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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강릉단오제, 아직도 인류에게 이런 축제가 남아있다는 것은 기적!!!

 

 

 

강릉단오제, 아직도 인류에게 이런 축제가 남아있다는 것은 기적!!!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강릉단오제

 

강릉단오제는 1967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고, 2005년 11월에는 UNESCO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단오제를 지켜본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은 “아직도 인류에게 이런 축제가 남아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한다. 우리의 단오제를 중국의 단오절과 같은 명절로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 중국의 단오절은 초나라 시인(時人) 굴원(屈原)을 추모하는 추모제로 우리의 단오제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굴원은 부패한 귀족들과 결탁하지 않고 세속을 떠나 지내던 시인으로 결국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강물에 투신한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가 죽은 음력 5월 5일이면 강물에 노를 저어 물고기를 쫓고, 주먹밥과 계란 등을 던져주어 물고기들이 시신을 못 먹게 하는 의미의 추모 의식을 한다. 중국 정부는 자신의 단오절을 우리의 단오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하려 하였으나, 그 가치의 차이를 알아본 심사위원들은 우리의 단오제를 먼저 등재 시켰다. 

 

우리의 단오제는 5월에 축제하던 마한에서 그 뿌리를 찾을 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단오를 다른 말로 ‘수릿날’이라고도 했다. 고려가요로 전해져 온 <동동(動動)>의 가사에 수릿날 아침에 먹는 약재를 소개하고 있어 그 시기에도 이 명절을 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조선시대 성종은 명나라 사신에게 동동사(動動詞)를 부르며 추는 춤인 동동무(動動舞)를 선보였는데, 이 춤이 고구려 때부터 있던 춤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이야기로도 수릿날의 오랜 역사를 유추할 수 있다.

 

수릿날의 ‘수리’라는 단어는 태양, 신, 으뜸·머리(首), 높다(高), 오래되다(古)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독수리, 참수리, 수리 등 높이 나는 맹금류(猛禽類)의 이름에 ‘수리’를 쓴 것에서도 그 뜻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하지(夏至)에 축제를 벌였던 수릿날이 중국에서 유입된 단오와 혼용되다가 지금의 단오제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시대 단오는 설과 추석, 한식 등과 함께 4대 명절 중의 하나로 꼽혔다. 음양 사상에 따르면 홀수를 양의 수라 하여 길수(吉數)로 여겼는데 오(五)가 두 번 겹치는 5월 5일 단오는 양기가 왕성한 날, 길일 중의 길일로 여겼다.
 
돌베개를 베고 자고 보리밭이 남아나지 않던 질펀함 속에도 신성(神聖)한 맥박(脈搏)은 뛰고

 

강릉단오제를 보기 위해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대관령 옛길 양떼목장 근처의 산신당(山神堂)과 국사성황사(國師城隍祠)이다. 바삐 재촉한 걸음이 보람되게도 두 신당 문이 모두 열어젖혀져 있어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음식이 차려진 상태인 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굿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속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는 오늘의 답사를 준비하며 읽은 책의 설명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관령 산신당
 

국사성황사

 

제일 먼저 이 두 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이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산신과 성황신이 모셔진 곳이기 때문이다. 강릉단오제는 신주(神酒) 빚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음력 4월 5일이면 제관(祭官)들은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의관을 갖춰 입고 술을 빚는다. 입을 흰 천으로 감싸 부정을 막고 시청(市廳)에서 마련해 준 찹쌀과 누룩, 솔잎을 버무리고 정화수를 부어 정성을 다한다. 이어 음력 4월 15일이 되면 대관령에서 산신제(山神祭)와 성황제(城隍祭)를 지낸다. 제를 올린 후에는 성황신을 단풍나무에 모시는 대내림굿을 하고 이 신목(神木)을 들고 무악(巫樂)을 울리며 홍제동의 국사여성황사(國師女城隍祠)로 내려와 성황신의 위패(位牌)와 신목을 여성황신과 함께 봉안(奉安)한다. 

 

국사여성황사 영신제(迎神祭)


필자가 도착한 날은 음력 5월 3일로 국사여성황사에 봉안된 성황신 부부를 남대천의 단오제단(端午祭壇)으로 모시는 날이었다. 국사여성황사에서는 영신제(迎神祭)가 시작되었다. 축문을 읽고 제관들이 절을 하는 유교식 제례가 진행되었다. 신을 단오장으로 옮길 때는 위패와 신목을 필두로 거대한 행렬이 이루어진다. 이때 ‘괫대’라고 하여 신목 다음에 모시고 가는 나무가 있는데 알록달록 천으로 꾸며진 거대한 상징물도 함께한다.

 

이 ‘괫대’는 산신(山神)인 김유신(金庾信)의 우산을 본 딴것이라고도 하고 성황신(城隍神)인 범일(梵日)의 석장(錫杖:지팡이)을 모방한 것이라고도 한다. 제관, 무당, 농악대, 시민들이 흥겨운 풍물 가락과 함께 단오 등을 밝히고 남대천의 단오제단으로 이동하여 위패와 신목을 봉안한다. 이 제단에서는 단오 행사가 끝나는 날까지 매일 아침에 유교식 제례인 조천제를 올리고, 이어 무당들의 부정굿, 조상굿, 세존굿, 산신굿, 성주굿, 군웅장수굿, 심청굿, 칠성굿, 천왕굿, 용왕굿, 축원굿, 손님굿, 제면굿, 꽃노래굿, 뱃노래굿, 등노래굿 등 16가지 각종 굿을 펼친다. 이 굿들은 무당들이 섬기는 각가지 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행사로 오신제(娛神祭)라고 한다.

 

신들이 어떻게 놀고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무녀와 관객 사이의 주고받는 말과 어우러짐은 재미지고 푸근하다. 마지막으로 음력 5월 8일 저녁에는 성황신을 대관령 국사성황사로 여성황신은 홍제동 국사여성황사로 돌려보내는 송신제(送神祭)를 지낸다. 신목과 단오제장을 치장했던 각종 꽃, 기물 등을 불태우는 마지막 의식을 끝으로 화려했던 축제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필자가 영신 행차와 함께 도착한 남대천 단오장은 모든 강릉시민이 쏟아져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관광버스가 실어 나르는 사람들도 어마어마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창포로 머리 감는 체험장, 투호 대회장, 씨름장, 그네 타기, 서커스, 각종 음식을 파는 장마당까지 언뜻 보면 팔도 여느 곳에 벌어지는 축제 현장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지만, 영신제에서 송신제에 이르는 신성한 제의(祭儀)가 끊임없이 벌어지며, 그 진부해 보이는 전통의 재현이 외면이 아니라, 수많은 관객의 호응과 박수로 신명이 넘쳐나고 있었다. 전통의 재현 현장이 현대의 축제와 조화를 이루는 이 모습에 유네스코는 기적(奇蹟) 같은 일이라 경탄해 마지않던 것이다. 과거 몇 날 며칠 날밤이 새도록 놀음판과 취객이 넘쳐나던 강릉단오제를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한다. 

 

‘술이 오른 취객들은 돌베개를 벤 채 잠을 자고, 눈이 맞은 남녀들에 보리밭이 남아나지 않는 음주가무(飮酒歌舞)가 질펀한 축제의 장!!!’

 

동해안 무속 그 화려함 속으로
 

영동지방의 무속은 세습무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가업(家業)으로 이어진 세습무의 연행은 최정점의 기술을 자랑한다. 요즘은 가업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은 국악 전공자들이 학습을 통해 이 무업(巫業)을 함께하고 있다. 농악 장구에 비해 크기도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동해안 무속 장구에서 엄청나게 옹골차고 현란한 가락이 쏟아져 나온다. 장구깨나 쳤다는 사람들도 그 화려한 기술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고 꽹과리 가락도 현란하기 이를 데 없다. 필자는 동해안 지역의 무가(巫歌), 무무(巫舞), 무악(巫樂)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강릉단오제에 충족했다. 

 


드렁갱이-강릉단오제보존회 무격부
https://www.youtube.com/watch?v=4fgFTl7oOWU


강릉단오굿에 쓰이는 장단은 제차에 따라 다르지만, 크게 무가(巫歌)에 쓰이는 장단, 무무(巫舞)에 쓰이는 장단, 무 의식(儀式) 쓰이는 장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음의 장단 이름은 필자에게도 낯설지만 궁금증을 담아 적어보았다. 무가 장단에는 부정, 청보, 제마수, 삼공잽이, 고삼, 자삼, 동살풀이, 재배, 수부채가 쓰이고, 무무 장단에는 푸너리, 거무, 삼오장, 배기장, 드렁갱이 등이 쓰이고, 무의 장단으로 단약, 사자풀이 등이 쓰인다. 이 생소한 장단들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무악을 영상으로라도 감상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하여 추천 링크를 남긴다.

 

강릉단오제의 캐릭터 관노가면극
양반을 풍자(諷刺)할 수 없는 관노(官奴) 신세가 전통 유일의 무언가면극(無言假面劇)을 남겼다.

 

전국에서 연행되는 탈춤 중 유일한 무언극이 있다. 바로 강릉의 관노가면극이다. 탈춤 하면 지배계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해학을 떠올린다. 그런데, 관노가면극에서는 풍자라고 해봐야 고작 소매각시가 양반의 수염을 잡고 자결하려고 시늉하는 장면 정도에 불과하다. 관노(官奴)들이 아무리 탈을 쓴들 그 몸짓 하나로도 자신이 드러나는 마당에 말인들 편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이런 현실이 무언극이 된 것이다. 내게는 이 무언이라는 형태가 지배계층에 대한 다른 어떤 신랄한 풍자보다 더 풍자로 다가왔다.

 

관노가면극


이 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총 네 종류이다. 장자마리, 시시딱딱이, 소매각시, 양반이다. 장자마리는 배가 불뚝한 모습에 해초와 곡식 줄기를 몸에 매달고 있어 풍어와 풍농의 기원을 상징한다. 이름이 장자마리인 이유에 대해 양반을 뜻하는 장자(長者)와 하인을 뜻하는 마름의 합성어라고 유추하기도 하고, 진시황(秦始皇)을 죽일만한 영웅을 찾아 강릉에 살고 있는 창해역사(滄海力士)를 데리러 장자방(張子房)이 왔다는 강릉 설화를 근거로 장자마리를 장자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연말이면 방상시(方相氏)라는 탈을 쓰고 귀신을 쫓는 구나의식(驅儺儀式)을 하는데, 이때 “시(쉬)~ 시(쉬)~”하고 소리를 내며 방망이로 이곳저곳을 “딱! 딱!” 때린다. 이 모습에서 시시딱딱이란 이름의 캐릭터가 생긴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오방색의 탈을 쓰고 귀신을 쫓는다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방망이나 칼을 들고 나타나, 홍역같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악귀 쫓는 의미를 담아낸다. 소매각시의 소매는 어린 누이(小妹)를 뜻하는 것으로 보거나, 어느 설화에 나오는 소매(小梅)라는 미녀이며 귀신을 쫓는 신격으로 보기도 한다. 양반을 단오제의 성황신인 범일국사로 소매각시를 여성황신인 정씨부인으로 치환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LED탈춤 1인극 '시딱이' - 김문겸
https://www.youtube.com/watch?v=d-HIU6lajuw


이 관노가면극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사라진다. 이 극이 강릉단오제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67년 이를 복원하고서부터이다. 이 극을 연희했던 이들은 자신이 과거에 관노였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복원이 안되고 있었다. 그러나, 관노였던 소년 시절을 용기 내어 고백한 김동하, 차형원 두 인간문화재 선생님에 의해서 이 소중한 무언극은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극의 내용은 무언극이란 것이 하등의 제약을 주지 않을 만큼 쉽게 이해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관노가면극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설명을 대신하여 동영상을 하나 추천하고자 한다. LED 불빛을 이용해 가면을 바꾸니 혼자서 모든 역할을 소화하는 1인 가면극이 되었다. 창의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강릉단오제 산신당(山神堂)의 주인은 김유신
 
김유신은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번영을 누리던 금관가야는 백제, 왜와 힘을 합쳐 신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신라의 요청으로 참전한 북방의 맹주 광개토대왕에 의해 처참히 패한 뒤부터 급격히 쇄락(灑落)한다. 그의 증조부는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고, 조부와 아버지는 모두 신라의 장군이였다. 화랑 출신 김유신 장군은 낭비성 전투에 참전하여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고구려 진영을 헤집고 다니며 적장의 머리까지 베어들고 돌아오면서부터 그 용맹함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승자의 기록이라 과장도 있겠지만 60년 전장을 누비는 동안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한다. 가히 전쟁(戰爭)의 신(神)이라 불릴만하다. 그가 남긴 삼한통일의 위업(偉業)은 사후(死後)에 그를 흥무왕(興武王)으로까지 추존(追尊)되게 하였다.

 


대관령 산신당의 김유신

 

김유신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매형이자 감포 앞바다 대왕암의 주인인 문무왕의 외삼촌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의 조카는 동해의 해룡(海龍)이 되어 왜의 침략을 막고, 그는 천신(天神)이 되어 신라를 지킨다. 어쩌다 이 천신이 대관령의 산신(山神)이 되었을까? 고구려 멸망 후 말갈계 고구려인인 대조영이 당을 몰아내고 발해를 건국하여 남북국 시대가 열린다. 경주를 수도로 한 신라의 북방경계 최전방은 발해와 맞닿은 명주(溟州 : 강릉의 옛 이름)가 된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말갈족과 분쟁이 많던 곳이기도 했으므로 이 최전방 전선(戰線)을 지키는 존재로 전쟁의 신 김유신을 산신(山神)으로 모신 것은 아닐까.

 

허균(許筠)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는 시문집에 고향에서 본 강릉단오제에 대해 글을 남겼는데 그가 산신이 된 이유를 다음같이 적어 놓았다. ‘김유신은 젊은 시절 명주에서 공부했는데 산신에게서 검술을 배우고, 선지사에서 칼을 주조하였다. 그 칼이 위력을 보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였고 죽어서는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

 

동정녀(童貞女)가 잉태(孕胎)한 범일국사(梵日國師) 성황신(城隍神)이 되다.

 

대관령은 신라시대에는 대령(大嶺)으로 고려에서는 대현(大峴) 또는 굴령(崛嶺)이라고 칭했다. 굴령을 굴산사(崛山寺)가 있는 고개란 의미로 볼 수 있고 이런 뜻의 대굴령(大崛嶺)이 대관령(大關嶺)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한편, 고개가 험준하여 대굴대굴 구른다고 대굴령이라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굴산사가 어떤 절이길래 대관령이란 고개 이름에까지 관여했을까?

 


굴산사지 당간지주

 

굴산사지(崛山寺址)를 찾아가는 길에 당간지주(幢竿支柱)라는 오랜 유물을 만났다. 농촌의 풍경 한 가운데에 두 기둥이 우뚝 솟아있었다. 절의 입구를 표시하는 기(旗)인 당(幢)을 세울 때, 깃대의 아래를 한 쌍의 돌기둥에 지탱시켰는데 이 기둥을 ‘당간지주’라 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한다. 굴산사는 도대체 얼마나 큰 절이었길래 이리 큰 당간지주를 가졌던 것일까?, 궁금증을 갖고 마을을 한참 돌아 들어가니 굴산사지(崛山寺址)라는 표시의 드넓은 절터를 마주했다. 이곳이 강릉단오제의 성황신(城隍神) 범일국사(泛日國師)의 신화가 담긴 곳이다. 

 

범일은 본명이 김품일(金品日)로 그의 할아버지는 명주도독((溟州都督)을 지낸 진골 귀족이었다. 품일은 15세에 출가하여 범일(梵日)이 되었고, 20세에 당나라 유학하여 37세에 귀국한 후 이 거대한 굴산사를 창건한다.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禪宗)의 사굴산파를 개창(開創)한 인물이기도 하다.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등이 그의 깊은 불법에 감화하여 국사(國師)로 초빙하기도 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참선과 후학 교화에만 힘쓰다 79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한다. 그러니 범일은 살아서 국사라는 칭호를 받은 바는 없는 것이다. 그가 창건한 굴산사는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된 것으로 추측한다. 절을 복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오대산 월정사, 양양 낙산사 등의 대체할 큰 절이 가까이 있었다는 점과 선종과 교종의 교체 등에서 찾는다. 

 

그런데,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잊혀져 흔적만 남은 이 굴산사의 범일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대관령 산신으로 등장한다. 그가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김유신을 대체한 시점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처음은 고려사에 전하는 명주 출신 김순식 장군의 일화이다. 그 일화는 이렇다.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과 전투할 때 이를 돕기 위해 출병한 김순식이 도착하자, 왕건은 어제 스님이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온 꿈을 꾸었는데 다음 날 이리 지원병이 도착하니 신기하다고 말한다. 후일 김순식은 대관령에 제단을 쌓고 왕건 꿈에 만난 스님에게 제사를 올린다. 김순식이 제를 올린 스님을 범일로 보고 이 시점부터 산신으로 모셔진 것이 그 처음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허균의 1611년 작품인 《성소부부고》에는 단오제의 주신이 여전히 김유신인 것으로 보아 그 추정은 너무 이른면이 있다. 강릉 전설에 의하면 범일국사가 강릉에 살 때 왜구가 침입하자 대관령에 올라가 술법을 부려 산천초목을 군사로 바꿔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로 보아서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민심이 범일을 신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영조 때인 임오년(1762)의 다음 기록도 참고가 된다. 대사간(大司諫) 윤방(尹坊)이 살인사건을 감찰하러 강릉에 갔는데, 고을의 호장(戶長)이 성황사에서 단오제의 초헌관을 맡아보느라 늦게 도착한다. 그러자 이규라는 성질 급한 관리가 늦게 도착한 호장을 나무라며 마패로 때리다가 돌연 죽는다. 이 기록에 성황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이미 단오제의 주신이 김유신에서 범일로 변화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자료로 보면 범일의 신화가 완성된 것은 대략 1611년~1762년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보인다.

 

신화 속 범일의 이야기는 이렇다. 굴산사지에는 석천(石泉)이란 우물이 있다. 범일의 어머니는 이 우물에서 물을 떠 마셨는데 그 물그릇에는 태양이 떠 있었다. 그 물을 마신 후 임신을 하게 된 처녀는 범일을 낳았다. 이 신화를 반영하면서 범일의 이름 한자는 뜰 범자와 해 일자인 범일(泛日)로 된다. 태양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수릿날의 주신(主神)에 걸맞은 탄생신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처녀가 잉태해 낳은 아기 범일은 굴산사터 뒤에 있는 학바위에 버려진다. 하지만 이 버려진 태양의 아들을 학이 날아와 감싸 키워준다. 이 신기함에 엄마는 아이를 다시 데려와 키웠다. 이 범일이 자라서 굴산사를 창건한 큰 스님이 되었고,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범일

 

국사성황사(國師城隍祠)에 모셔진 이 산신(山神) 범일(泛日)은 스님이아니라 무인(武人)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긴 수염에 무관의 철릭을 입고 활을 차고 백마를 타고 있다. 보통의 산신과 달리 호랑이도 두 마리나 양옆에 거느리고 있어 대관령에서 어떤 호랑이를 만나도 든든하게 지켜줄 만한 강력한 영능(靈能)이 느껴진다. 

 

홍제동 국사여성황사의 정씨부인

 

성황신(城隍神)은 해석하면 성(城)을 둘러서 판 연못인 해자(垓字)같은 신(神)이니 마을의 수호신을 말한다. 이 신은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로 유입되었다. 이 성황신 유입되기 이전 우리 전통의 수호신은 서낭신이었다. 서낭신은 선왕신(仙王神)으로 신선의 왕, 산왕신(山王神)으로 산신의 왕이란 해석 등이 있다. 서낭신을 모신 곳인 서낭당은 선왕당, 산신당 등의 이름이 쓰였으나, 송나라에서 성황당(城隍堂)이 유입되면서부터 명칭이 혼용되거나 대체되며 민간신앙과 융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호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성황사의 신으로 설정하고 배향하며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지방 세력을 경계하기 위해 제단의 서열을 정하기도 하고, 국가 주도로 고을수령이 정기적으로 제사 지내게 하는 등 국가 제도로 편입하였다. 성황당을 관에서 주도해서 만든 경우에 성황사(城隍祠)로 명명하곤 했다.

 

성황신에게는 부부의 신격인 여성황신이 존재한다. 이에 따라서 강릉단오제에도 여성황신을 모시게 되었다. 그 여신은 바로 동래부사를 역임한 정현덕(1810~1883)의 딸이다. 정현덕의 꿈에 대관령 성황신이 나타나 딸을 달라며 청혼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였다. 이튿날 딸이 호랑이에 업혀가 죽게 되니, 정씨처녀는 그날로 성황신의 부인이 되었다. 승려 범일은 열반(涅槃)에 들어 대관령 산신이 된 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하고, 정씨처녀가 죽은 음력 4월 15일부터 5월 3일까지는 홍제동 국사여성황사(國師女城隍祠)에서 부인과 함께하고 5월 3일부터 8일까지는 남대천의 단오제단에서 함께 지낸다. 함께하는 동안 성황신 부부는 풍요와 다산(多産)의 상징이 된다.

 

범일에게 붙은 국사(國師)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그 하나는 신라시대 왕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려고 한 점을 들어 고승(高僧)을 의미하는 국사(國師)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산신(山神)을 모시는 당을 국사당(國師堂)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사를 산신(山神)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신을 의미하는 국사를 한자로 적을 때에는 國師 외에도 국사(國祀, 國士, 國仕, 局司), 국수(國秀, 國樹) 등이 같이 쓰는 것에서 보듯이 국사는 한자어가 아니라 우리말의 음역으로 보아야 하며 산신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국사성황사(國師城隍祠)의 영정을 보면 스님 범일이 아니라 무인과 호랑이가 같이 그려진 것이 산신 범일이다. 이를 보았을 때 후자의 주장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진다. 범일은 대관령의 산신이자 강릉의 수호신이란 두 가지 의미를 담은 국사성황신(國師城隍神)인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나라 5대 축제 중 하나로 손꼽히고,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이 기적 같다고 칭송한 강릉단오제를 알아보았다. 필자의 글재주로는 그 생동감 있는 현장을 담아내진 못했다. 그 부족한 부분은 독자들이 현장의 모습을 직접 눈에 담아서 충족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장정룡, 강릉단오제현장론 탐구, 국학자료원, 2007
장정룡, 신화와 놀이 한마당 강릉단오제, 열린어린이, 2015
김기설, 강릉단오제의 요소와 변화, 민속원, 2010
자현, 신이된 선승 범일국사, 불광출판사, 2023
김운석, 「강릉단오굿 장단 연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학위논문, 2017
서울신문 2007년5월18일 춘향·몽룡의 여름나기 배워볼까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0090143?sid=103
[국악콘서트 판] 드렁갱이 - 강릉단오제보존회 무격부 https://www.youtube.com/watch?v=4fgFTl7oOWU
[국악콘서트 판] LED 탈춤 1인극 '시딱이' - 김문겸 https://www.youtube.com/watch?v=d-HIU6laj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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