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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눈 내린 길, 매화가지에 걸린 기억... 제45회 박록담의 시주풍류 ‘매화가지에 걸어놓은 불망기’

단가 ‘사철가’, 시주풍류의 문을 열다.. 12가지 시음주와 12가지 계절 안주
피리와 가야금, 눈 내리는 날의 소리
판소리 ‘심봉사 눈 뜨는 대목’, 그리고 매화 한 가지

 

눈 내린 길, 매화가지에 걸린 기억... 제45회 박록담의 시주풍류 ‘매화가지에 걸어놓은 불망기’

 

제45회 박록담의 시주풍류 ‘매화가지에 걸어놓은 불망기’를 참석하기 위해 예산으로 향하는 길, 하늘에서는 눈이 쏟아졌다. 흩날리는 눈발은 마치 꽃잎처럼 길 위를 덮었고, 그 풍경은 행사를 향한 기대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렸다.

 

이날 행사는 사단법인 한국전통주연구소가 주관한 제45회 시주풍류로, 예산군행복마을지원센터에서 열렸다. 시와 서화, 술과 음식, 전통음악이 어우러지는 시주풍류는 전통 음주문화의 깊이를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자리다.

 

“오늘 내린 눈은 하늘이 내려준 큰 복”

 

행사의 문을 연 것은 박록담 사단법인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의 인사말이었다. 그는 주제를 정할 당시 눈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다며, 이렇게 눈이 펑펑 내려준 오늘을 “하늘이 내려준 큰 복”이라 표현했다.

 

박 소장은 ‘매화가지에 걸어놓은 불망기’라는 주제에 대해, 불망기란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는 기록이라며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고, 나눈 대화와 감정을 오래도록 가슴에 간직해 훗날 다시 만났을 때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위를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매화를 떠올리며,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약속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박록담 사단법인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

 

또한 그는 술에 대해 “흥청망청 취하는 자리가 아니라, 좋은 자리에서 한 잔의 깊이를 즐기는 문화”를 강조하며, 오늘의 감동이 남는다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과 진정한 풍요를 나누는 술자리를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추운 날씨를 고려해 소주 세 종류도 준비했다며, 마음껏 즐기길 바란다는 인사로 분위기를 열었다.

 

단가 ‘사철가’, 시주풍류의 문을 열다.. 12가지 시음주와 12가지 계절 안주

 

인사말에 이어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인 윤진철 명창과 박시양 명고의 단가 ‘사철가’가 울려 퍼졌다. 사계절의 흐름 속에서 인생을 낙천적으로 살아가라는 내용을 담은 사철가는 시주풍류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며, 참석자들의 마음을 단숨에 풀어놓았다. 이 한 곡만으로도 이날 자리에 대한 기대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인 윤진철 명창

 

이날 상에는 환영주 ‘천금의 시(청주)’를 시작으로 미로(탁주), 천진난만(탁주), 꿈의 대화(청주), 지란지교(청주), 일지춘(청주), 화전일취(청주), 천비향(청주), 청명주(청주), 겨울소주(소주), 일엽편주(소주) 등 총 12가지 시음주가 차례로 올랐다.

 

 

 

이에 어울리는 안주 또한 정성스럽게 준비됐다. 채소잣무침, 육근탕, 나복채, 굴찜구이, 건과일과 정과, 새우볼 당근퓨레, 생치전, 흑미주악, 수정과, 소고기파산적, 침채 메밀만두까지 12가지 계절 안주가 술과 함께 이어졌다. 겨울 제철 식재료와 고조리서의 맥락을 살린 안주 구성은 그야말로 산해진미였고, 전통주와 만나 잊기 어려운 한 상을 완성했다.

 

피리와 가야금, 눈 내리는 날의 소리

 

공연은 윤진철 명창의 단가를 시작으로 유현수 명인의 피리 독주 ‘상령산풀이’로 이어졌다. 피리 특유의 깊고 곧은 선율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천천히 흔들며 술자리를 한층 깊게 만들었다.

 

유현수 피리 명인

 

이어 송영숙 명인이 연주한 황병기 작곡의 가야금 18현금 ‘춘설’은 이날의 백미였다. 일반적인 가야금 소리와는 다른 음색으로, 막 내려앉은 눈과 어우러져 제목 그대로 ‘봄눈’을 절절히 느끼게 했다. 눈 내리는 풍경과 음악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송영숙 가야금 명인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른 유현수 명인은 강원도 아리랑을 피리 독주로 신명 나게 풀어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관객들의 흥은 절정으로 향했고, 풍류를 즐기기 위해 모인 이들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판소리 ‘심봉사 눈 뜨는 대목’, 그리고 매화 한 가지

 

마지막 무대는 판소리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이었다. 윤진철 명창의 소리와 박시양 명고의 북은 그야말로 신들린 호흡으로 이어졌고, 자리를 떠나기 아쉬워하던 참석자들의 마음을 진하게 붙잡았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윤진철 명창과 국가무형유산 판소리고법 보유자 박시양 명고

 

특별한 순간도 있었다. 윤진철 명창은 소리뿐 아니라 뛰어난 그림 솜씨로 여러 차례 전시를 연 바 있는데, 이날 즉석에서 행사 제목과 어울리는 매화 그림을 그려 선보였다. 그 매화 그림은 추첨을 통해 참석자 이근정(출판인) 씨에게 전달되며 또 하나의 ‘불망기’로 남았다.

 

윤진철 명창과 이근정 씨

 

제45회 박록담의 시주풍류 ‘매화가지에 걸어놓은 불망기’는 그렇게 눈 내리는 겨울날, 술과 음식, 소리와 기억이 겹겹이 쌓인 자리로 마무리됐다. 매화가지에 걸어두듯, 쉽게 잊히지 않을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