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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판소리, 이야기와 노래의 경계에서 피어난 인류의 위대한 유산

 

판소리, 이야기와 노래의 경계에서 피어난 인류의 위대한 유산

 

전주세계소리축제를 가다


5일간의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열렸다.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한국 전통축제’가 아니라, 아프리카, 인도, 유럽 등지에서 그들의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는 ‘월드뮤직 페스티벌’을 지향해 왔다. 2001년 세계적 축제를 향한 의지를 담은 ‘소리사랑 온누리에’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작한 이래, 2009년 신종플루로 취소된 한 해를 제외하면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꾸준히 이어져 올해로 24회를 맞았다. 그간의 성과도 눈에 띈다. 2012~2014년 3년 연속 영국 송라인즈(Songlines) 선정 ‘국제 페스티벌 베스트 25’, 6년 연속 소비자브랜드 대상, 2019·2020년 TWMC 베스트 페스티벌 어워드 1위, 2024년 2위 등 국제적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해외 관객 비중은 아직 높지 않아 글로벌 축제라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24회 전주세계소리축제 연지홀


축제가 벌어지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국악 감상에 알맞은 다양한 공연장을 갖추고 있었다. 대극장, 모악당, 연지홀, 명인홀, 야외공연장 등 다양한 극장이 규모와 성격이 다른 무대를 즐기기에 적합하였다. 5일간 이어지는 축제 일정은 현전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과도 잘 어울려 매일 다른 소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명창과 젊은 소리꾼의 판소리 다섯 마당이 축제의 메인을 담당하며 교차로 감상할 수 있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한편, 야외무대에서는 뜨거운 8월 한낮의 열기를 식혀줄 여름밤 정취에 어울리는 월드 뮤지션들의 음악과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온 이날치밴드, 서도밴드 등 젊은 국악인들의 퓨전국악 무대도 준비되었다.

 

필자가 찾은 날은 가곡 인간문화재 조순자 선생님의 공연을 비롯해 염경애 명창이 3시간 30분에 걸쳐 들려준 춘향가 그리고 연주자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서도밴드의 야간 공연까지 나의 취향을 저격하였다. 즐비하게 늘어선 푸드트럭 음식과 화려한 조명 불빛이 빚어내는 축제의 정취 속에서 마음이 끌리는 무대를 골라 즐기다 보니 일상의 번잡함은 물러가고 오롯이 음악에만 취해 힐링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판소리는 언제부터...

 

판소리는 1964년 국가무형유산,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민족의 성악 예술이다. 동초제 춘향가의 경우는 그 완창에만 무려 8시간이 소요된다.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가진 단일 성악 장르로 이만큼 길게 불리는 예술은 없으니 가히 세계에서 가장 긴 노래라 할 수 있는 점도 각별하다.

 

판소리가 언제 기원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록은 영조 30년(1754) 유진한(柳振漢)의 문집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호남지방을 유람하던 그는 판소리 <춘향가>를 듣고 감동하여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기록이 그의 문집인 『만화집(晩華集)』에 남아 있다. 그러니 최소한 270년 이전부터 판소리가 이 땅에서 불리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의 기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헌종 9년(1843) 송만재가 남긴 문집 「관우희(觀優戱)」가 있다. 당시는 과거에 급제하면 집으로 광대를 불러 잔치를 베푸는 문희연(聞喜宴)의 풍습이 있었으나, 그는 넉넉지 못한 살림 탓에 아들의 급제를 잔치로 축하해 줄 수 없어 음악과 연희의 장면을 칠언시로 지어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였다. 이 멋진 스토리의 「관우희」에는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등 19세기 공연예술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모흥갑,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등과 같은 초기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를 묘사한 기록이 전해진다.

 

평양도(平壤圖)의 판소리 장면(사진출처 : 국악사전 홈페이지)

 

특히 모흥갑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10폭 병풍 「평양도(平壤圖)」에 남아 있는데 대동강 능라도(綾羅島) 한가운데에 그려진 소리꾼 옆에 ‘명창(名唱) 모흥갑(牟興甲)’이라 적혀 있어 그의 명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판소리는 평양 땅에서까지 청할 정도로 인기가 남달랐던 것이다.

 

또한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은 양반으로 본명은 정(⺅政)이다. 그의 소리 실력은 가히 대단하여 임금이 듣고는 사람, 새, 짐승의 소리를 얻었다는 의미의 삼득(三得)이라는 호를 지어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양반이 천한 광대소리를 한다는 것은 허락하기 힘든 일이었던가 보다. 이를 치욕스럽게 여긴 안동 권씨 문중(門中)은 그를 잡아다 멍석말이를 시키고 매질하였는데, 이에 그는 죽기 전에 소리 한 번 하길 청했다 한다. 마지막으로 이를 허락하자 그는 거적 속에서 소리를 하였고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감동을 하여 죽음을 면했다는 설화까지 전한다.

 

동편제 판소리의 시조 ‘가왕 송흥록’

 

「관우희(觀優戱)」에 등장하는 송흥록(宋興祿, 1801~1863)은 판소리 역사에서 큰 업적을 남겨 후대에 ‘가왕(歌王)’으로까지 칭송됐다. 그 업적 중 첫째는 진양조의 완성을 든다. 진양조는 느린 6박 장단으로 그 이전까지 판소리에는 없던 곡조였다. 진양조는 진도의 굿판에서 불리던 소리의 장단으로, 망자의 혼을 달래고 산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내는 소리에 쓰였다. 송흥록은 이 진도 무속 육자배기 장단을 판소리에 이입했다. 이 때문에 그를 무속 집안 출신으로 추정을 하기도 한다. 둘째는 동부 지방 선율의 특징인 라-솔-미 하행의 메나리조를 도입한 것이다. 그 외에도 그는 폭포 아래에서 독공(獨工)을 거듭하며 귀신의 울음과 같다는 ‘귀곡성(鬼哭聲)’을 득음하였는데 이 음색의 표현이 압도적이어서 명성을 떨쳤다 한다.

 

송흥록은 판소리 동편제의 시조로 평가된다. 동편제는 섬진강을 기준으로 동쪽의 남원·구례·순창 등지에서 기원한 소리를 말하는데 단순한 지역적 구분보다는 소리의 성격이 호방하고 웅장하며, ‘남성적’인 소리에 대한 분류로 쓰인다. 송흥록의 집안은 판소리 명문으로, 그의 동생 송광록 또한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명창 집안의 유전자는 아들 송우룡과 손자 송만갑으로 이어졌다. 특히 송만갑은 일제강점기에 유성기 음반을 통해 자신의 소리를 남겼는데, 이는 고전 판소리 창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자 근대 판소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남원시 운봉읍 국악의 성지 가왕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묘역과 송흥록, 박초월의 생가가 있는 동편제 마을

 

 남원시 운봉읍에는 송흥록 가문을 기념하는 묘역과 박물관을 조성하여 이를 거창하게 ‘국악의 성지’라 이름 붙여 놓고 후학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가왕 송흥록과 그의 후손 송만갑의 수제자이자 여류 명창인 박초월의 생가터가 있는 비전마을을 ‘동편제 마을’이라 별칭 해 소담스레 그를 기리고 있다.


서편제 판소리의 시조 박유전과 귀명창 흥선대원군

 

판소리가 대중적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1993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한몫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주인공인 소리꾼 오정해는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동편제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판소리 유파인 서편제는 섬진강을 기준으로 서쪽인 보성·광주·나주 등지에서 기원한 소리로 섬세하고 애절한 감성을 강조하는 창법을 특징으로 한다.

 

서편제의 시조로 꼽히는 이는 조선 말기를 풍미한 명창 박유전(朴裕全, 1835~1906)을 꼽는다. 그의 소리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눈에 들어 운현궁 연회에 불려 가 자주 공연해야 했기에 그 근처에 기거했다고 전한다.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그는 무과의 ‘선달(先達)’이라는 칭호의 벼슬을 하사받았고, 오늘날의 선글라스에 해당하는 오수경(烏水鏡)까지 선물 받았다고 하니 그의 기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제자 이날치도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어전에서 공연한 후 스승과 같은 선달(先達) 교지를 하사받았다 하니 이 또한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어람(靑於藍)의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주로 즐기던 성악은 가곡(歌曲)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중인들이 가단(歌壇)을 형성하고 양반들과 풍류방 문화를 만들며 음악을 즐겼다. 흥선대원군은 귀명창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난(蘭)을 치고 시를 짓고 소리를 즐기며 풍류에 흠뻑 취해 있었음이 여러 기록으로 전한다. 그는 판소리 명창뿐 아니라 당시 가곡의 명창이며 《청구영언》, 《해동가요》와 함께 3대 가곡집으로 꼽히는 《가곡원류》를 편집한 박효관, 안민영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박효관에게는 운애(雲涯), 그의 제자 안민영에게는 구포동인(口圃東人)이라는 호를 지어준 일화도 유명하다. 나이 어린 고종을 왕으로 앉히고 실질적으론 권력이 임금과 다름없던 흥선대원군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 예술가들에게 더없는 영예였다.

 


신재효와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

 

사실 판소리의 본래 향유층은 양반이 아니었다. 구전되던 설화나 해학적인 이야기에 노래를 붙이고 재담을 곁들여 민중의 희로애락과 함께한 것이 판소리의 태동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판소리는 오늘날 전승되는 다섯 마당 외에도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변강쇠타령>, <가짜신선타령> 등까지 포함해 12마당이 존재했으나, 점차 경제력을 가진 양반 계층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작품만이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소릿광대의 입장에서도 양반의 잔치에 초청돼 소리한다는 것은 경제적 이득뿐 아니라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도 되었을 테니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판소리 전승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 이가 있으니 바로 고창의 향리 출신인 신재효(申在孝, 1812~1884)였다. 그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흥보가)>, <토별가(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등 여섯 마당을 정리하여 사설을 남겼다. 그 이전까지 구전심수(口傳心授)되던 소리를 문자로 기록하여 문헌화한 것이다.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는 충(忠)·효(孝)·열(烈) 같은 유교적 가치를 드러나도록 사설의 내용을 촘촘히 짜 나갔으며,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고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등 새로운 향유층인 양반의 기호에 맞게 다듬었다. 그 덕에 <변강쇠가>처럼 지나치게 외설적인 표현으로 외면받은 작품을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마당이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광대가>라는 단가에서 판소리꾼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라는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신재효와 진채선의 이야기

 

신재효에게는 진채선(陳彩仙)이라는 여류 명창 제자가 있었다. 당시 판소리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진채선은 1867년 경회루(慶會樓)의 건립을 축하하는 낙성식(落成式)에서 <춘향가>를 불러 흥선대원군의 눈에 들어 운현궁의 대령기생(待令妓生)으로 발탁되었다. 그녀는 그가 실권을 잃을 때까지 각종 연회에서 소리를 하며 조선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그 입지를 굳혔다. 그녀의 존재가 있었기에 이후 이화중선, 박초월, 김소희 등 여류 명창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이 진채선의 이야기는 영화 ‘도리화가’가 되어 우리 곁으로 왔다. 〈도리화가〉는 신재효가 봄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는 풍경을 노래하며 세상의 무상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단가이다. 영화는 이 단가에 제자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소재를 더하고, 경회루 낙성식에서 소리를 하기까지의 여정과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는 과정을 애잔하게 그렸다. 그러나 정작 소리의 표현이 기대에 크게 못 미쳐 아쉬움이 컸다.

 

고창 판소리박물관과 신재효 고택의 판소리 공연

 

여성국극, 완창 판소리 그리고 국악 밴드

 

고종은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황제를 칭하며 왕실의 예법을 황실의 예법으로 고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는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번듯한 대접을 받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던 1902년 고종은 왕실의 제사를 담당하던 봉상시(奉常寺) 건물 일부를 터서 협률사(協律司)라는 황실극장을 만들고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공연을 기획한다. 하지만 당 해에는 콜레라가 창궐했고, 이듬해 봄에는 영친왕(순종)이 천연두에 걸리고 또 가을에는 흉년이 들어 결국 행사는 못하게 된다. 이에 황제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 불러 모은 팔도 광대들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업용 공연을 하게되고 극장 이름도 협률사(協律社)로 한자를 바꾼다.

 

1906년에는 협률사가 폐쇄되고 이 자리에 로마의 원형극장을 본뜬 2,000 객석의 원각사(圓覺社)라는 최초의 국립극장이 들어서는데 1908년 완공된 후 팔도에 흩어져 있던 예인들이 함께 공연한 경험이 시너지를 터트려 창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판소리가 탄생하게 된다.

 

개화기 광무대를 필두로 단성사, 장안사, 연흥사와 같은 사설극장이 생기고 당시 인기 있던 전통연희와 창극 공연은 흥행을 이어가게 된다. 이런 대류는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이동백, 임방울, 박녹주 등 쟁쟁한 명창들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며 대중적 인기를 확장했는데 이중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해방 후 1948년에는 박녹주를 중심으로 한 ‘여성국극’이 돌풍을 일으키고 1950년 전란 중에 출범한 임춘앵의 ‘여성국극’도 흥행을 이어 나간다. 남, 여가 같이 등장하는 창극을 오히려 ‘혼성국극’이라 불렀으니 ‘여성국극’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해 볼 일이다. TV, 영화 등 다양한 매체의 등장으로 그 인기는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에 자리 잡았다.

 

창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판소리는 1962년 국립창극단이 만들어지고 꾸준히 다양한 작품들이 무대화되고 있고, ‘MBC 마당놀이’, 극단 ‘미추’ 등의 활동이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최근 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 ‘정년이’가 흥행하고 이를 동력으로 ‘여성국극창작소’가 새로이 활동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특히, 드라마 ‘정년이’의 주인공 김태리는 이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무려 3년간 판소리를 익혔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소리가 단순한 3년의 공력으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깊이 있었기에, 매회 예술을 찾아가는 서사에 더해 더 큰 감동을 주었다.

 

정년이 노래 모음(https://www.youtube.com/watch?v=W4zkSWmj8hQ)

 

소리꾼 한 명이 한 무대에서 판소리 한 바탕을 오롯이 다 부르는 것을 완창(完唱)이라고 한다. 그런데 창자 혼자서 노래를 4~7시간을 한다는 것도 무리한 일일뿐 아니라 그 긴 시간을 지켜보는 관객의 일도 곤욕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요즘 판소리 공연이라 하면 완창이 아니면 가치가 없는 듯 보는 경향도 있는데 그 도전에는 박수를 보내더라도 무대적인 가치로는 꼭 추천할 바는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이런 어마어마한 도전을 처음으로 한 이가 있으니 바로 박동진(朴東鎭, 1922~2003) 명창이다. 1968년에 국립 국악원 강당에서 벌인 다섯 시간의 <흥보가> 완창을 시작으로 1969년 국립극장에서 여덟 시간에 걸친 <춘향가>를 완창하고 기어이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까지 판소리 다섯 마당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만다. 이후 소리꾼에게는 완창이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이기도 하기에 일생의 과업이 되기도 한다. 이 인간 승리 도전의 여정이 있는 장르는 전 세계에서 오직 판소리뿐이다.

 

판소리를 전공한 젊은 예술가들은 드넓고도 치열한 대중음악의 세계에 뛰어들어 전통이라는 핸디캡을 쥐고도 성공적인 파열음을 만들고 있다. ‘이날치밴드’는 판소리 수궁가의 소리 대목을 모태로 ‘범 내려온다’를 불렀는데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에 붙어있던 youtube 영상이 1억 뷰의 기록을 세우며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고, 국내에서도 뒤늦게 화제를 모았다. 또한 판소리를 베이스로 조선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서도밴드는 ‘풍류대장’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며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음악적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들의 여정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한국관광공사 이날치 밴드(https://www.youtube.com/watch?v=5kO3nWQ2N7c)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대한민국의 문화는 이제 세계 곳곳에서 소비되고 있다. 과거의 한류가 표면적인 우리 모습에 관심을 끌었다면 지금은 그 관심이 우리 문화의 깊숙한 곳까지 향하고 있다. 우리 전통의 민속, 의상, 소품, 갓, 민화, 무속에까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린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비할 세계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한가운데 단연코 판소리가 있을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고 준비하자.

 


<참고자료>
서대석, 「판소리 기원론의 재검토」, 『고전문학연구』 제16권, 한국고전문학회, 1999, 35~58쪽.
김기형, 「판소리 명창 권삼득의 생애와 설화화 양상」, 『판소리연구』 제33권, 판소리학회, 2012, 5~34쪽.
허정주, 「가왕 송흥록 생애사의 종합적 고찰」, 『판소리연구』 제33권, 판소리학회, 2012, 385~428쪽.
손태도, 「전통사회 화극(話劇), 재담소리, 실창판소리에 대한 시각」, 『판소리연구』 제39권, 판소리학회, 2015, 143~172쪽.
최동현, 「판소리 완창의 탄생과 변화」, 판소리연구. 2014, 339-385쪽.
조영숙, 『여성국극의 뒤안길』, 민속원, 2022.
김대형, 『우리시대의 판소리 문화』, 도서출판 역락, 2001.
이명진, 김혜정, 『판소리』, 민속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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