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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백두산 너머 북간도 아리랑

 

백두산 너머 북간도 아리랑

 

중국 동북 방향에 자리 잡은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의 3성을 동북삼성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으며, 일제 강점기 항일 투쟁의 본고장이었다. 현재 약 200만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문화와 교육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여름 교사 40여 명은 일주일 일정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 선생 아드님이신 김해양 선생님, 이육사 선생 따님이신 이옥비 여사, 안중근 의사 여동생 안성녀 여사의 손자이신 권혁우 선생님 부부를 모시고 길림성의 연변 조선 자치주, 흑룡강성의 하얼빈, 요녕성의 대련 세 지역의 항일운동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우리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모시고 답사를 하게된 이유는 이랬다. 프랑스는 2차세계대전 이후 친나치 행위를 한 사람을 3만 명이나 처단하여 역사적 단죄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주도하에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눈엣가시인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은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북쪽 또한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김일성 일가 중심으로 만든 봉건적 사회주의 왕국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고 암암리 제거했다고 회자(膾炙)된다.

 

이런 불편한 역사적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교사들은 기왕지사 중국으로 항일운동 유적지를 답사할 바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모셔 그 분들께 작은 위로라도 드리자는 마음을 모았다. 본 칼럼은 그 여행에서 느낀 배움을 토대로 항일운동과 관련된 우리 음악 유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천을 떠나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 연변공항을 나서자, 한국보다 더 한국 같은 풍경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운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무용가, 상모를 돌리며 농악놀이를 하는 광대 등을 그린 그림이 공항 터미널의 벽화, 버스의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고, 길가에 세워진 조형물에서도 우리 민족 풍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변 인구의 대략 절반에 가까운 80만 정도가 우리 민족인 조선족이라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데 한국까지 가기엔 부담스런 중국인들이 많이 찾아, 현재는 거주자보다 여행 온 유동 인구가 더 많다고 하니 한류의 인기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 풍습을 담은 그림과 조형물

 

중국 영토가 된 북간도

 

앞서 이야기했듯 본디 이곳은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다. 발해 멸망 이후에 그 유민인 말갈족이 여진족이란 이름으로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초기에는 우리 조정에 조공을 바치는 등 우호적 관계 형성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들이 후금이란 나라를 세워 조선을 첫 번째로 쳐들어왔던 정묘호란 때에도 항복한 인조에게 요구한 것이 형제 관계를 맺는 것에 불과했는데, 아마도 그들 조상 역시도 고구려와 발해 백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여진족은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가장 긴 300년 왕조 청나라를 세우며 중원 땅으로 이주한다. 이 이주로 만주 일대는 비어있게 된다. 사실 고대사회부터 중세인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간의 국경이라는 것은 현대처럼 명확하게 선을 그어 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이 미치는 강역까지를 국경으로 하였으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된 이곳은 이제 누구의 영토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일찍이 백두산을 영산으로 삼고 그 일대에 터를 잡았던 우리 민족인지라 자연스레 북간도 일대에서 산삼을 캐던 조선 백성과 만주족(여진족) 사이에 갈등이 종종 발생한다. 그러자, 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4대 황제 강희제는 이 지역을 청 왕조의 발상지라며 만주족 이외에는 거주하지 못하게는 봉금령(封禁令)을 선포 한다. 이에 조선도 마지못해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지 못하게 하는 월강금지령(越江禁止令)을 내리게 된다. 이즈음에 협의한 조선과 청의 경계가 1712년 백두산경계비에 기록된다. 유목민인 만주족은 이 일대를 떠돌긴 하였으나 간도의 기름진 옥토는 여전히 비어있다시피한 상태였다.

 

조선말 세도정치의 부패한 권력들에 의해 먹고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청나라가 아편전쟁 등 국내정세가 번잡하여 간도 지역에 대한 봉금령 관리가 느슨해진 틈을 타 북간도로 이주를 시작한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한 뒤, 청은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우리 민족을 북간도로 유치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1881년에는 봉금령을 폐지한다.

 

조선도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니, 조선인의 이주는 가속화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농지로 개간한 조선인이 거주민의 80%를 점유하기 이른다. 이에 따라 조선과 청은 간도 땅에 대한 국경선을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양국은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갖지만,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경계에 대한 해석에 대한 차이로 회담은 결렬된다.

 

백두산정계비에는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경계로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청은 이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였고, 조선은 경계비로부터 수십 리 밖에 떨어져 있는 두만강이 아니라 정계비 근처 여진족들이 토문강이라고 부르는 송화강 물줄기라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주장대로 경계가 결정되면 북간도는 조선의 영토가 된다.

 

1903년(광무7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기도 하고, 압록강 건너 서간도를 평안북도, 두만강 건너 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켜 주민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주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후 우리의 외교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며 판도가 바뀐다. 처음에는 일본도 간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북간도지방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1909년 9월 4일 남만주 철도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국에 넘기는 간도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여 간도는 청나라가 점유하는 지역이 되고 만다.

 

해방 이후 1962년 10월 12일에는 북한과 중국 사이에 조중 변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에 따라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이 현재의 모습으로 획정되었고 사실상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토권이 중국에 귀속하게 되었다.

 

북간도 아리랑

 

연변은 북간도로 불리던 곳이다. 거리 곳곳 한복 입은 조형물과 즐비한 한글 간판이 마치 우리나라의 차이나타운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명절 풍습이나 음식, 윷놀이, 씨름, 농악 등 겨레의 전통을 잘 지켜나가려고 애쓰고 있다며, '우리 겨레'라는 말을 입에 달고 현지 사정을 자부심 넘치게 알려주던 가이드 호남씨의 모습이 기억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일부 한국 사람들은 연변 동포들을 무시하고 깔보고 이방인으로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 상당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며 중국 땅에서 우리 민족이란 자부심을 지켜며 살아 낸 분들임을 이해하고, 배타적으로 대할게 아니라 우리 동포라는 마음으로 더 따뜻하게 존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선조들이 이 이국땅에 정착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고단했을 삶을 생각하다 보니 ‘상주 아리랑’이 떠올랐다.

 

‘상주 아리랑’은 그 가사의 내용 때문에 ‘북간도 아리랑’이라고도 불린다. 김소희 명창이 1950년대에 작창하여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상주 아리랑’과 거의 비슷한 가사의 아리랑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부른 사실이 알려졌다. 청개구리(1970년대 포크그룹)의 가수인 김의철씨는 공연을 갔다가 그곳의 고려인이 부르는 애절한 이 ‘상주 아리랑’을 듣고는 감명을 받아 포크기타 연주곡으로 ‘상주 아리랑’을 창작하면서 알려진 것이다.  그 가사는 이렇다.

 

중모리(세마치)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 와요. 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

 

엇모리

 

문전에 옥토는 어찌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일인고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총 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말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상주에는 이 가사와 관련된 다음의 두 이야기가 전해온다.

 

먼저, 동학농민혁명 관련된 이야기이다. 죽창과 농기구를 든 농민군의 봉기가 초기에는 크게 성공하여 상주 읍성을 점거하기도 하지만, 결국, 외세의 개입으로 일본군과 관군 총포에 죽고 붙잡혀 처형된다. 그 수많았던 주검들이 상주지역 천주교 공동묘지(전라도 사투리로는 공동산) 맞은편 야산에 묻혔다. 이 공동묘지로 가는 한 서린 고갯길을 아리랑 고개라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1928년 상주지역에 거주하던 30가구가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도로 이주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가족 중 우여곡절 끝에 우즈베키스탄까지 흘러간 가족이 있었기에 지금에 우연히 알려게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김소희 명창이 작창하여 부르기 이전에도 이 사설의 상주 아리랑은 이미 불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간도 아리랑 감상(https://www.youtube.com/watch?v=lWTPR0hvq0U)

 

 

하얼빈에서 만난 천재 음악가 정율성

 

우리 일행은 고속철을 타고 연길을 떠나 아름다운 야경으로 우리를 맞이한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하얼빈역은 항일운동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한 장소이다. 항일운동의 유서가 깊은 이 하얼빈에서 필자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천재 음악가 정율성이다. 하얼빈에는 이 조선인 음악가를 기념하는 정율성 기념관이 있어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정율성(본명 부은)은 1914년 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화순의 능주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광주 숭일 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그 후 입학한 신흥학교는 부친 사망 후 중퇴한 뒤, 1933년 중국 남경으로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장이던 김원봉은 그의 음악성을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라 지어주었으며, 레닌그라드 음대 성악 교수에게 수학하도록 안내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가창에도 남다른 능력을 지녀서 그의 동료들은 그가 부른 아리랑을 들으며 고향땅에 향수를 눈물로 달랬다는 일화도 전한다.

 

정율성은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난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음악 공부를 계속하여 독창, 제창, 합창, 가곡, 동요, 뮤지컬, 노동요, 오페라, 영화음악, 교향곡 등 360여 곡을 작곡하였다. 그가 작곡한 <옌안송>은 우리의 아리랑처럼 중국인들이 널리 애창하는 곡이라 한다. 그는 중국의 3대 혁명음악가로 추앙받고,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선정될만큼 중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번 여행 일정에서 우리 일행은 큰 행운을 얻었는데, 정율성 선생 탄신 110주년 기념 음악회에 정율성의 따님이신 정소제 여사로부터 초대를 받은 것이다.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연주된 그의 음악에 우리는 감동하였다. 특히,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 6~7세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들이 선물한 아리랑 메들리 합창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랑 메들리 감상(https://youtu.be/Byxj1m7dB14)

 

사실 이 음악회에는 정율성의 고향인 광주광역시의 관계자들이 초대되었으나,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는 등 최근의 사회적 논란 때문에 불참하였다고 한다. 그간 정율성 기념사업을 매개로 이루어졌던 한·중 간의 도시 교류 사업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이데올로기적인 차이로 각기 다른 집단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는 잠재된 생각에만 그쳤을 뿐이지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기 위한 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 어느 집단이던 그들은 생각의 차이와 상관없이 오로지 목숨을 내건 항일 투쟁이라는 동일한 실천에만 매진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현재의 가치를 잣대로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을 평가하고 제단하여,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삶마저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당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은 이상적인 이데아에 불과했지 지금 우리가 배척하고 혐오하는 김일성 주체사상도 비민주적이고 인권에 폭압적인 공산당 일당독재도 아니었다.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것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내걸고 싸우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최근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하여 우리가 근대화한 것은 일본 덕이라는 망령된 주장을 하는 '뉴라이트'라는 집단이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나 할 법한 괴변을 한국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옆집 사는 깡패가 남의 집을 쳐들어가서 집기를 부수고, 쓸만한 귀금속을 갈취하고, 지들 쓰기 불편하다고 재래식 화장실을 그 집에 원래 살던 사람을 시켜서 수세식으로 바꿔놓고는 경찰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돌아갔는데, 그 집 자식이 옆집 깡패 덕분에 우리집 화장실이 좋아졌다고 고마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혹여나 우리 학생들이 이 오염된 생각에 물들까 걱정이다.

 

본 칼럼은 겨레의 독립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던 항일운동가들의 위대한 삶을 존경하는 필자의 마음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핍박의 역사 속에서 이국땅에서 불렸던 한 민족의 아리랑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광복군 아리랑(https://www.youtube.com/watch?v=giZ9oJlqkmE)

독립군 아리랑(https://www.youtube.com/watch?v=8180uriZgmo)

 러시아군의 "아리랑과 독립군가"(https://www.youtube.com/watch?v=allHFlQDczc)

연해주의 까레이스키; 박니나의 아리랑(https://www.youtube.com/watch?v=_vUDsahZhkM)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우신구, 「간도 되찾기 운동의 전개와 과제」,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석사학위, 2013

이창식, 「상주 아리랑의 전승과 가창자」, 『溫知論叢』 42권 2015, 277~301쪽

상주 아리랑의 정체성(https://khaesal4081.tistory.com/5451171)

양삼석, 「정율성의 작품세계와 사상」, 『大韓政治學會報』 30권 2호, 2022, 127~152쪽

김주용, 「정율성(鄭律成)의 생애와 항일민족운동」, 『동국사학』 51권, 2011, 329~357.

북간도 아리랑 & 혁명가의 아내, 산오락회 조애란, 아코디언 김강곤, 조선혁명선언100주년 기념공연, 독립에서 독립까지, 청주문화제조창 2023년 11월 17일

(https://www.youtube.com/watch?v=lWTPR0hvq0U)

경향신문 2024년 7월 18일자 ‘中서 열리는 정율성 탄생 110주년 기념행사 광주시 불참’

(https://www.khan.co.kr/local/local-general/article/20240718150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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