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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19]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19]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춤이 된 인생

 

3. 허탈과 항변

 

춤을 추는 선생은 그게 어떤 춤이든 예외 없이 멋이 줄줄 흘렀다. 풍류란 이런 거다 싶었다. 그런데 춤을 추지 않을 때의 선생은 현실에서 비켜 앉은 듯 가만히 있기만 하시는데, 괜히 눈치가 보여서 얼른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선생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춤을 출 때가 아니더라도 어딘가 활달한 모습이 감지되는 게 아닌가. 가만히 보니 공연을 준비하거나 공연 직후의 며칠, 또는 함께 공연의 합을 이루는 재인청 악사들과의 대화를 엿보았더니 위트와 품격이 넘쳤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카리스마. 선생은 분명 두 개의 차원에서 살고 계셨다. 침묵의 공간에서 춤의 공간으로 건너다니시는 삶.

 

나는 이런 선생의 이중생활이 그렇게 신기했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멋있었다. 하루는 여쭈었다. 왜 발탈은 배우라 하지 않으시냐고. 그런데 전혀 뜻밖의 반응이 쏟아졌다. “나는 탈꾼이 아니야. 춤꾼이라고!” 극한 분노가 갑자기 사그라지고 고통스러워하셨다. 심지어는 살짝 눈물까지 보이신다. 이어지는 한탄, “발탈 먼저 받고 나중에 태평무를 받자는 말에 속았어.” 발탈 이야기는 여지없이 선생을 분노와 항변을 오가게 했다.

 

대전의 움막에서 발견된 선생은 온양을 거쳐 건강을 회복하고 상경하여 교습소를 운영하게 된다. 이 시기에 심우성 민속학자와 학술적 교류를 나누고 있던 중앙대의 정병호 교수는 선생의 ‘발탈’과 ‘재인청 태평무’를 무형문화재 지정하기 위해 사전 조사에 착수한다. 두 종목 모두 보고서가 작성되었으나 발탈만이 지정되고 만다. 발탈은 그 연희 방식과 형태의 특이성과 함께 창과 재담, 그리고 춤 등이 한데 어우러져 서민의 희로애락이 잘 드러난 종합가무극이었고 국문학적 자료로서도 소중하다는 평가를 받은 게 선정의 이유였다고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80년대의 대학가에서는 탈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독재에 맞서 싸우는 민중의 춤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우리의 전통들이 젊은 민주 전사들에 의해 오랜 폄훼와 천대를 벗어던지고 기지개를 켰다. 마침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날개를 달아주었다. 알려진 탈춤과는 현저히 다른 스타일과 특이한 연희 방식이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1983년이었다. 국가 무형문화재 79호, ‘발탈’ 예능보유자 이동안, 우리가 흔히 일컫는 인간문화재가 된다. 그런데 이 타이틀은 어처구니없게도 ‘춤꾼 이동안’으로 살아내신 80년 춤 인생의 가치를 몰라보게 만드는 훼방꾼이 되고 만다. 발탈꾼에게 춤을? 재인청 춤은 발탈로 인해 제도적 방해를 받게 된 것이다. 남사당패를 따라 줄타기를 배웠던 이력으로 선생을 일러 ‘마지막 남사당’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노기 등등했던 바, 이도 모자라 발탈 재주를 부리는 ‘발탈꾼’이라는 타이틀은 모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의 내 질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선생의 모습을 만나게 했다. 어떤 경우에도 멋과 고요가 콘셉이었던 선생은 마치 분풀이하듯 교습에 모든 것을 쏟았고 나는 선생의 허탈과 항변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어야 했다.

 

“내가 안 하면 끊긴다고 해서 발탈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지만 사실 나는 춤꾼이지 발탈 재주꾼이 아니야.” 아직도 허탈과 항변이 뒤섞인 선생의 목소리, 들린다.

 

 

선생께선 재인청의 마지막 광대셨다. 조선의 광대가 가무악은 물론 모든 기예를 습득한 예인이었던 만큼, 광대 중에서도 특출난 자질을 보였던 선생의 기예와 가무악의 수준은 모두 지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근현대를 걸쳐 그렇게 천대를 받던 전통의 유산들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무형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면서 선생이 지닌 예기도 조명을 받게 된다. 대상에 올랐던 선생의 종목은 발탈과 태평무였다. 그런데 되려 이게 화근이 된 것이다. 마침 대학가를 중심으로 탈춤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학계는 발탈이라는 새로운 콘텐츠의 희소가치가 부각되었고 태평무는 다음에, 하더니 없던 일이 되고 만것이다. 사진의 선생은 무표정일 때의 모습이다. 필자는 이 표정에서 선생의 허탈을 본다. 선생의 말년은 재인청 춤의 가치가 기예에 밀려난 허탈과 항변의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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