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음악 정읍(井邑) 세계가 경탄한 수제천(壽齊天)이 되다!
지금까지 전하는 우리 음악 가운데 가장 오래전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되는 곡이 바로 정읍(井邑)이다. 정읍(井邑)은 백제의 노래로 백제멸망 이후에도 민중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오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궁중음악으로 편입된다. 이에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는 《악학궤범》에 그 노랫말이 우리글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안타깝지만 그 노래는 잊혀지고 반주음악만 남게 되었다. 지금은 그 음악을 정읍(井邑)보다 수제천(壽齊天)이라 부르고 있다. 이 수제천은 197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1회 유네스코 아시아 음악제에서 전통음악 분야 최우수곡으로 특선 되었고, 당시 심사위원들이 ‘천상의 소리’라고 극찬한 것이 대서특필(大書特筆)되기도 하였다.
정읍은 지명이기도 해서 본 칼럼에서는 혼동을 막기 위해 음악을 지칭할 때는 정읍(井邑), 노랫말만을 지칭할 때는 정읍사(井邑詞), 지명을 지칭할 때는 한자 병기 없이 '정읍'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오늘은 백제의 노래 정읍(井邑)을 알아보겠다.
가장 오래된 우리 음악 정읍(井邑)
정읍(井邑)이 백제의 노래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은 세종 때 편찬한 《고려사》 악지와 성종 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있다. 두 내용이 비슷하므로 먼저 언급한 《고려사》의 내용을 보면, 정읍(井邑)을 삼국속악(三國俗樂) 중 백제악으로 소개하고 있다. 노랫말은 기록하지 않고 노래에 대한 설명만 남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정읍은 전주에 속한 현이다.(井邑全州屬縣) 남편이 행상으로 나가 오래 돌아오지 않자(人爲行商久不至) 그 부인이 산 위의 바위에 올라 그를 기다리다(其妻登山石以望之) 혹여 남편이 밤길을 걷다 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恐其夫夜行犯害) 진흙탕에 더럽혀지는 것에 빗대어 노래하였다.(托泥水之污以歌之) 세상에 전하기를 고갯 마루에 ‘망부석’이 있다 한다.(世傳有登站望夫石云)
망부상
소중한 음악 유산인 백제의 노래 정읍(井邑)을 찾아 전라북도 정읍시를 찾았다. 서울이라는 정신없이 분주한 거대한 도시를 벗어나 도착한 소담스러운 정읍사공원에는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바위가 된 듯한 모습을 한 거대한 망부상(亡夫像)이 나를 반기는 듯 서 있었다. 적어도 1,400년 전에 불려지던 백제의 아름다운 노래 정읍(井邑)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잘 정돈된 공원에는 망부상 이외에도 정읍사노래비, 정읍사 이야기 벽, 망부사(亡夫祠)라는 사당집 등 백제가요 정읍(井邑)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상징물들이 이곳저곳에 펼쳐져 있어 먼 길을 찾아온 보람이 느껴졌다. 그 외에도 공원 안에는 우리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정읍예술회관이라는 큰 극장과 미술관이 있어 여가를 즐기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언덕 위에는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가 세워져 있어 나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는데,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여겼던 선비들의 명단이 적혀있었다. 그 가운데 발견한 김창숙선생 이름 석 자와 묘비 설명문을 보며 청년 심산임을 노래하던 학창 시절이 떠올려져 뜻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하였다.
백제시대에는 이곳을 정읍이 아니라 정촌현(井村縣) 또는 ‘샘실(우물 마을)’이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명이 정읍으로 바뀐 것은 통일신라 경덕왕이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한화 정책을 편 이후라 한다. 그렇다면, 당시의 지명은 한자가 아닌 우리말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결국, 백제시대 지명은 정촌현(井村縣)이었다기보다는 ‘샘실’이었기에 ‘정읍’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노래 제목과 연관해 본다면 원래 백제인들이 부르던 노래는 ‘샘실’이었는데 지명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정읍(井邑)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쯤에서 백제가요 정읍(井邑)의 원래 이름은 ‘샘실’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점쳐 본다.
고려와 조선 궁중정재 무고(舞鼓)의 반주음악이 된 정읍(井邑)
아름다운 백제의 노래 정읍(井邑)은 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통일신라에서도 사랑을 받고 고려시대의 민중에까지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민중들 속에서 사랑받던 노래가 급기야는 고려시대 궁중정재(宮中呈才:궁중무용) 무고(舞鼓)의 반주음악으로 채택된다. 《고려사》 기록은 대략 이렇다.
충렬왕 때 시중 이혼(李混)이 영해(寧海)로 귀양 갔다가 바다에서 떠내려온 뗏목으로 큰 북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였다고 한다. 이 북을 가운데 두고 나비가 꽃을 감싸듯 돌고 용감한 두마리 용이 구슬을 다루는 듯 춤 추며 북을 두드리는 궁중정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악부에서 가장 기묘한 춤 무고(舞鼓)이다. 이 춤을 출 때 반주음악은 향악인 정읍(井邑)이 쓰였고, 여기(女妓)들은 정읍사(井邑詞)를 창사(唱詞:궁중정재에 노래 부르는 노랫말)로 노래 불렀다.
악학궤범 정읍(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렇게 궁중무용 무고의 반주음악과 창사로 채택되어 고려의 궁중으로 편입된 백제 음악 정읍(井邑)은 조선의 궁중음악으로 그대로 전승된다. 조선에서도 무고를 출 때 여기(女妓)들이 정읍사(井邑詞)를 창사로 불렀기 때문에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편찬한 《악학궤범》에 그 노랫말이 기록되었다. 악보는 영조 때 편찬한 《대악후보》에 기록되어 전한다.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정읍사(井邑詞)
정읍사(井邑詞)는 현전하는 가요 중 한글로 기록된 가장 오랜 작품이기에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학창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등학교 참고서를 찾아서 그 내용을 정리 해 보았다.
지금 사용하는 말이 아니기에 훈민정음으로 적힌 정읍사(井邑詞)를 해석에 있어서는 몇 가지 논란거리가 있다. 그 첫 번째는 ‘全 져재’이다. 이 全저재를 전주(全州)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노랫말은 모두 훈민정음으로 기록했는데, 이 한 단어만 한자 전(全)을 써서 전주라는 지명 표현했다고 보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
두 번째는 ‘져재’를 저자 즉, 장터로 보는 시각으로 《고려사》에 남편의 직업을 행상(行商)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남편이 간 곳을 장터로 추정한 해석이다. 이에 따라 ‘저재 녀러신고요’를 ‘장터에 가 계신가요’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전주대학교 역사학자인 송화섭 교수는 현지답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추정을 내놓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정읍시 샘실마을 지형(출처 : 송화섭교수 논문)
남편이 찾아간 장터가 샘실 10리 이내 거리의 고부장이거나 줄포장이었을 것으로 보면, 이동한 경로는 샘실을 출발해 동죽재(東竹峙)와 하늘재(天峙)를 넘는 코스가 된다. 이 추측에 따라 부인이 남편을 기다린 곳을 추정하면 그 곳은 지금의 부엉바위가 되고, 당시 기록의 망부석을 이바위로 특정할 수 있게 된다. 송교수는 그곳에 올라선 부인이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바라본 곳은 아마도 하늘재(天峙)였을 것이므로 ‘져 재’는 ‘저자’가 아니라 저 재(고개)라고 볼 수 있다는 해석을 내 놓았다. 본 필자의 해석도 이를 따랐다.
세 번째는 ‘어느이다노코시라’의 해석인데 ‘어느 곳(것, 누구)이나 다 놓아 버리십시오.’로 해석하기도 하고 ‘(짐을) 어느 곳에다 놓고 (쉬고) 계신가요’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본 필자의 귀에는 ‘다노코시라’가 ‘다 놓고 오시라’는 말로만 들렸다.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는 부인 입장에서는 어두워져 발 잘못 디디면 위험하니 ‘빨리 (장사의 미련일랑) 다 (내려)놓고 오시라’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어느이’의 해석을 생각해 보았다. ‘빨리’를 다른 말로 얼른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고 이의 전라도 방언으로 언능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이에 힌트를 얻어 ‘얼른 다 놓고 오시라’라로 용감하게 해석에 동참해 보았다.
네 번째는 한자 前腔, 後腔全, 過篇, 金善調, 小葉의 해석인데, 강(腔)과 엽(葉)은 악곡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고려속요와 조선 초기 성악곡에 사용되었다. 강은 악곡의 본체를 엽은 강의 뒤에 따라오는 부분을 말하는데, 강에는 전강, 중강, 후강의 삼강이, 엽에는 대엽, 중엽, 소엽 등등 여덟 가지가 있어 작품마다 일정한 순서를 지닌 채 출현한다. 삼강과 소엽으로 이루어진 악곡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전강+소엽, 중강+소엽, 후강+소엽의 구조를 지닌다 볼 수 있으나 정읍(井邑)은 전강+소엽, 후강+( ), 과편+금선조+소엽의 구조를 하고 있다. 정읍(井邑)에서 후강(後腔)에 전(全)이 붙은 이유에 대해서 후강 뒤에 후렴에 해당하는 소엽(小葉)이 없이 후강만 존재하는 점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후강이 전부(全部)라는 뜻으로 후강전(後腔全)이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편(過篇)과 금선조(金善調)에 대한 해석은 정읍(井邑)이 다른 이름으로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수제천(壽齊天)의 음악의 뒷부분의 변화에서 찾는다. 정읍(井邑)의 금선조(金善調)에 해당하는 뒷부분은 앞부분보다 4도 높게 변조되는데 이렇게 음을 높게 연주하는 조를 ‘쇠는 조(調)’라고 한다. 쇠금(金)에 ~ㄴ의 의미로 선(善)과 악조 의미로 조(調)를 조어하면 金善調가 되므로 ‘쇠는 조’를 한자로 조어한 것을 금선조(金善調)로 볼 수 있다. 과편(過篇)은 본래의 조에서 금선조로 음을 높게 변조하기 위해 경과하게 되는 음악형식을 명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읍(井邑)이 수제천(壽齊天)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환란을 겪은 후 조선 후기 궁중음악은 위축된다. 악사의 수가 줄어 악기편성이 축소되다 보니 선율과 리듬도 변하고, 악곡의 수도 감소한다. 아무래도 노래를 부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성악곡(聲樂曲)은 점차 노래가 사라지고 기악곡(器樂曲)이 된다. 이 무렵부터 정읍(井邑)도 노래는 사라지고 악기로만 연주하게 되었다. 때문에, 영조 때 세종시대의 음악을 정리한 책인 《대악후보》에도 노래 없는 악보만 기록되게 된다.
순조 때부터는 궁중음악에 통상의 속명(俗名)보다 운치 있게 지어 붙인 아명(雅名)을 사용하는 풍조가 생겼는데, 이에 따라 정읍(井邑)도 대명지곡(大明之曲), 경신년지곡(慶新年之曲), 제수창지곡(帝壽昌之曲), 중명지곡(重明之曲), 천보지곡(天保之曲), 헌선음지곡(獻仙音之曲) 등의 아명이 사용된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수제천(壽齊天)이란 아명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수제천지곡(壽齊天之曲)이란 아명이 등장한 것은 순조 28년 때가 처음이긴 하지만 이 곡은 정읍(井邑)이 아니라 영조 때부터 영산회상의 별칭으로 사용한 향당교주(鄕唐交奏)란 곡이었다. 향당교주 이외에 이 아명이 쓰인 경우는 고종황제 때로 당악(唐樂)인 낙양춘(洛陽春)의 아명으로 사용된 바가 있었다.
수제천(壽齊天)이 본격적으로 정읍(井邑)의 이름을 대신하게 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소속의 연주자들이 음악적인 기량 향상을 위해 이습회(肄習會)라는 내부 연주회를 가졌는데 총 135회의 이습회 중 20회 정읍(井邑)을 연주하면서 일관되게 곡명을 수제천(壽齊天)이라 하였다. 이 뒤부터 정읍(井邑)은 수제천(壽齊天)으로 불리게 된다.
수제천(壽齊天)을 고려의 음악으로 소개한 일부 음악 교과서
수제천(壽齊天)은 초·중·고 음악 교과서에서 감상곡으로 다룰 만큼 학교 교육에서도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백제의 음악 정읍(井邑)의 노랫말은 정읍사(井邑詞)로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우고 음악은 수제천(壽齊天)이라 하여 음악 시간에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두 작품의 명칭의 차이 때문에 별개의 작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게다가 몇 몇 음악 교과서에서는 수제천(壽齊天)을 백제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음악으로 소개하고 있어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문학 시간에는 정읍사(井邑詞)를 백제의 노래로 배우고 있는데 음악 시간에는 같은 곡을 고려시대 음악이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악지에 소개된 음악이고, 고려 궁중정재 무고의 반주음악었으니 고려시대 음악이 맞다 주장 한다면, 정읍사(井邑詞)는 《악학궤범》에 실렸으니 조선시대 작품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된다. 백제의 노래 정읍(井邑)의 노랫말 정읍사(井邑詞)와 그 반주음악 수제천(壽齊天)이 어찌 서로 다른 시대 작품이 될 수 있겠는가. 수제천을 고려 음악이라 소개한 교과서 집필진을 위해 정읍(井邑)은 《고려사》 악지에 삼국속악 중 백제의 노래로 소개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 둔다.
수제천(壽齊天)은 거의 모든 음악 교과서에서 감상곡으로 다룬다. 교과서에서는 안내하는 감상의 주안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감상할 때 들리는 악기의 종류에 귀 기울여 감상한다.
둘째, ‘연음 형식’이라고 해서 주선율을 연주하는 피리가 숨을 고르는 동안 다른 악기들이 피리의 쉬는 공간을 채워주는 연주를 하는 기법이 있는데 그 형식이 출현하는 곳을 찾아보며 감상한다.
셋째, 느리게 연주되는 궁중음악의 경우는 장구로 반주할 때 ‘덩’을 열편과 궁편을 동시에 치지 않고 열편의 ‘기덕’과 궁편의 ‘쿵’이 소리가 나뉘어 나도록 갈라치는데 이런 장구 소리를 구분해 감상한다.
독자들도 이 감상 포인트에 유념하며 오늘의 주인공 수제천(壽齊天)을 감상해 보았으면 한다. 수제천(壽齊天)은 보통 춤을 반주할 때는 삼현육각이라고 하여 향피리 2, 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만 편성하여 연주하는데, 왕세자가 거동할 때나 궁중 연례악으로 쓰일 때는 아쟁, 소금 등의 악기를 추가하고 대규모의 악대로 편성하여 연주한다. 삼현육각의 춤 반주가 아닌 대규모 편성의 수제천(壽齊天)을 감상해 보면 그 남다른 웅장함이 색다른 감동을 줄 것이다. 필자의 아래의 링크 선곡이 독자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길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수제천 감상(https://www.youtube.com/watch?v=OANnUZVjfLE)
추신)
아래 내용은 국악에 대해 좀 더 깊은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해당하는 읽을거리이다.
● 《악학궤범》에 따르면 정읍(井邑)은 무고 외에도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의 반주에도 쓰였는데 오방처용(五方處容)이 변화된 춤을 추는 것을 정읍무(井邑舞)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읍(井邑)은 다양한 춤의 반주 외에도 왕세자의 행궁음악이나 궁중 연례악 등 다양하게 쓰였다.
● 무고(舞鼓)의 노랫말은 중종 때 오관산(五冠山)이란 효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바뀐다. 가사가 바뀌었으니 음악도 변화가 있었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노랫말이 사라진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무고의 반주음악은 향당교주(鄕唐交奏)로 바뀌었다. 병약한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했던 효명세자는 부왕의 4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무고정재에 새로운 창사를 짓기도 했는데 이 한시로 된 창사를 얹은 음악은 정읍(井邑)과는 무관했다 한다.
● 정읍(井邑)은 악조가 남려(南呂)를 주음으로 하는 계면조(界面調)인데, 《악학궤범》에서는 남려를 주음으로 하는 악조를 횡지(橫指:우리말로 ‘빗가락’)라 하였다. 이를 연관하여 1930년대 악사들은 정읍(井邑)을 ‘빗가락 정읍’이라 별칭하기도 했다.
● 고려시대에서 조선의 궁중정재로 채택된 춤은 무고(舞鼓) 이외에 동동(動動)과 무애(無㝵)까지 세 가지이다.
● 동동(動動)의 창사인 동동사(動動詞)는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월령체(月令體:혹은 달거리)라고 하여 1월부터 12월까지 계절변화에 따라 표현한 재미있는 노래라 문학 교과서 고려속요로 소개되어 있다. 이 창사는 중종 때 폐지가 되어 자연스레 춤의 이름도 조선 후기에는 아박무(牙拍舞)라는 명칭으로 바뀐다. 무용수들이 상아로 만든 박인 아박(牙拍) 들고 추는 춤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숙종때는 아박(牙拍)의 정재 반주 음악로 정읍(井邑)이 쓰이기도 하였다. 원래 동동(動動)의 반주음악 자체가 정읍(井邑)이 편곡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무애(無㝵)는 《삼국유사》따르면 신라의 원효가 만들어 포교에 활용했다고 하는 호리병을 들고 추는 춤이다. 세종 때 금지되었다가 순조 때 음악과 춤에 조예가 깊었던 효명세자에 의해 다시 연희하게 되었다. 궁중정재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이종구, 『아무도 말하지 않은 백제 그리고 음악』, 주류성, 2016
천재교육, 『해법문학 고전시가』, 천재교육 출판부, 2017
임미선, 「정읍(井邑)의 창작시기와 전승과정」, 『한국음악연구』 42집, 2007, 271~291쪽
김영운, 「수제천의 역사적 변천과 음악문화적 가치」, 수제천 발전방안 연구용역, 행안부 정책연구 관리시스템(https://prism.go.kr/homepage/researchsrch/totalSearchProgress2.do), 2019
김영운, 「정읍(井邑)과 수제천(壽齊天)의 제문제 - 지역성과 갈래의 성격 및 형식ㆍ악조 등을 중심으로 -」, 『한국음악연구』 60집, 2016, 21~46쪽
김영운, 「정읍(井邑)에서 수제천(壽齊天)으로, 그 곡명의 변천 과정」, 『한국음악연구』 67집, 2020, 5~33쪽
문숙희, 「조선전기 동동(動動) 가무악(歌舞樂) 융합 연구」, 『한국문학과 예술』 28집, 2018, 5~38쪽
송화섭, 「백제 가요 정읍사의 역사적 배경지 고찰」, 『호남학』 60호, 2016, 43~81쪽
한영숙, 「역사ㆍ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수제천의 감상 지도내용 연구」, 『국악교육연구』 17집 1호, 2023, 199~232쪽
국립국악원 추천 음악 - 듣는 모든 이에게 하늘처럼 영원한 생명이 깃들기를. "수제천"
(https://www.youtube.com/watch?v=OANnUZVjf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