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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6]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6]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광대와 재인청 1

 

조선조 최고의 예술기관, 재인청
경기 장단, 전라 소리, 경상 춤이란 규정적 평가가 있다. 여기서 ‘경기 장단’은 예로부터 경기 무악 장단이 다른 지역 장단보다 화려하여 뭇 청중들을 사로잡았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구의 경우, 한 20년 치면 “겨우 눈을 떴구먼!” 했단다. 경기 장단이 워낙 명성을 떨치다 보니 출신이 경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맷돌로 장단을 익혀 세 개를 닳아 없애면 장고의 고수로 인정하여 ‘왕산이’라 불렀다. 여기에 더해 유명한 춤꾼이나 세도가에서 꼭 찍어 부르는 유명세까지 업으면 ‘제공원提控員’이라 했다. 이 수준을 넘어서면 ‘제법사諸法師’라 하였는데, 이 칭호를 얻은 자만이 제자를 두고 가르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경기 장단’의 명성은 엄청난 시간과 피땀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명성의 배후에는 재인청 예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재인청의 교육과정은 장단뿐만 아니라 춤, 판소리, 줄타기, 민요, 기악, 재담, 연희 등등 가무백희歌舞百戱를 망라한 것이었다. 교육의 성취 정도와 조직 운영을 위한 상벌 방식도 특별했다. 일정 수준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계원에겐 마치 과거에 급제한 양반처럼 무려 3일간이나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울리며 시가행진을 벌여주었다 한다. 반면에 위계질서를 어긴 계원에겐 ‘손도법損徒法’이라 하여 그 누구도 삼 년간은 말을 건네지 않아 고립시켰다 하니, 재인청의 교육 수준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재인청의 교육과정과 내용이 이렇게 엄격하였던 것은 소속 광대들이 국가 축제를 담당했던 전통의 광대 집단의 후예들이었고, 후예였던 만큼 전래의 전통적인 훈련방식과 과정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던 축제의 문화는 조선 건국과 함께 현저히 축소되었고, 이런 시대 조류 때문에 광대들은 지역 단위의 자체 생존전략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광대들은 광해군 폐위와 함께 산대희山臺戱를 폐지시킨 인조에 이르러 그들만의 조직으로 전락하는 길을 걸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1824년, ‘사신 맞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위해 팔도의 광대들을 소집하고 전국 조직을 만들면서 통일시킨 이름이 ‘재인청’이다.

 

이 저간의 사정을 잘 알려주는 기록이 있어 적어둔다. 재인청의 수장인 도대방都大房과 지도부였던 선생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아쉽게도 훈서訓書의 내용만 남았는데 화자話者는 재인청에 닥친 위기에도 소명을 다해야 한다고 소속 4만 계원에게 호소하고 있다. 180년을 넘은 이 호소를 2020년대를 사는 오늘도 여전히 내 가슴에서 울리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아! 우리 계원 4만 명은 어찌 스스로 서로를 멸시하고 규약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대개 우리들이 맡은 것은 나라에서 중국의 칙사勅使가 올 때, 산대희를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인청에 참가하여 순번대로 관가의 공역公役에 응하는 것이고 사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섬겨 우리들을 살찌우니, (중략). 갑진 이후에 조산造山의 규칙이 깨지자 우리 무리들도 곧 한산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여전히 관가의 공역에 응하고 또 청내(재인청 내부-필자 주)에 규칙을 세웠으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하고 태만하겠는가? (중략). 아! 오직 우리 경기도 계원들만도 대략 4만 명이니 모두 재인청의 훈계를 따르고 우리의 약속을 쫓는다.’ -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唱才都聽案(1836)」 중, ‘訓書’에서

 

 

재인청은 조선 광대들의 결사체이자 동시에 조선 팔도의 유능한 예인들을 모아 광대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가르쳤던 최고의 교육기관이기도 하였으나 그 교육 시설에 대한 실체적 기록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정조대왕의 부왕 사도세자에 대한 사랑으로 지어진 화성행궁에는 정조의 사후, 그 곁에 어진을 봉안한 ‘화령전’을 세웠는데 선생께서 여기서 후진들을 가르친 세월이 있어 사진으로 소개한다. 위는 화령전의 전경이고 아래는 선생께서 거처한 화령전의 한켠인 풍화당이다. 필자는 이 풍화당의 대청을 무대로 선생 앞에서 춤을 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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