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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恒産無恒心(무항산무항심)

 

無恒産無恒心(무항산무항심)


생활이 어려움에도
바른 마음 갖는 것은

 

선비는 가능하나
일반 백성 어렵다지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바른 마음 못 갖네


<語 義> :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도 없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出 典> : 孟子(맹자) 梁惠王篇(양혜왕편) 上(상)

 


중국의 성인 孟子(맹자)에게 어느 날 濟(제)나라 宣王(선왕)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지내면, 王道(왕도)의 길은 자연히 열리게 된다.”며,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 가능한 일입니다. 일반 백성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진실로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간사하고 사치하여, 이미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어떻게 어진 임금이 백성들을 그물질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原 文> 無恒産而有恒心者(무항산이유항심자) 唯士爲能(유사위능) 若民則無恒産因無恒心(약민즉무항산인무항심) 苟無恒心(구무항심) 放僻邪侈無不爲已(방벽사치무불위이) 及陷於罪然後從而刑之(급함어죄연후종이형지) 是罔民也(시망민야) 焉有仁人在位(언유잉인재위) 罔民而可爲也(망민이가위야)

 

임금의 자리는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생각이 통하던 시대에, 백성을 하늘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얼마만큼 안정된 생활을 제공하느냐 하는 것이 정치의 要諦(요체 : 사물의 가장 중요한 점 곧 요점)이며, 백성들의 실생활을 돌보는 것이 임금의 도리라고 설파한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생각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한 깊은 통찰력의 결과로, 역사상 혁명의 주체는 항상 중산층이었다는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오늘날도 국민들의 생활 안정이 政治(정치)의 근본이라는 의미에서,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 또는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無恒産無恒心(무항산무항심)].’는 식으로 자주 인용된다.

 

※ 齊 宣王(제 선왕, ?~B.C.301. 재위 B.C.319~B.C.301) : 중국 전국시대의 齊(제)나라의 제5대 국왕이다. 성은 嬀(규), 성은 田(전), 휘는 辟彊(벽강)이다. 선왕 때 제나라는 강해졌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제 선왕은 점차 술과 여자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는데, 특히 우[笙簧(생황) : 아악에 쓰이는 관악기의 한 가지] 음악 합주를 좋아했다. 우를 부는 악대가 클수록, 그는 음악 듣는 것이 더욱 흥이 났다. 그의 정치는 부패하고 포악해져 갔다. 그의 곁에 種離春(종리춘)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추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녀의 뜻은 컸다. 종리춘은 못생겼지만, 마음이 아름다웠다. 예쁜 여자들이 추한 이름을 남긴 반면, 그녀는 향기로운 이름을 남겼다. 그녀는 선왕을 잘 보좌했다.

 

※ 鍾離春(종리춘) :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 때의 인물로, 중국의 4대 추녀 중 한 사람으로 불리운다. 눈에 붉은 반점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나라의 無鹽縣(무염현 : 현재의 산둥성 둥핑현) 출생이다. 劉向(유향)의 列女傳(열녀전)에 의하면 덕행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나이가 40살이 다 되도록 얼굴의 붉은 반점 때문에 시집을 가지 못했다 한다. 당시 제나라 왕인 선왕 田辟疆(전벽강)은 정사를 잘 돌보지 않았다. 이에 鍾無艶(종무염, 본명은 종리춘)은 제나라를 구하기 위한 마음으로 왕을 알현해 나라를 구할 방법 네 가지를 논설하였다. 이에 선왕은 감탄하여 종무염을 황후로 맞이한다. 하지만 외모는 어쩔 수가 없는 도리라, 선왕은 위급시엔 종리춘을, 태평할 때엔 미모의 夏迎春(하영춘)이란 여인을 총애했다.

 

※ 中國(중국)의 4대 醜女(추녀)

 

嫫母(막무) : 중국의 시조인 黃帝(황제)의 처. 그녀의 모습은 爺車(야차 : 모질고 사악한 귀신)와 비슷하여, 추악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4대 추녀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막무의 후덕함은 당시 여인들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시인 屈原(굴원)도 막무에 대하여는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嫫母嬌而自好(막무교이자호)” 막무의 지혜도 보통이 넘었다. 그녀의 이러한 내재적인 능력은 황제로 하여금 처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막무는 과연 황제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다른 여인들에게 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황제를 도와 염제를 격파하고, 치우를 죽였다.

 

鍾離春(종리춘) : 그녀의 이마와 두 눈은 모두 움푹 파였는데, 아래위의 비율이 전혀 안 맞고, 콧구멍은 하늘을 향하여 벌려 있고, 목에는 남자보다 큰 목젖이 있었고, 머리는 컸는데, 머리카락은 몇 가닥 없고, 피부는 검었다고 한다. 종리춘의 용모는 추했으나, 그녀의 뜻은 컸다. 당시 제선왕의 부패를 바로 지적하고, 齊(제) 宣王(선왕)은 크게 감동하여 주변에 미녀들을 물리치고 종리춘을 왕후로 삼았다.

 

孟光(맹광) : 後漢(후한)  대, 맹광은 검고 뚱뚱했으며, 용모가 아주 추하고 촌스러웠다. 힘은 대단하여 장군, 무사들이 조련할 때 쓰는 돌을 쉽게 들어올릴 정도였다. 집안사람들도 시집보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중매장이가 맹광을 한 추남에게 소개하자, 맹광은 나는 梁鴻(양홍)에게 시집갈 것이다.”고 하였다. 양홍은 당시에 매우 유명 인사였고, 문장도 뛰어나고 학식도 풍부한 미남자였다. 그러나 양홍은 맹광의 품성을 잘 알았으며, 맹광을 자신의 처로 삼았다. 후세 사람들이 말하는 擧案齊眉(거안제미)는 바로 맹광에서 유래된 것이다.

 

阮女(완녀) : 중국 삼국시대 魏(위)나라 許允(허윤)이 완녀와 결혼한 날 밤 그녀의 모습을 한번 보고는 놀라서 도망쳤다. 완녀가 허윤을 붙잡자, 허윤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서 말했다. “여자에게는 四德(사덕)이 있는데, 너는 그 중에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 완녀가 대답하기를 “난 단지 아름다운 용모만 없을 뿐인데, 당신은 선비가 가져야 할 백 가지 중에 몇 가지나 가지고 있으시오?”, 허윤은“나는 백 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완녀는 “내가 알기로는 백 가지 중에 德行(덕행)이 최고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그저 여자의 예쁜 얼굴만 좋아하고, 여자의 덕행은 좋아하지 않으니, 어떻게 모든 걸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소?” 허윤은 더 이상 말을 못하였고, 완녀의 식견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같이 살았다. 허윤은 완녀의 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평생을 서로 사랑하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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