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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3]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3]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춤꾼의 문법 3

 

춤집 좋다

태평무는 장단을 모르면 제대로 춤을 출 수 없는 춤이다. 춤장단 자체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장단이다. 여느 태평무 장단과 유사한 것 같은데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창작무용도 아닌데 도입부에서는 긴 호흡의 음악에 특정한 춤사위도 없이 그저 걸음만 걷는다. 그런데도 선생께선 장단을 치고 구음까지 얹으신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끝없는 의문과 혼란 속에서도 선생께선 이렇다 할 답변을 해주지 않으셨다. 나는 그저 선생께서 첫날 시연해주셨던 태평무를 밑도 끝도 없이 추어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 더 이해할 수 없는 선생의 반응이 있어 기어코 나는 그 답을 들으려 무진 애를 쓴 기억이 난다. 선생께 춤을 배우러 온 다른 춤꾼들의 춤을 감상하곤 했었는데, 이상한 것은 춤을 잘 추는데도 선생의 표정이 일그러지곤 하는 것이었다. 선생의 답변은 이랬다. “춤을 잘 추는 것이 테크닉에 있지 않다.”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 그렇다면 춤을 잘 추는 핵심 요소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의문만 들었다.

 

나는 태평무만 일 년을 넘게 익혔다. 어지간한 춤은 길어야 몇 주면 익힐 수 있었던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먼 길을 찾아 교습소에 가면 선생께선 가르치시기는커녕 아예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는 날이 더 많았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액의 작품비에다 꼬박꼬박 월사금까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계속해야 하나 갈등하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그 오기는 첫날 선생의 시연이 계속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선생께서 시연하셨던 그 날의 신비한 경험을 놓칠 수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었다. 춤을 배우러 왔는데 알아서 추는 시간만 석 달째로 접어들면서 재인청 춤의 정체가 잡힐 듯 이상하게도 모종의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어언 태평무로만 일 년을 꽉 채웠을 즈음이었다. 하루는 네 태평무 장단을 뜨자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싶은데, 선생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같은 태평무라도 네 몸의 태평무는 다르다. 당연히 네 태평무에 맞춘 장단이 있어야 한다.” 당시만 해도 재인청 춤 장단을 다루던 전용 악사들이 상당수 생존해 계셨다. 선생께서는 최고의 악사들을 선정하여 드림팀을 직접 꾸리셨다.

 

모두 녹음실에 모였다. 선생께선 장구를 잡고 특별한 사전 조율도 없이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선생의 교습실을 나와 춘 첫 태평무였다. 이윽고 한바탕의 춤과 함께 녹음이 끝나고 세기의 악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상찬한 말씀은 “춤집 좋다”였다. 선생을 바라보았다. 빙그레 웃고만 계셨다. 선생께선 그 어떤 춤꾼에게도 잘 춘다, 못 춘다는 표현을 쓰지 않으셨다. 대신 “춤집이 있다.”는 표현을 하실 양이면 빙그레 웃었던 것이다.

 

춤꾼이 재인청 예인들에게서 ‘춤집이 있다, 춤집이 좋다.’는 표현을 들었다면 이는 최상의 상찬이다. 고 심우성 민속학자가 생전에 이동안 선생께 이 표현을 들어 무슨 뜻인가를 물은 적이 있었다. 선생께서 이르기를, “춤추는 동작의 폭이 꽉 차 있다는 건데, 장단과 장단 사이를 오뉴월에 소나기 피하듯이 엮어가면서도 한 치의 빈틈없이 눈을 찍어야 해.” ‘눈’이라는 것은 춤의 입장에서는 ‘핵심’이고 장단의 입장에서는 ‘마디’ 또는 ‘대목’이라 하는데, 이 눈마디를 찍지 못하면 나풀거리기만 한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선생의 용두동 교습소를 찾았을 때, 선생의 시연에서 본 그 거대함과 묵직함, 그리고 심장을 쥐락펴락했던 긴장과 이완의 요체가 바로 ‘눈’이었던 것이다. 그 ‘눈’은 장단에 휘둘리지 않고 장단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갖고 노닐 수 있는 춤꾼만이 가질 수 있는 ‘기교의 저편’과도 같은 경지일 터. 일정한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체득할 수 있도록 이끄신 선생의 연단에 감사할 따름이다. 덕분에 나만의 태평무 장단이 만들어진 그 날, “춤집 좋다”는 이구동성의 상찬을 듣고서야 그 녹음실이 태평무 이수를 공인하는 자리였다는 것을 안 것이다.

 

진쇠춤을 추는 선생의 공연 사진이다. 재인청이 창안해낸 진쇠춤은 복색부터 소품과 춤사위까지 가장 화려한 외양을 가진 춤이다. 그런데도 이 날 공연에서 선생께선 구군복을 벗고 흰옷을 입으셨다. 게다가 목화를 벗어던지고 버선을 신으신데다 화려한 군모마저 치우고 머리띠만 두르셨다. 왜 그러셨을까? 무대에서는 쓰지 않던 안경까지. 파격적일 만큼 거의 모든 것을 바꾸셨는데 오색 꽹과리채와 황동의 꽹과리는 그대로 들고나오신 것이다. 도대체 왜? 이 춤을 끝으로 선생께선 그리 오래지 않아 춤길 걷기를 마치시고 영면에 드셨다. 생각해본다. 당신께서 가실 저승길을 선생은 밝은 눈으로 스스로 길을 내고 준비하셨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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