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타임즈 관리자 기자 |
시조로 바꾸어 쓴 황순원의
소 나 기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마자
윤 초시네 증손녀임을 금방내 알아챘다
소녀는 개울이 신기한 듯 물장난을 하고 있다
며칠째 이어지는 하교길의 물장난을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한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비키기를 기다릴 뿐
다음날 조금 늦게 개울가로 나왔더니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는
마냥 흰 목덜미 보이며 낯을 씻고 있었다
분홍색 스웨터를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물 속 빤히 들여다보다 갑자기 물을 움켜
물고기 새끼를 잡는 듯, 허나 매번 허탕이다
물 움키는 그 재미에 자꾸 물만 움켜대니
소년이 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건너는 사람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소녀가 물 속에서 무얼 하나 집어든다
조약돌 하나를 들고 징검다리 건너더니
‘이 바보!’ 소리를 치면서 소년 향해 던진다
갑작스런 조약돌에 소년이 놀랐는데
단발머리 나풀나풀 소녀 그냥 막 달린다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갈꽃들만 빛난다
사라진 소녀 모습 나타나길 기다리나
오랜 시간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더니만
저 멀리 갈밭머리에서 꽃 한 움큼 움직인다
유난히도 맑은 햇살, 갈꽃 머리 반짝반짝
들길을 걷는 것은 소녀인가 갈꽃인가
갈꽃이 안 보일 때까지 소년 그냥 서 있네
아까 던진 그 조약돌 생각 나 내려다보니
시간이 흘렀는가, 물기가 싹 걷혀 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날 좀 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더니
소녀의 그림자가 오늘 따라 안 보인다
한편은 다행이다 싶은데 이상하게 허전하다
소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수록
소년의 맘 한 구석 허전함이 자리잡아
조약돌 자꾸 주무르는 새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며칠 뒤에 개울 다시 찾은 소년
소녀가 앉아 놀던 징검다리 앉아 보고
물 속에 손을 잠그고 세수까지 해본다
물 속을 들여다보니 비치는 얼굴 하나
검게 탄 자기 얼굴 그 얼굴이 정말 싫다
물 속에 비친 얼굴을 몇 번이고 움킨다
그러다 깜짝 놀라 소년이 일어났다
소녀가 이 쪽으로 건너오고 있지 않나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다 엿보고 있었는가
소년은 막 달렸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빠졌지만 부끄러워 더 달렸다
제 몸을 가릴 데라도 있어 줬음 좋겠다
하지만 이 쪽 길엔 메밀밭만 펼쳐 있다
전에 없이 메밀꽃 냄새 콧속에서 짜릿짜릿
미간이 아찔하더니만 코피마저 흐른다
코피를 훔치면서 소년이 그냥 뛴다
어디선가 들리는 듯, ‘바보, 바보!’ 그 목소리
소녀가 외치는 소리 자꾸 뒤를 따른다
얼마 후 토요일 날 개울가에 다다르니
며칠째 보이잖던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년은 모르는 체하며 징검다리 건넌다
며칠 전 소녀 앞에서 실수 한 번 했었을 뿐
여태껏 큰 길 가듯 자신 있게 건넌 다리
오늘은 그 징검다리를 조심 조심 건넌다
“얘” 하고 부르는 소리, 소년은 못 들은 척
둑 위로 올라서니 소녀가 또 말을 건다
“얘, 이게 무슨 조개지” 소년은 곧 돌아선다
소년은 마주쳤다, 맑고 검은 소녀의 눈
그 눈길 못 이기어 소년 눈을 떨구었다
소년이 “비단조개”라 하니 “이름 곱다” 놀란다
갈림길 다다라서 헤어지려 하였는데
“저 산 너머 가 봤느냐” 벌 끝을 가리킨다
소년이 가 본 일 없다니 함께 한 번 가잔다
“시골에 와 보니까 심심해 못 견디겠다”
멀더라도 가보고 싶다, 간절한 소녀 마음
소녀가 ‘바보, 바보’ 할까봐 논 사잇길 들어선다
가을걷이 하는 논길, 벼 지키는 허수아비
소년이 장난치며 새끼줄을 뒤흔드니
몇 마리 참새들 놀라 하늘 위로 오른다
“텃논 참새 봐야 할걸” 소년은 걱정인데
허수아비 줄을 잡아 소녀가 흔들어대니
자꾸만 우쭐거리며 춤을 추는 허수아비
“야, 재밌다” 외치면서 웃음 짓는 소녀 얼굴
소녀의 왼쪽 볼엔 살포시 패인 보조개
소녀가 달리는 뒤를 소년 따라 달린다
메뚜기가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치니
한껏 갠 쪽빛 하늘 눈 앞에서 맴을 돈다
저 놈의, 저 놈의 독수리 맴을 돌기 때문이다
소년이 돌아다보니 소녀 계속 장난이다
소년이 지나쳐 온 허수아비 뒤흔드니
전보다 허수아비가 더욱 신나 우쭐댄다
논길이 끝난 곳에 도랑이 하나 있고
도랑을 건너뛰면 산 밑까지 밭이 한참
수숫단 세워 말리는 밭머리를 지난다
“저게 뭐니” 소녀 묻자 “원두막” 소년 대답
“여기 참외 맛이 있니, 하나 먹어 보았으면”
“참외도 맛이 있지만 수박 맛은 더 좋다”
참외 그루 사이에 심은 무우밭에 들어가서
아직은 밑이 덜 든 무우 두 밑 뽑아왔다
이파리 비틀어 팽개치고 소녀에게 건넨다
이렇게 먹어야 해, 대강이를 한 입 문다
손톱으로 한 돌이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저적 깨물어 무니 소녀 같이 따라한다
하지만 곧 “맵고 지려” 소녀가 내던지니
“참 맛없어 못 먹겠다” 소년도 내던진다
소년이 소녀보다 더 아주 멀리 팽개친다
먼 산이 가까워지니 단풍이 눈 따갑다
“야-아!” 소리치며 산을 향해 뛰는 소녀
이번엔 소녀의 뒤 따라 달리지를 않는다
그러고도 소녀보다 더 많은 꽃 꺾어왔다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것은 도라지꽃”
소녀가 도라지꽃 보며 보랏빛이 좋다 했다
“양산같이 생긴 이 꽃, 노란 꽃이 무엇이지”
“마타리꽃” 대답하니 양산 받듯 해 보인다
상기된 소녀의 얼굴 보조개를 떠올린다
소년은 꽃 한 움큼 다시금 꺾어와서
싱싱한 꽃가지만 소녀에게 건네주니
“하나도 버리지 마라” 소년에게 이른다
산마루께 올라서니 오순도순 초가집들
소년 소녀 나란하게 바위 위에 걸터앉으니
유달리 조용하였다, 풀 내음만 더 짙다
“저것은 또 무슨 꽃?” 칡덩굴을 가리킨다
“서울 학교 등꽃 같다, 놀던 동무 생각난다”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비탈진 곳 내려간다
꽃송이가 많이 달린 칡 한 줄기 끊으려고
안간힘 써보지만 끊어지지 않는 덩굴
갑자기 미끄러지니 소년 놀라 달려간다
소녀가 손 내밀어 잡아 끌어 올리면서
소년은 뉘우친다, “내가 꽃을 꺾어줄 걸”
소녀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맺혔다
소년은 급한 김에 생채기에 입술 대고
무릎에 맺힌 피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선지 저 쪽으로 달려간다
숨차서 돌아온 소년, 송진을 가져 왔다
“바르면 곧 낫는다” 생채기에 발라주고
달음에 꽃 많은 몇 줄기 맨 이빨로 끊었다
“송아지가 저기 있다, 그리로 같이 가자”
코뚜레도 꿰지 않은 아직 어린 누렁송아지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에 훌쩍 올라탄다
깜짝 놀란 송아지가 껑충껑충 돌아가니
소녀의 하얀 얼굴, 분홍색 스웨터며
소녀의 남색 스커트가 꽃과 함께 범벅이다
모두가 큰 꽃 묶음, 어지럽고 힘들지만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하고 싶어진다
소녀는 할 수 없는 일, 소년만이 할 수 있다
“예서 뭣들 하느냐”며 한 농부가 올라온다
송아지 다친다고 꾸짖을 줄 알았더니
나룻 긴 착한 농부는 “소나기 올라” 일러준다
한 장의 먹장구름 머리 위에 와서 있다
사면이 소란터니 우수수 바람 소리
삽시간 주위가 온통 보랏빛으로 바뀐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빗방울 듣는 소리
굵어진 빗방울에 목덜미가 선뜻선뜻
대번에 눈앞 가로막으며 쏟아지는 빗줄기
비안개 속 바라보니 원두막이 저기 있다
내리는 비 그을 곳이 그 곳밖에 없었지만
기둥은 이미 기울고 지붕마저 갈래갈래
빗물이 덜 새는 곳에 소녀가 서 있지만
입술은 파아랗고 두 어깨를 자꾸 떤다
소년이 무명 겹저고리로 소녀 어깨 싸준다
눈을 들어 쳐다볼 뿐, 소녀는 가만 있다
소년이 하는 대로 잠자코 내맡기며
안고 온 꽃 묶음 속에서 꺾인 가지 버린다
소녀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하니
더 이상 비를 그을 자리가 못 되는가
소년이 무슨 생각에선지 수수밭 쪽 달려간다
세워 놓은 수숫단을 비집어 보더니만
옆에 있는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그리곤 소녀를 보고 이쪽 향해 손짓한다
어둡고 좁은 것이 조금은 안 됐지만
다행히도 수숫단 속 빗물이 새지 않네
소년은 수숫단 밖에서 비를 그냥 맞는다
소년의 어깨에선 더운 김이 모락모락
소녀가 속삭이듯 들어와 앉으란다
소년이 괜찮다 했지만 다시 이리 오란다
할 수 없이 뒷걸음쳐 단 속으로 들어가니
소녀가 안고 있는 꽃 묶음이 망가진다
하지만 소녀는 속으로 상관없다 여긴다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 훅 끼쳤지만
소녀는 그렇지만 고개를 안 돌렸다
오히려 소년의 몸 기운에 떨던 몸이 눅었다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 뚝 그치며 멀개지니
수숫단 벗어나와 하늘을 바라본다
햇빛이 눈이 부시게 내리붓고 있었다
도랑에 다다르니 물이 엄청 불어 있다
빛깔마저 제법 붉어 흙탕물이 철철철철
뛰어서 건널 수 없으니 소년 등을 돌려댄다
소녀가 마다 않고 순순히 업히었다
소년의 잠방이까지 도랑물이 올라오니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 목을 꼭 안는다
개울가 가까워지니 하늘이 웃고 있다
그 언제 그랬나 싶게 푸르른 가을 하늘
흰구름 한 점도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다
그 후로는 소녀 모습 통 보이지 않는구나
매일같이 개울 가로 달려와 보았지만
소녀는 보이지 않네, 만날 수가 없구나
학교에서 쉬는 시간 운동장을 살펴보고
학년 여자 반을 남 몰래 엿봤지만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만나볼 수 없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면서
개울가로 나왔더니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년은 가슴부터 울렁, 두근두근 뛰었다
“그동안 앓았었다” 해쓱해진 소녀 얼굴
“그 날의 소나기 탓” 소년은 걱정이 크다
소녀가 아주 가만히 끄덕인다 고개를
“인제는 다 났냐”고 소년이 물었더니
“아직도” 말 흐리는 소녀의 낮은 소리
너무도 갑갑했단다, 그 날 재미 있었단다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스웨터 앞자락을 소녀가 내려다본다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 있는 스웨터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보는 소년에게
무슨 물 같으냐고 소녀가 물어온다
소녀의 하얀 얼굴엔 보조개가 떠오른다
“참 내가 생각해냈다” 소녀가 알려 준다
“도랑을 건너면서 업힌 일 있지 않니”
“네 등서 옮은 물이야!” 소년 얼굴 화끈 단다
갈림길 들어서며 소녀가 대추를 준다
“오늘 아침 대추 땄다, 내일 제사 지내려고”
대추를 한 움큼 내주니 소년 그저 주춤한다
“맛 봐라, 아주 달다, 증조부가 심었단다”
소년은 손 오그려 “참 알 굵다!” 손 내미니
소녀는 머뭇거리면서 집안 사정 알려준다
제사를 지낸 뒤에 사는 집을 내준단다
이사를 오기 전에 어른들께 들은 얘기
소년은 알고 있었다, 윤 초시네 손자 얘기
하던 사업 실패하여 서울 살이 끝을 내고
고향으로 왔다는 걸 소년은 들었었다
이번엔 고향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는가
“왜 그런지 싫어졌어, 이사를 가는 것이
어른들이 하시는 일 어쩔 수 없지마는”
소녀의 까만 두 눈엔 쓸쓸한 빛 돌았다
소녀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며
이사를 간다는 말 수도 없이 되뇌인다
무엇이 그리 안타깝거나 서러울 건 없었다
그렇건만 이상하다, 왜 그런지 이상하다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조차
소년은 지금 모르고 있다, 대추 맛을 모른다
소년은 이 날 밤에 호두밭에 가만히 갔다
덕쇠네 할아버지 호두밭에 몰래 갔다
대낮에 봐두었던 나무 작대기로 후려친다
떨어지는 호두송이 그 소리가 별나게 커
가슴이 선뜩했지만 무슨 힘에 끌렸는지
호두야 많이 떨어져라, 작대기를 내리친다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림자만 디디자니
그늘의 고마움을 난생 처음 느껴본다
불룩한 주머니 만지니 온몸 가득 뿌듯함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 오르기 쉽지마는
그 말이 무슨 대수, 그딴 말은 상관없다
근동서 제일 가는 호두 소녀에게 주고플 뿐
그러다 ‘아차’ 했다, 왜 말을 안 했을까
병이 좀 낫거들랑 개울가로 나와 달라
이사를 가기 전에 한번 만나자고 못 했는가
이튿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소년의 아버지가 나들이옷 갈아 입고
품에는 닭 한 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소년이 물었지만
그 말에는 대꾸 없이 닭 무게만 겨냥한다
어머니 망태기 내주며 “살은 쪘다” 웃는다
소년이 궁금하여 어머니께 물어보니
서당골 윤 초시댁 제사상에 놓는단다
소년이 한 마디 툭 한다, “큰 놈으로 가져가지”
아버지 허허 웃고 “이게 더 실속 있다”
소년은 하 열적어 책보를 내던지고
외양간 쇠잔등 갈긴다, 쇠파리라도 잡는 듯
개울물이 날로 날로 여물어 가던 날에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을 가 보았다
저 멀리 서당골 마을이 오늘따라 가깝다
어른들 하는 말로 소녀 소식 들어보니
내일이면 양평읍으로 이사를 간다 한다
거기서 조그만 가겟방 보게 된다 하였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호두알을 만지면서
한 손으론 수도 없이 갈꽃을 꺾고 있다
그 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내내 같은 생각뿐
내일 정말 소녀네가 이사를 하는 걸까
이사를 가는 것을 가 볼까 안 가 볼까
간다면 소녀를 볼까, 혹은 볼 수 없을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 들었나 하였는데
“허 참, 세상일도” 아버지가 혀를 찬다
마을서 언제 돌아왔는지 마을 소식 전한다
“많던 전답 모두 파니 윤 초시댁 말 아니야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넘기더니
게다가 악상까지 당했네” 아버지가 쯧쯧쯧
바느질감 안고 있던 어머니도 거들었다
“증손녀 계집애도 그 애 하나뿐이었죠”
“그렇지, 둘 있던 사내애 어려서들 잃었고”
“어쩌면 자식 복이 그렇게도 없을까요”
“여러 날 앓는 것을 약도 한번 못 썼다네
그러니 지금 같아선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잖아
죽기 전 계집애가 이런 말을 했다잖아
죽거든 꼭 내 입던 옷을 그냥 입혀 묻으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