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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로 바꾸어 쓴 이규보 한시

고려의 문인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영광과 치욕의 시대를 고뇌한 시인

이규보 · 李奎報

 

 

무제(無題)

 

꽃들이 웃었는데

그 소리가 들리잖고

 

새들이 울었네만

눈물 보기 어려워라

 

바람이

아무리 분들

눈에 띈다 하리오

 

* 종장은 내가 기워서 집어넣음

 

 

시(詩) 쓰기라는 병통

 

나이 이미 일흔 넘고 삼공(三公) 벼슬 올랐으니

이제는 글 짓는 일 버릴 만도 하건마는

오호라, 아직도 이 일 내려놓지 못하네

 

아침에 노래하니 귀뚜라미 노래 소리

저녁에 읊조리니 올빼미가 따로 없네

어쩌나, 몸에 붙은 마귀 밤낮으로 따르는데

 

한 차례 붙더니만 잠시도 안 놔주니

죽고 살고 하는 것이 필시 이에 달렸구나

의원(醫員)도 나의 이 병을 고치기가 어려우리 

 

 

다음날 또 짓다

 

오히려 병중에도

술 사양을 못하나니

 

죽는 날에 가서야만

그 술잔을 놓으려나

 

깨어서

무슨 재미 있나

취중(醉中) 속에 죽으리라 

 

 

우연히 읊다

 

술이 만약 없다 하면 시(詩) 쓰기를 멈추리라

만약에 시가 없으면 술상을 물리치리

시와 술 두 가지 다 즐기니 서로 만나 걸맞도다 

 

내 손이 가는 대로 시 한 줄을 새로 쓰고

내 입이 내키는 대로 술 한 잔을 기울이네

어쩌다 딱한 늙은이가 시벽(詩癖) 주벽(酒癖) 다 가졌나

 

 

우물 속의 달

 

산속의 저 노(老) 스님

달빛을 탐(貪)했는가

 

물과 함께 항아리에

달을 길어 넣었구나

 

항아리

물을 쏟으면

달도 역시 비는 것을 

 

 

꽃이야 피든 말든

 

그윽한 골짜기에

산꽃이 활짝 피어

 

산중에 봄 왔음을

알리려 하건마는

 

그것이

무슨 관계랴

거의 선정(禪定) 들었거늘 

 

 

뒷간의 맨드라미

 

닭이 이미 꽃이 되어

저리도 아름다운데

 

민망타 어찌하여

뒷간 속에 피었는가

 

전생(前生)의

그 습관이 남아

구더기를 쪼으려나 

 

 

여뀌꽃 핀 언덕의 백로(白鷺)

 

앞 여울에 물고기와 새우들이 많고 많아

물결 뚫고 들어가서 잡을 생각 있었는데

기척에 놀라 일어났다 도로 날아 모이네 

 

목을 빼고 사람들이 돌아가길 기다리다

내리는 가랑비에 털옷이 다 젖는구나

마음은 물고기에 있는데, 기심(機心) 잊고 서 있다네 

 

* 기심(機心) : 세속의 부귀영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초연한 생활 자세

 

 

군수 몇 사람이 뇌물 때문에

 

흉년(凶年) 들어 백성들은 거의 죽을 지경이라

오로지 남은 것은 뼈와 가죽뿐이구나

몸속에 남은 살 없는데 남김없이 긁어가네 

 

그대 보라,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대도

제 배만 채운다면 더 마시지 않는 것을

묻노니, 네 놈들의 입은 과연 몇 개 달렸더냐

 

 

농부를 대신하여

 

푸르른 햇곡식은

아직 논에 자라는데

 

아전(衙前)들은 벌써부터

조세(租稅)를 거둔다네

 

농사로

부국(富國) 이루는데

껍질까지 벗겨가나 

 

 

시(詩)를 논하다

 

이런 저런 습속(習俗)들이 점차로 이루어져

사문(斯文)이 병폐 있어 거의 땅에 떨어졌네

이두(李杜)가 다시 날 수 있나, 뉘와 진위(眞僞) 분별할까 

 

무너진 터를 닦아 또 다시 쌓으려니

조그만 도움조차 주는 사람 하나 없네

혼자서 갈 수는 있겠으나 내 외침을 비웃으리 

 

* 사문(斯文) : 유교의 도의나 문화, 또는 유학자

* 이두(李杜) : 이백과 두보

 

 

눈 속에 벗을 찾았다가

 

하이얗게 내린 눈빛

종이보다 더 희길래

 

채찍 들어 흰눈에다

내 이름자 써 놓고 가네

 

바람아,

휩쓸지 마라

우리 벗님 올 때까지

 

- 2018. 12. 26(수) 23:22· 소향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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