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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신성인(殺身成仁)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살신성인(殺身成仁)

 

도의를 따르는 사람

덕스러움 갖춘 사람

 

제 목숨 지키려고

어진 일을 훼손(毁損) 않네

 

한 목숨

바쳐서라도

어진 일을 이루네

 

어의(語義) : 자신의 몸을 죽여, 어질음을 이룩함.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함.)

출전(出典) : 論語(논어) 衛靈公篇(위령공편)

 

 

儒家(유가)의 중심 사상이 仁(인)이며, 孔子(공자)가 가장 중시했던 德目(덕목) 또한 바로 그 인(仁)이었음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仁(인)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공자는 忠(충 : 충성)과 恕(서 : 용서)라고 해석했다. 쉽게 말해 타인에 대한 慈悲(자비)나 人間愛(인간애), 同情心(동정심)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인은 君子(군자)가 먼저 익혀야할 德目(덕목)이기도 했다.

 

“군자가 仁(인)을 버리고 어찌 이름을 이룰 수 있으랴?”[君子去仁(군자거인) 惡乎成名(오호성명)]

 

곧 仁(인)은 몸소 행동으로 實踐(실천)해야 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공자의 가르침 자체가 實踐道德(실천도덕)이었다.

 

물론 仁(인)이 최고의 덕목인 만큼 仁(인) 자체에는 大小(대소)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행하는데 있어 輕重(경중)과 貴賤(귀천)의 구별 또한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심지어 여기에는 生死(생사)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것이 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道義心(도덕심)이 강하고 의지가 깊은 사람[志士(지사)]이나, 仁德(인덕)을 갖춘 사람[仁人(인인)]이라면, 목숨과 仁(인)이 兩立(양립)할 수 없을 때, 생명을 아끼느라 仁(인)을 해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一身(일신)을 희생[殺身(살신)]하면서까지, 仁(인)을 實踐(실천)하지 않을까[成仁(성인)]?

 

그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志士(지사)와 仁人(인인)은 살기 위해 仁(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몸을 죽여 인을 행할 뿐이다[志士仁人(지사인인) 無求生以害仁(무구생이해인) 有殺身以成仁(유살신성인).”

 

戰國策(전국책)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군자는 제 몸을 죽여서라도 仁(인)을 이룬다. 義(의)가 있다면, 비록 몸은 죽는다 할지라도 후회는 없다[君子殺身以成仁(군자살신이성인) 義之所在(의지소재) 身雖死無憾悔(신수사무감회)].”

 

孟子(맹자)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생선도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원하는 것이지만, 둘을 함께 추구할 수 없다면 생선보다는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生(생)도 원하는 것이고 義(의)도 원하는 것인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生(생)을 버리고 義(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유명한 ‘捨生取義(사생취의)’다. 仁義(인의)가 같은 덕목일진대, 공자나 맹자는 仁義(인의)를 목숨보다도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곧 殺身成仁(살신성인)이라면 正義(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草芥(초개 : 풀과 티끌, 쓸모없고 하찮은 것)같이 버리는 것을 뜻한다. 자신이 가진 신념을 살리기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도 달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비늘만한 자비에도 인색한 게 요즘 세태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라고 달관을 한 사람이 아니면, 역시 殺身成仁(살신성인)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그래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아, 어둠과 각박한 세상에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 儒家(유가) : 孔子(공자)의 學說(학설) 또는 學風(학풍) 등을 信奉(신봉)하고 연구하는 學者(학자)나 學派(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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