상) 得行道焉(득행도언) 雖由此覇王不異矣(수유차패왕불이의) 如此(여차) 則動心否乎(즉동심부호) 孟子曰(맹자왈) 否我四十不動心(부아사십부동심)]

 

孟子(맹자)께서 만일 벼슬을 얻어서 道(도)를 행하신다면, 비록 이것으로 말미암아 覇王(패왕)의 업을 이룩하시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책임이 이와 같이 크고 무거우면 또한 두렵고 의혹하는 바가 있어,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다. 사십 세는 막 벼슬할 때이며, 君子(군자)의 도가 밝아지고 德(덕)이 확립되는 때이다. 孔子(공자)께서 사십 세에 不惑(불혹)하신 것 또한 ‘不動心(부동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어서 公孫丑(공손추)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孟賁(맹분 : 한 손으로 황소 뿔을 잡아 뽑아 죽게 만들었다는 그 당시의 이름난 장사)과는 거리가 머시겠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告子(고자 :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도 나보다 앞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孟賁(맹분)은 혈기의 勇士(용사)인데, 공손추가 이것을 빌어서 맹자의‘不動心(부동심)’을 칭찬하니, 맹자께서는 ‘고자는 도를 알지 못해도 나보다 앞서 ‘부동심’하였으니, 맹분의 용맹 같은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또 공손추가 말하기를

“不動心(부동심)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있다.”

그리고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程子(정자 :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와 정이 형제를 높여 이르는 말)는 마음에 중심이 있으면 능히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北宮黝(북궁유 : 제나라 용사)는 용맹을 기르기를 칼에 찔려도 살을 떨지 아니하고, 눈을 찔려도 깜빡도 아니하고, 한 터럭이라도 남에게 꺾이면 장터거리에서 종아리를 맞은 것같이 여겼다. 賤(천)한 사람에게서나 萬乘(만승)의 임금에게서나 모욕을 받지 않았다. 임금을 찌르는 것을 천한 사람 죽이는 것처럼 여겼다. 그에게는 두려운 제후가 없었다. 욕하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보복하였다. 그는 자객의 類(류)이니, 반드시 이기는 것으로써 주를 삼아서 ‘不動心(부동심)’한 사람이다.

 

孟施舍(맹시사 : 제나라 용사)는 ‘용맹을 기르는 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도 이길 듯이 여긴다. 적을 헤아린 뒤에야 나아가며, 이길 만한 뒤에야 맞서 싸운다면 이것은 大軍(대군)을 두려워하는 짓이다. 내가 어찌 꼭 이길 수가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않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맹사시는 戰士(전사)이므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써 주를 삼아서 ‘不動心(부동심)’한 사람이다.

 

北宮黝(북궁유)는 子夏(자하) 같고, 孟施舍(맹시사)는 曾子(증자) 같다. 두 사람의 용맹 중 누가 나은지는 알 수 없으나, 맹시사는 지키는 바에 요점이 있다. 북궁유는 남과 대적하기를 힘쓰고, 맹시사는 자신을 지키는 것에 오로지 힘썼다. 자하는 성인을 敦篤(돈독)하게 믿었고, 증자는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였다. 두 사람의 용맹을 논한다면 누가 나은지는 알기 어렵지만, 그 지키는 바를 논한다면 맹사시가 북궁유에 비하여 그 요령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曾子(증자)가 子襄(자양)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勇猛(용맹)을 좋아하는가? 내가 일찍이 선생님한테서 큰 용맹에 관해서 들었는데, ‘스스로 반성하여 의롭지 않으면, 천한 사람일지라도 양보를 한다. 그러나 스스로 반성하여 의롭다면, 비록 천만 사람 앞이라도 나는 겁내지 않고 갈 것이다.’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즉,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을 하는 곳에 참다운 용기가 생기고, 이러한 용기가 ‘不動心(부동심)’의 밑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다.

 

※ 子夏(자하, B.C.507 ~ B.C.420) : 중국 춘추 시대의 유학자. 본명은 卜商(복상). 공자의 제자로서 十哲(십철)의 한 사람이다. 위나라 文侯(문후)의 스승으로 詩(시)와 禮(예)에 능통하였는데, 특히 예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였다. 공자가 刪定(산정)한 詩經(시경)과 易經(역경) 및 春秋(춘추)를 전했다고 한다.

 

※ 曾子(증자, B.C.505 ~ B.C.435) : 중국 전국시대의 儒家(유가) 사상가이다. 이름은 參(삼), 자는 子輿(자여)이며, 曾子(증자)는 존칭이다. 공자의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唯心主義的(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또 大戴禮記(대대례기)의 증자 10편 및 孝經(효경)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봉건제의 붕괴를 제지하기 위하여 씨족제로부터 비롯된‘孝(효)’라는 덕목을 강조하였다. 또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펴본다.”라고 하여, 공자 사상의 근본을 忠恕(충서)라는 말로 표현했다. 공자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후에 증자의 학통은 子思(자사), 孟子(맹자)로 이어져 유가의 도통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