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16]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살다보니 4
무대라는 무덤
선생의 노후는 무대와 병원을 오가는 쳇바퀴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입원이었던 수원의 병실을 찾았더니 선생께서 야심차게 준비하시던 다음 해 공연에 쓸 엇중몰이신칼대신무 신칼의 너슬을 접고 계셨다. 이번에 퇴원하면 그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엇중몰이신칼대신무를 더 새롭게 더 멋지게 추겠다고 별렀던 말씀을 기어코 하셨다.
그즈음 선생의 병세는 점점 나빠지고 있던 터라 너슬을 접는 일마저 여사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그 몸으로 무대에 섰다간 죽어요.” 하는데 여사의 말씀을 곧바로 받아 “그럼 좋지. 나는 무대에서 죽고 싶다.” 하신다. 나는 더는 무대에 서지 못 하고 마치 전의를 다지듯 새롭게 추겠노라 하셨던 엇중몰이신칼대신무를 추지 못하신 선생을 아직도 서러워한다.
그런데 왜 예인들은 너나없이 무대에서 생을 마칠 수 있기를 소망하는가? 이 소망은 막연한 소망이 아니다. 부디 그리 이루어지기를 절절히 바라는 절대적인 외침이다. 나는 선생을 통해 똑똑히 알았다. 선생의 삶 속에는 재인청 춤이 아닌 그 어떤 삶의 여정도 자신의 삶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말과 생각과 시간이 오롯이 재인청 춤에만 바쳐진 삶, 오로지재인청 춤을 제대로 추기만을 원했던 여정만이 자신의 삶이었다.
그렇게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문하생들이 지정 문화재가 아니라고 자신의 곁을 떠나기만 할 때도, 심지어 역마살이 팔자라시던 선생께서 여사를 맞이하고 정착 생활을 감행했던 것도 자신이 이룬 재인청 예맥의 성취를 이어받을 수 있는 제자를 기다리고 기르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재인청 춤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게 되고 드러내면서 선생은 자신의 일생을 무대 위에 바쳤고 자신의 유업을 이어받을 제자를 찾아 혼신을 기울였던 분이다.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돌고돌아 자신을 찾아온 재인청 예맥을 받아들이고 다시 순환시키는 의무가 전부였던 삶. 덕분에 선생께선 재인청 춤의 명인이었고 재인청 예혼의 역사를 짊어지고서 그 무거운 책임에 시달려야 했던 고단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나 역시 선생과 같은 책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책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런 독백을 하곤 한다. ‘이동안은 재인청 춤의 귀거래사였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이 땅의 모든 우리 춤꾼들은 무대에 설 기운만 있다면 그 누구도 은퇴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대에서 춤을 추다 죽기를 바란다. 바꾸어 말하면 무대에 서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춤꾼으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산다. 이동안 선생 또한 ‘나는 무대에서 죽고 싶다’는 말씀을 달고 사셨다.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라. 진쇠춤을 추고 있는 이 사진 속의 공연에서 선생의 연세는 팔순을 앞두고 계셨다. 그럼에도 두 발을 모두 모으고 오금을 한껏 구부린 팽팽한 긴장이 보이시는가. 그러면서도 오색의 꽹과리채를 휘돌리며 만면에 띄우는 저 미소를 보았다면, 어찌 저 경지와 객석이 완벽하게 소통하는 공감의 엑스터시를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춤꾼이라면 마땅히 무대에서 죽기를 소망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동안 선생과 밀양북춤의 하보경 명인과는 갑장으로 오랫동안 춤길을 함께 걸으신 춤벗이었다. 두 분께서 함께하신 이 공연의 무대에 오르신 두 분의 춘추가 구순을 앞둔 시기였다. 당시 하보경 선생은 분장실에서 일어서지를 못해 아드님이 안고 무대에 올랐는데 춤의 모든 순서를 끝까지 추셨다. 한 번은 남도의 강송대 명창께서 우리 무대에서 구음을 하시기로 하고 오셨으나 여러군데 임플란트 시술을 하시는 바람에 붓기에다 멍이 들어 소리가 될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걱정이 태산이셨다. 무대를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안 될 줄 알았는데 하니 되데.” 무대에서 죽겠다는 말씀들은 오히려 사실 무대에 서면 기운이 나서 살만하다는 역설일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