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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점점 사라져가는 ‘국악’에 나는 이렇게 소망한다.

 

점점 사라져가는 ‘국악’에 나는 이렇게 소망한다.

 

나는 나름 음악을 즐기거나 안다는 사람들이 "국악은 무겁고 지루하고 고루하며 이해하기 힘들며, 전공자들이나 나이 드신 분 또는 생활 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듣는 옛날 음악이다."라 하고, 국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도 ‘국악은 쉽거나 가벼운 국악부터 시작하여 어려운 국악에 익숙해져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서글프며 안타깝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서양음악과 현대 대중음악은 무겁고 지루하고 고루하며 이해하기 힘들지 않으며 처음 접했을 때부터 가볍고 쉽고 즐거워서 우리에게 익숙해졌을까?

 

그냥 늘 생활 속에 함께 해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는 것이 내가 아는 음악의 표준이며 기준이기에 색다른 음악은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고 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 색다른 음악 속에 ‘국악’이 포함되어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취하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현실이 되어 버렸고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지 못하고 불편함이 더 많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후유증으로 많은 ‘국악’을 잃어버렸고, 100여년 넘는 시간 동안 서양음악과 교육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국악의 다양성을 축소했으며 우리가 만든 한계에 갇혀 버린 것이다. 여기에 ‘국악’을 바르게 알리고 보급해야 하는 사명 앞에서 운용의 미와 노력의 부족으로 오늘과 같은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생활 속에 국악이 함께 하는 진도(珍島)가 고향이기에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국악을 들을 수 있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도 나무막대를 꺾어 세숫대야를 두들기고 입으로 진도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노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배우기 시작한 서양음악과 산업발달과 함께 급속도로 전해지는 대중음악에 밀려 국악은 점점 잊혔고, 모차르트, 바흐와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잭슨, 남진, 조용필, MBC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학가요제, 클래식, 팝송, 째즈가 더 친숙하고 가까이 있었다. 국악은 어쩌다 고향집에 가면 아버님 녹음기에서 흘러나왔고 이 땅에 노동운동이 시작되면서 듣기 시작한 사물놀이 소리가 거의 전부였다.

 

20여 년 전 중년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국악방송>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국악’은 모태 음악으로 내 몸 속에 익숙하게 잠재되어 있던 ‘국악’을 깨우고 잊진 시간을 되돌려 주었으며 잃어버린 ‘국악’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24시간 오직 국악에 빠져 사는 절대 마니아(mania)는 아니다.

 

다만 현대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국악’이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에서 국악을 우선하여 가르치고 생활화하여, 국악이 세계음악 속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한 줌 힘을 더하고 싶고, 단 한사람이라도 더 ‘국악’을 바르게 알고 즐기며 함께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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