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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카리오, 손흥민이 말을 해도 나가지 않았던 이유

토트넘과 아스톤 빌라, 후반전에 부상에도 필드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골키퍼 비카리오
비카리오는 이탈리아 세리에 D, C, B, A를 거치면서 바닥을 쓸고 다녔다

 

비카리오, 손흥민이 말을 해도 나가지 않았던 이유

 

2024년 3월, 아스톤빌라와 토트넘의 경기 막판, 머리에 부상을 입은 비카리오가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팀 닥터가 달려오고, 저 멀리 골키퍼 서버가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주장 손흥민이 머리 부상을 당한 비카리오에게 나가서 치료받으라고 말합니다. 비카리오는 주장의 시선을 피한 채 딴 곳을 보며 나가지 않습니다. 토트넘 주장도, 심판도, 다른 동료 선수들도 어쩌지 못합니다.

 

비카리오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던 선수였습니다. 거기서 뛰던 비카리오를 알고 있던 프리미어리그 축구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토트넘에 있는 프랑스 국가대표 골키퍼이자 토트넘의 주장이었던 요리스가 있었기 때문에 이적 시장이 열렸을 때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토트넘 주장 요리스가 벤치를 달굴 수 있겠는가, 하는 게 토트넘 팬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었고, 요리스는 카메라에서 벗어났습니다. 간간이 훈련장에서 보이기는 했지만 비카리오의 훈련 코치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적이 성사되자마자 팬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뛰던 듣보잡을 데리고 왔다고 야단들이었고, 이건 백그라운드에 파비오 패리시치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브렌트포드의 골키퍼 플렉켄과 계약하길 바랬습니다.

 

그러면 비카리오는 어떤 선수일까요?

굴리엘모 비카리오는 1996년 10월 7일, 이탈리아 북동부 우디네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네치아보다도 더 북쪽에 있는 우디네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 비카리오와 아버지 미첼 비카리오 사이에서 태어난 비카리오는 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아이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합니다. 왜냐면 비카리오의 아버지는 전직 축구 선수였던 지안프랑코 카사르사의 개인 주치의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하부 리그의 팀닥터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비카리오 어머니는 비카리오가 10살 때부터 아들이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축구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열심히 공을 보며 달려가는 아이였습니다.

 

비카리오는 원래 축구에서 공격수로 훈련하고 있었지만 TV에서 골키퍼 부폰을 본 뒤부터 골키퍼로 바꿨습니다. 키가 큰 덕에 비카리오는 골키퍼로 어울렸습니다.

 

비카리오는 16살이 되던 2013 2014시즌에 우디네세에 있는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팀 유소년으로 들어갑니다. 1911년 7월 5일에 창단된 축구 클럽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세리에 D 클럽인 폰타나프레다로 임대 계약을 맺었고, 그곳에서 그는 25회 이상 출전했습니다. 말이 25회 출전이었지 벤치를 적당히 달구다가 교체로 나가기도 했고, 막내인지라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했습니다.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비카리오는 꿈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2017년 3월 5일, 비카리오는 마침내 세리에C 베네치아로 이적했습니다. 이탈리아 무명의 클럽에서 세리에C 리그로 이적한 것은 골키퍼로서는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베네치아 클럽은 1907년에 창단된 풋볼 클럽이었습니다. 2019 2020시즌이 되자 비카리오는 다시 세리에 B 클럽인 페루자로 임대를 떠납니다. 페루자는 마라도나가 뛰었던 축구 클럽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그의 꿈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비카리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유의 근성으로 그는 쉬지 않고 훈련을 했습니다.

 

 

페루자에서 1년을 보낸 비카리오는 칼리아리로 이적합니다. 여기서 그는 벤치만 달구는 2순위였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선발 출장은 나가지 못하고 평생 2순위 골키퍼로 남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주전 골키퍼가 부상을 입었고, 2020 2021 시즌, 비카리오가 선발 출장한 네 경기 중 세 경기에 승리했습니다. 그중 리그 챔피언이었던 인테르와의 경기에서 비카리오는 환상적인 키핑을 해내며 세간에 관심을 끌었습니다. 비록 경기는 일 대 영으로 졌지만 비카리오가 없었더라면 칠 대 영, 팔 대 영이 되고도 남았을 경기였습니다.

 

그 후 비카리오는 2021년 여름, 엠폴리로 임대를 가서 2022년 1월, 850만 유로에 완전 이적을 성공시킵니다. 마침내 세리에 에이에 입성한 것입니다. 세리에 D에서 C, B, 에이까지 도장을 깨며 달려온 것입니다.

 

키가 크고 팔다리의 리치가 상당히 길며, 공에 대한 집중력이 좋아서 수비적으로 운영하는 엠폴리시절에는 상대 팀이 공격을 퍼부을 때도 집중력 있게 선방하면서 수비 안정감이 좋았습니다. 집중력이 좋다 보니, 1대1 찬스에서도 안정적이고 펀칭이 다소 불안정할 때가 있지만 리바운드 볼을 잘 막아냈습니다. 다리나 허벅지로도 심심찮게 공을 걷어냈습니다.

 

과거에는 빌드업 전개에서 큰 지적을 받았으나 이를 인지하고 훈련을 통해 발밑과 킥을 연습한 결과, 비카리오의 롱 킥이 엠폴리의 빌드업의 한 축을 맡았을 정도로 빌드업에 있어서도 준수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압박을 당하는 순간에는 무모한 패스를 시도하지 않고, 성공률 높은 패스로 확실하게 공을 처리했습니다.

 

비카리오는 엠폴리에서 31경기 출전, 97세이브, 실수 1개, 7개의 클린시트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또 세리에 에이에서 6개의 페널티킥 중 2개를 막아냈습니다. 반면 토트넘의 골키퍼 휴고 요리스는 프리미어 리그 25경기에 출전해 79세이브, 네번의 실수, 일곱 번의 클린 시트를 유지했으며, 39골을 허용했습니다. 또 한 번의 페널티킥을 막지 못했습니다.

 

비키리오는 매우 현대적인 골키퍼였습니다. 공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비카리오는 지난 시즌 세리에 A 전체에서 7번째로 정확한 롱볼 패스를 성공시켰습니다. 이는 공격축구를 구사하는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선호하는 골키퍼였습니다.

 

 

요리스의 대체자를 찾던 토트넘은 비카리오를 천 칠백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비카리오의 연봉은 주당 칠만오천유로에 달하며 이는 세리에A에서 받던 연봉의 네 배에 달했습니다. 세리에 B, 세리에 C, 세리에 D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길고 짧은 패스를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하는 포스테코글루 감독 체제에서는 리그 초반에 호흡이 맞지 않아 몇 차례 빌드업 미스가 있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수록 준수한 패스 성공률로 토트넘 빌드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대 축구 골키퍼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능력치를 두루 갖춘 육각형 골키퍼로, 골키퍼의 기본 소양인 특출난 반사 신경과 운동 능력, 깔끔한 핸들링, 뛰어난 집중력에서 나오는 안정감, 준수한 빌드업, 스위핑 능력 등 필요한 것들은 전부 갖췄습니다. 이중 가장 뛰어난 능력은 단연 선방 능력입니다. 긴 팔다리를 이용한 역동적인 선방을 자주 구사합니다. 땅볼로 깔려오는 공은 마누엘 노이어처럼 다리를 길게 뻗어서 막는 풋 세이브를 자주 시도하고, 공중에서 날아오는 어려운 궤적의 슈팅을 손가락을 뻗어 막아내는 핑거 팁도 종종 선보입니다.

 

다만 프리미어 리그에 입성한 뒤로 스위퍼 형 골키퍼의 플레이를 펼치다 보니 경기력이 상당히 리스키해졌습니다. 박스 밖으로 나설 때 종종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는데, 빠르게 공을 걷어내려고 하다가 상대에게 소유권을 내주는 패턴이 꽤 있었습니다. 토트넘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현재 비카리오의 유일한 불안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카리오의 별명은 소시오패스적 적대자인 베놈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비카리오는 따뜻한 사람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비카리오는 우크라이나에서 떠나온 어머니와 11살 밀란이라는 소년에게 자신이 살던 집을 피난처로 제공했습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소년이 축구에 관심을 갖자 비카리오는 그를 축구 아카데미에 등록시켰습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닐 텐데 비카리오는 그들에게 상처 대신 희망을 선물해주기로 한 것입니다.

 

“가족을 만나러 우디네로 돌아오면 11살 밀란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밀란은 학교에 갈 예정이고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전쟁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그가 기분이 좋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미소를 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이 자기 나라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비카리오의 마음에는 지난 시절 자기 모습이 투영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동네 축구, 바닥 축구를 쓸고 다녔던 비카리오였기 때문입니다. 성공과는 거리가 먼, 절망의 세월을 걷고 또 걷던 자기 모습과 11살 밀란의 모습이 비슷해 보였을 것입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닥이었습니다. 이 바닥이 저에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도전의 과정을 베놈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이겨냈습니다.”

26세의 비카리오는 토트넘의 프리시즌 투어 중 어린이 코칭 세션에 참여해서 영어로 말했습니다. 이는 비카리오가 베네치아, 칼리아리, 페루자, 엠폴리 등에서 경험한 현지 워밍업 친선 경기와 달랐습니다.

 

“스퍼스는 빅클럽이기 때문에 적응이 필요합니다. 이 클럽은 팬이 너무 많아서 그 전에 뛰었던 팀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리에 D에 있을 때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2024년 3월, 아스톤빌라와 토트넘의 경기 막판, 머리에 부상을 입은 비카리오가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장 손흥민이 머리 부상을 당한 비카리오에게 나가서 치료받으라고 하지만 비카리오는 딴 곳을 보며 나가지 않습니다. 세리에 D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벤치를 달구다가 어쩌다 얻은 기회로 여기까지 왔는데, 자신이 지키던 골대를 결코 쉽게 내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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