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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溫故知新)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 익혀 새것 알면

비로소 스승일세

 

옛것과 새것 사이

긴밀한 관련 있어

 

옛것과

새것을 알아야

참스승이 되리라

 

어의(語義) :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앎.

                (옛 학문을 연구하고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이해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출전(出典)① : 論語(논어) 爲政篇(위정편) 十一(십일)

 

 

孔子(공자)가 爲政篇(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溫故而知新 (온고이지신) 可以爲師矣(가이위사의)].”

 

남의 스승이 된 사람은 古典(고전)에 대한 博識(박식)만으로는 안 된다. 즉 고전을 연구하여 거기서 현대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中庸(중용)에도 나오는데, 鄭玄(정현 : 중국 후한의 경전 연구 학자)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溫(온)’은 ‘옛 것을 익힌다.’는 뜻이다. ‘처음 배운 것을 익힌 뒤에 거듭 반복해서 익히는 것’이 ‘溫故(온고)’라고 한다.”

 

또한 周子(주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배움에 있어 예전에 들은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익히고, 언제나 새로 터득함이 있으면 배움에 대한 응용이 끝이 없게 된다[溫故知新(온고지신)]. 따라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입으로만 알고 묻는 학문이라면, 마음에 터득함이 없으므로 아는 데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또 禮記(예기)의 學記(학기)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記問之學(기문지학 : 피상적인 학문)은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하다[記問之學(기문지학) 不足以爲師矣(부족이위사의)].”

 

지식을 암기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실로 ‘溫故知新(온고지신)’과 表裏(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고전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고전의 현대적 의의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에 고전 학습의 意義(의의)가 있는 것이다.

 

옛것과 새것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옛것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오늘의 새로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새로운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장차 닥쳐올 사태에 올바른 판단을 세워 대처할 수 없는 것이다. 古典(고전)의 근본정신을 잘 알아서, 새 지식을 바르게 인식하면 스승이 될 수 있다. 곧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관련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는, 남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말이 된다.

 

※ 鄭玄(정현, 127 ~ 200) : 중국 後漢(후한)의 經學者(경학자). 字(자)는 康成(강성). 北海(북해) 高密(고밀 : 지금의 산둥성에 속함) 사람이다. 세칭 ‘後鄭(후정)’이라고 하여, 鄭興(정흥) ‧ 鄭衆(정중) 부자와 구별했다. 일찍이 太學(태학)에 들어가 今文(금문 : 한대에 보통으로 쓰이던 문자) 易(역)과 公羊學(공양학)을 공부했으며, 張恭祖(장공조)로부터 古文尙書(고문상서) ‧ 周禮(주례) ‧ 左傳(좌전) 등을 배웠다. 마지막으로 馬融(마융)에게서 古文經(고문경)을 배웠다.

 

정현은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연구와 교육에 진력했는데, 제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는 44세 때‘黨錮(의) 禍(화)’로 인해 禁錮(금고) 14년에 처해지자 저술에 전념했다. 古文經說(고문경설)을 위주로 삼고 今文經說(금문경설)도 받아들여 여러 경서에 주석을 달아 漢代(한대) 경학을 집대성했으며, 鄭學(정학)으로 불렸다. 고대의 역사 문헌을 정리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周官(주관 : 고대의 예법에 관한 3권의 책 가운데 하나. 周禮라고도 한다)을 진짜 周(주)의 제도라고 여기고, 여기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모두 殷(은)의 제도로 置簿(치부 : 그렇다고 여김)했다. 禮(예)로써 詩(시)에 주석을 달아 牽强附會(견강부회)한 곳이 많다.

 

 

출전(出典)② : 中庸(중용) 第二十七章(제이십칠장)

 

 

크도다, 성인의 도여. 아래 글 두 구절을 포괄해서 말하였다. 넘실넘실 만물을 발육하여, 높기는 하늘을 다하였다. 준은 높고 큼이다. 이것은 말하건대, 도가 지극히 큼을 다하여 밖이 없다는 것이다. 넉넉하고 넉넉해서 크도다. 禮儀(예의)는 삼백편이요, 威儀(위의)는 삼천편이로다. 優優(우우)는 충족하여 남음이 있는 뜻이다. 예의는 經禮(경례 : 관혼상제의 예)이고, 위의는 曲禮(곡례 : 예의 세칙)이다.

 

이것은 도가 지극히 적은 부분까지 스며들어 빈틈이 없음을 말하였다.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하여진다. 위의 두 절을 총결하였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진실로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지극한 도는 이에 모여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하였다.

 

至德(지덕)은 그 사람을 이르며, 至道(지도)는 위 양절을 가리켜 말하였다. 凝(응)은 모이는 것이며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 받들고 문학으로 말미암으니, 광대함에 이르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도에 말미암고, 옛 것을 익히며 새 것을 알며, 두터움을 돈독히 하여 예를 높이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이 되어서도 어긋남이 없는 터라, 나라에 도가 있으면 그 말이 족히 흥기될 것이요, 나라에 도가 없으면 그 침묵이 족히 용납할 것이니, 시경에 가로되 ‘이미 밝고 또 밝아서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니 그것이 이를 이른 것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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