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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무적(仁者無敵)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인자무적(仁者無敵)

 

양(梁)의 ’혜왕(惠王)’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더니

 

선정(善政)을 베풀라네

어진 정치 베풀라네

 

자고로

어진 사람에겐

적이 없다 하였네

 

<語義> :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

             (어진 사람은 모든 사람이 사랑하므로, 세상에 적이 없음)

<出典> : 孟子(맹자) 梁惠王章句上(양혜왕장구상) 四(사) ~ 五(오)

 

 

중국 춘추전국시대, 孟子(맹자. B.C.372~B.C.289)가 魏(위→나중에 梁으로 개칭)나라 梁惠王(양혜왕. 재위 B.C.370 ~ B.C.319)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양혜왕이 말하였다.

“寡人(과인)은 차분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합니다.”

맹자께서 물으셨다.

“사람을 죽이는 데 몽둥이를 사용하는 것과 칼을 사용하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칼을 써서 하거나, 虐政(학정)으로 하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왕의 주방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진 말이 있는데, 백성들에게는 굶주리는 기색이 있고 들에 굶어 죽은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한 것입니다. 짐승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도 사람들이 싫어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되어 政事(정사)를 행하면서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면, 백성의 부모 될 자격이 어디에 있습니까. 仲尼(중니. 공자의 자)께서는 ‘처음으로 木偶(목우. 장례용 인형)를 만든 자는 아마 후손이 끊겼을 것이다.’ 하셨는데, 이는 사람을 본떠서 만들어 그걸 장례에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백성들을 굶주려 죽게 한단 말입니까?”

 

또 양혜왕이 맹자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강했던 것은 선생께서도 다 아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 代(대)에 이르러 동쪽으로는 齊(제)나라에 패하여, 長子(장자)인 太子(태자)까지 죽었습니다. 서쪽으로는 秦(진)나라에 칠백 리의 영토를 잃었으며, 남쪽으로는 楚(초)나라에 욕됨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인은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雪辱(설욕 : 상대를 이김으로써 지난번 패배의 부끄러움을 씻고 명예를 되찾음)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기를,

“사방 백 리의 영토로써도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왕께서는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어 형벌을 되도록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이 열심히 밭을 갈고 쉽게 김매도록 하여야 합니다. 장정들에게는 일없는 여가에 孝悌忠信(효제충신 : 어버이에 대한 효도, 형제끼리의 우애, 임금에 대한 충성과 벗 사이의 믿음)을 배우게 하여, 집안에서는 父兄(부형)을 잘 섬기고 바깥에서는 어른들을 공경하도록 지도한다면, 백성들은 몽둥이를 들고서도 저 진나라, 초나라의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무기를 두들겨 쫓게 할 수 있습니다. 저들 敵國(적국)에서는 백성들의 시간을 빼앗아 밭 갈고 김을 매어, 부모를 봉양할 수 없게 부리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형제와 처자식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네들이 자기 나라 백성들을 구렁에 빠뜨려 허우적거리게 하는데, 왕께서 가셔서 정벌을 한다면, 누가 왕에게 대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르기를, ‘어진 사람에겐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왕께서는 조금도 내 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原文> 彼陷溺其民(피함익기민) 王往而征之(왕왕이정지) 夫誰與王敵(부수여왕적) 故曰(고왈) 仁者無敵(인자무적) 王請勿疑(왕청물의)

 

이 ‘仁者無敵(인자무적)’이라는 故事成語(고사성어)는 孟子(맹자)가 처음 쓴 말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오던 것을 引用(인용)하여 쓴 것인데, 이 일 이후로부터 더욱 널리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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