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지킴이 강신구의 명인탐방: 원로무용가 양정화와 딸 박상희
양정화와 그 딸 박상희의 내림 춤꾼 이야기
양정화는 1936년생이며 일찍이 7세때부터 무용에 입문하게 된다. 14세에 김동민(1910~1999)과 강태홍으로부터 전통춤을 추며, 1950년대 이후 무용계 1세대에게 사사받았으며,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서울에서 활동하셨던 강이문, 정무연, 박금슬, 강선영, 이매방, 김진걸, 김숙자에게서 수건춤, 무녀춤, 승무, 살풀이, 입춤 등 전통춤의 여러 작품을 배우며 끊임없이 추어 왔다.
양정화의 춤 인생을 자세히 소개하면, 1956년 부산 고려무용학원을 시작으로 80여년의 춤 인생을 살아 온 현존 무용가로 가장 연로하신 분이다. 또래의 무용가로는 이현자, 정명숙이나 모두 고인이 되어 어언 90세에 이른 1.5세대의 어른이라 하겠다.
작고한 정명숙 명무와 양정화 명무
양정화는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친 암울한 시기에 선대 어른들이 지녀 온 전통민속무용의 다양한 작품을 직접 배우고 전수해 온 산증인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근현대를 통해 사라져 가거나 잊혀져 가는 우리 전통춤의 계보와 맥을 완연히 이어가는 현존 몇 안되는 원로 무용가이다.
혹, 우리 춤의 근대화 과정에서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거나 서구문화가 유입된 시기로 모호한 부분도 없지는 않으나, 1920년대 후반 최승희, 조택원, 석정막(石丼莫)에게 사사한 신무용 공연으로 혼란의 시기 이후, 우리 춤의 전승과정의 많은 변질과 1960년대 새로운 정부의 탄생으로 많은 우리 전통춤이 자리를 앓은 있음에도 양정화는 올곧게 열정으로 면면이 이어 온 뿌리 깊은 무용가라 하겠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요즘에도, 연구소를 드나들고 그의 딸인 박상희에게 많은 공을 들이는 모습은 모녀 전승의 힘을 쏟는다고 보아진다.
양정화 명무
양정화의 춤 이력을 살펴보면,
-1943년 7세부터 강태홍, 김동민으로부터 전통춤 <무녀춤, 굿거리춤, 입춤> 사사
-1956년 부산고려무용학원 개원(서울, 부산) 현재 서울 봉천동에 전수소 운영
-1959년~2023년 150여회 공연 활동, 제자 600여명 배출
-1970년부터 강선영, 이매방, 김진걸, 최현, 이동안, 송범 등으로부터 무당춤, 태평무, 산조, 입춤, 신무용 사사
-1980년~ 서울, 부산, 여수 등 전국 규모 개인 및 모녀 춤판 공연
특히 무녀춤은 무속의례인 굿판에서 무당이 추는 무격무를 무대화한 것으로 강렬한 복색과 동작으로 양손에 방울과 부채를 들고 신들린 무당이 추는 삶의 기본적 애환과 소원을 다루기 위한 명복 발원의 신앙적 기원무라 하겠다.
독무 또는 군무로 추는데 음악의 장단에 따라 뛰는 동작, 좌우를 반복하며 도는 연풍대 등에서 신명풀이의 신성스런 몸짓과 삶의 진정함에 몰두하여 추어지고 고난과 역경을 넘어 환희의 기쁨을 안으려는 의도가 무속적 삶과 함께 어울어 진 춤이다.
양정화는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친 암울한 시기에 윗대 어른들이 지녀 온 전통춤의 다양한 진면목을 직접 배우고 익힌 산증인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근현대를 통해 사라져 가거나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전통춤의 계보와 맥을 완연히 이어 가는 현존 몇 안 되는 정통 원로무용가이다.
전통과 신무용의 세대를 두루 익힌 진정한 춤꾼
양정화는 1956년부터 시작된 2세대 무용계 입문 속에서 데뷔하여 피난시절의 그 역경을 딛고 1960년대 무용계의 새로운 주축이 되면서 근현대 한국무용사에 괄목만할 일을 치룬 셈이며 국내외로 두각을 나타내며 무용가로서의 진면목을 갖추며 활동을 왕성하게 나감으로서 영남지역에서는 단연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서울에서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며 한때는 학원의 화재로 고전을 겪음에도 80년대는 서울에 다수의 무용학원을 개설하며 춤 교육의 열정을 쏟았다. 특히 재일동포를 위한 공연을 자주 갖게 되며 믾은 작품 활동에 전념케 이른다
이 시절에 서울에서는 김천흥, 김진걸, 이매방, 이동안, 박금슬, 전황, 최현, 정민에게서 승무, 태평무, 살풀이, 입춤, 무당춤, 교방춤, 신무용에 이르기까지 전통춤을 사사받으며 어린 딸 박상희에게도 전수를 하게 이른다.
1983년경 서울 강남 대치동에 빌딩을 구입, 무용교육에 많은 열정으로 후학들을 배출하며 안정된 생활권에 진입하여 일생에 가장 왕성한 활동으로 1986년 한국국악협화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하는 기회와 전주대사습대회의 심사위원 활동과 전국 각지에서 펼처 지는 국악, 무용경연대회의 심사와 집행위원 등의 활약이 이루어진다.
전주대사습대회 심사장면
1990년대 들어서는 “양정화의 춤판”이 본격적으로 지방과 서울을 비롯 일본에서의 활약은 무용계에 가장 두드러진 활약의 시대라 보겠다. 무용가로서는 TV 출연으로 “우리춤 우리가락” “국악 한마당”에 최다 출연자로 특히 무당춤, 승무, 살풀이춤, 화관무, 장고춤, 부채춤, 산조 등은 무용계에 대표적인 주 출연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국빈 방문한 말레이시아 수상 방한 시 기념공연을 했는가 하면 국립국악원에서도 개인 발표회를 열었으며 1991년 9월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초청 공연과 러시아 엘친대통령 방한기념 공연을 청와대 초청으로 하게 되었고, 1990~2010년대엔 한국무용가로서는 TV방송 최다 출연자로 정평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사진 참조>
이후 자리를 잡아 다시금 서울과 부산에서의 공연, 부산 MBC방송국 개국 기념공연 춤 안무와 일본 NHK방송국 초청 재일동포 위문공연, 요코하마 국립극장, 오사카 중앙극장에서 제자들과 중앙대 이정희무용단이 함께 출연하는 등, 1990년대는 바쁜 공연활동으로 우리 춤 전승과 보급 사업에 크게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긴 바가 크다 하겠다.
2000년대 들어서도 일본 고로시시, 히로시 초청공연 오사카 3.1절 기념공연, 그밖에 부산 금정문화회관, 여수시 초청공연, 2002 부산아시안게임 축하공연으로 성공적인 무대를 마련하며 제350회 중요무형문화재 무대종목, 양정화의 전통춤 공연과 그해 9월에는 “양정화의 모녀 춤판”이 성대하게 올려졌다.
1988년 12 무용인 송년의 밤. 세종호텔
이후 2002년~2007년까지 해마다 국립국악원과 코우스에서 <모녀 춤판>을 펼쳤고 2018년는 전남무용제에 초청을 받아 “양정화의 모녀 춤판“을 갖는 등 다채로운 무용 활동을 펼쳤다.
양정화는 한국전통춤을 주요 작품으로 추었으며, 1950년~1970년대에는 신무용시대를 맞아 시대에 부응하기도 핬다. 과거 1960년대는 전공의 장르가 애매한 시기를 감안함에 따라 전통과 신무용이 혼연되고 수용되었기에 우리의 무용분야 시대상은 전 장르의 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6.25동란 이후 전국 각지에서 외국무용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많이 연희되면서, 특히 해외 유학파로서 외국 춤을 직접 접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부산으로 피난 온 박금슬, 정무연과 같은 스승을 만날 수 있어 외국 춤의 세계도 배우며 감성을 느끼게 된다. 이후 우리 춤의 맥과 뿌리에 열정을 가지며 더더욱 매진케 이른다.
한국무용가로서 한평생을 춤추며 제자 양성과 그 후계로 딸에게 온 힘을 쏟으며 오늘도 매진하며 우리 춤의 소중함과 전승의 가치를 깨달음으로 제대로 전통춤에 대한 확고한 자세와 자리를 잡아야 함을 갖고 있다.
참고로, 그의 대표적인 창작품으로는 회상, 여심, 산과 바다, 산 색시, 아리랑 연곡, 광대의 노래, 신 뱃놀이 등 여러 편이 넘는다
무<巫>에서 무<舞>로 ‘끼’를 풀어 낸 80년의 춤 인생
특히 오랜 경험과 인습을 통한 전통춤으로는 승무, 살풀이, 무녀춤, 검무, 장구춤은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김동민’의 전통춤 무법과 장단 속에서 흐르는 우리 춤의 뿌리를 한층 터득한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관계로 오늘날 양정화의 자신의 추는 춤은 양정화류 ‘무녀춤(무당춤)’과 ‘장구춤’
그리고 ‘한량무’를 들 수 있다. 이를 이어가는 딸 ‘박상희’를 주목할 인물이라 본다.
88올림픽 이후 2000년대 초, 우리 전통 춤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과 예술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문화재법(문화유산법)으로 보호받는 전통 춤을 무용계에서 다시금 소중하고 전승의 가치가 팽배되는 시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양정화와 박상희의 춤에 대한 확고한 방향과 뿌리가 내려 지리라 본다.
전통예술평론가 강신구는 양정화의 춤에 대해 “양정화는 아름다움보다는 춤 속에 깊이 파고 들어 자기의 멋과 흥을 자아내는 자신만의 예술적 미가 담겨 있다”라고 평가한다.
당대의 여러 선배들께 춤 학습을 했으나 독자적이며 전통을 바탕으로 한 깊은 멋을 이미 갖춘, 팔 만 들어도 춤의 공력을 알 수 있듯, 선은 굵고 무겁게 모녀의 춤이야 말로 춤태는 전통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라 본다.
양정화는 “네가 추는 우리 전통춤은 김동민, 이매방, 김진걸류 춤 성향과는 맥은 같으나 똑같은 춤의 흐름보다 내 성품과 다소 감정의 변화를 표출하는 과정에서 보자면,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로우며 즉흥성도 감안하여 시대적 환경과 장소에 따라 춤의 특성을 멋을 드러내고 춘다”라고 했다.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잘 표현해 내는 정(靜)과 동(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작은 흩트럼 없이 차분하게 보이지만 격정어린 모습이 춤 속에 스며 들어 있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지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원초적인 움직임 뱃속에 어린 아이처럼, 손을 들고 어깨를 좌우로 움직이지만 감정을 편하게 표현해 내는 점이 양정화와 모녀의 춤 특징이다. 스스럼없이 자연의 변화와 생명력이 내재된 춤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네 자연 속에 곡선의 미를 볼 수 있다.
박상희 명무
딸 박상희의 춤 이력을 살펴 보면,
- 경희대 무용학과 졸업
- 서울시립무용단 수석단원 역임
- 1999. 11. 여수국제영화제 한국무용 안무, 출연
- 2002. 4. 일본오사카 건국학교 초청 3.1절 특별공연
- 2002. 4. 한국민속박물관 초청공연 <박상희의 춤판>
- 2003. 6. 경기문화재단 전통예술무대 <박상희의 춤판>
- 2004~2006 한국마사회 무용단장
- 2006~2007 덕성여대 무용학과 교수 역임
- 2007~8 한국국제예술원 전통무용과 교수 역임.
- 2010~ 현재. 예혼무용단 상임안무자
양정화와 딸 박상희는 80년과 50년의 춤 세월 속에 삶의 질곡을 대처해 오는 것과도 같음이 춤의 본질과는 마치 대별되듯 우리 춤의 희로애락과 통과의례를 보게 되는데, 이는 우리 인생의 겹을 올곧이 표현해 내는 듯하여 겸허함을 갖게 한다.
박상희의 태평무
모녀의 춤 인생을 비추어 볼 때 국가무형유산의 보유자 지정에 늦음을 눈여겨 볼 사안이라 진단해 봄직도 하건만~~~ 원로무용가 양정화 선생님의 건강과 중견 무용가로 자리잡은 박상희의 진로에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