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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영국악상] 이영희 명인, 제31회 방일영국악상 수상… 국악계의 빛나는 업적과 헌신

 

이영희 명인, 제31회 방일영국악상 수상… 국악계의 빛나는 업적과 헌신

 

2024년 11월 26일, 국악계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이영희 명인이 제31회 방일영국악상을 수상하며, 그의 평생 헌신과 업적을 기념하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자리가 마련되었다.

 

서울 코리아나 호텔 글로리아 홀은 이 날,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150여 명의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축하와 감사의 마음이 어우러진 가운데, 이영희 명인은 한국 국악의 뿌리를 지키며 꽃을 피워온 자신의 긴 여정을 돌아보며 감동의 순간을 맞이했다.

 

 

김성녀 씨의 재치있는 사회로 시상식장은 국악의 전통을 기리는 깊은 울림이 홀 안에 가득 찼고, 이는 단순한 시상식이 아니라 전통예술의 가치를 함께 나누는 특별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국악인 김성녀

 

예향 군산에서 태어난 이영희 명인의 성장 배경

 

이영희 명인은 예향(藝鄕)으로 불리는 전북 군산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전통문화의 매력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다.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이면 풍장꾼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연주와 퍼포먼스에 매료되었고, 12살에는 군산의 유명한 춤꾼 도금선을 보고 춤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승무, 바라춤, 살풀이 등 다양한 전통 춤을 군산의 명기 김향초에게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막내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이는 이영희 명인이 전통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는 데 큰 응원과 격려가 되었다.

 

군산의 풍류 명인이었던 이덕열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우며 국악의 길에 들어선 그는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가야금 산조에 매료되어 권번을 찾아가 이운조 선생에게 본격적으로 산조를 배웠다. 이 경험은 그가 국악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악 교육자로서의 길

 

1958년, 이영희 명인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가야금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덕성여자대학교 국악과를 찾아가 김윤덕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김윤덕 선생의 운현궁 연구소에서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를 배우며 국악에 대한 전문성을 쌓아갔다.

 

이화여대 재학중이던 이영희 명인

 

대학교 3학년 때는 한일섭 선생에게 아쟁을 배우기 시작했고, 4학년 때는 전국신인 방송국악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며 국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초대 박헌봉 교장의 발탁으로 국악예술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에 나섰다.

 

국악예술학교에서 그는 김윤덕, 성금연(가야금), 한영숙(무용), 지영희(해금), 박귀희(판소리) 등 당대의 명창들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며 국악 교육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 시절의 교육 커리큘럼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전통예술을 배우게 하여, 다재다능한 국악 1세대들을 배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0년 이상 교직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넘기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결단은 후학들에게 깊은 감동과 존경을 남겼으며, 그가 양성한 제자들은 오늘날 국악계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했다.

 

방일영국악상 윤미용 심사위원장의 심사평

 

윤미용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장은 “이영희 명인은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의 전승과 보급에 평생을 바치며 국악계에 큰 족적을 남기셨다”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방일영국악상 윤미용 심사위원장

 

“이 명인은 후학 양성과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으로 단순히 개인의 성취를 넘어 국악계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심사위원은 다섯명으로 한예종 김영재교수, 김영운 전 국립국악원장, 유영대 전북도립국악원장, 임미선 단국대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윤미용이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모두가 만장일치로 이 명인을 수상자로 선정했으며, 이는 그가 보여준 헌신과 업적의 결과입니다.”라고 밝혔다.

 

박범훈 석좌교수의 회고: 인생을 바꾼 국악과의 만남

 

박범훈 동국대 석좌교수는 수상 축하의 글에서 이영희 명인과의 인연을 회고하며 국악 인생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소개했다.

 

“저는 중학교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다 국악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당시 국악에 대해 전혀 모르던 저는 대금 전공을 희망했지만, 당시 예쁜 누나같은 이영희 선생님께서 키가 작고 손도 작다는 이유로 피리반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순간은 제가 피리를 전공하게 된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사건이었습니다.”

 

박범훈 동국대 석좌교수

 

박 교수는 이어 “피리를 시작한 덕분에 지영희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고, 그의 지도 아래 피리, 작곡, 지휘로 이어지는 제 음악적 여정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라며, 이영희 명인의 결정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영희 명인의 감동의 답례

 

이날 시상식에서는 이영희 명인의 제자들이 축하 공연을 펼쳤으며, 이 명인은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를 연주하며 감사의 뜻을 답례로 전했다. 그의 연주는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고, 국악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 시상식에 참석해 이영희 명인의 연주를 감상한 대구대학교 김성애 명예교수의 감상평을 소개한다.

 

선생님께서는 가야금을 연주하시지 않았다.

그저 소리나는 가야금을 부드럽게 만지고 계셨다.
그 만지는 손길이 닿은 음의 부드러움은

마치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책상 위 고양이의 이마를 만지듯하고,

새벽이슬이 커다란 연잎 위를 구르듯하다.

 

때로는 물 많은 강물이 절벽 아래 바위에 내동댕이 쳐지듯 우렁차고
때로는 잠자리가 뒷마당 장독 위에 살포시 앉는 듯 소리가 없다.
특히, 휘몰이장단을 타고 숨 쉴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음들은

가히 심연의 바다를 휘감고 또 휘감으며 돌아 나오게 함에,

마치 태풍의 눈 안에 머무는 듯하다. 

 

 

이영희 명인의 해외 입양아 문제와 국악의 만남

 

이영희 명인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해외 입양아 문제를 국악과 연결해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입양아들이 한국적 정체성을 되찾고 문화적 뿌리를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과 활동을 기획했다.

 

입양아들이 장구와 가야금 같은 전통 악기를 배우고, 민요와 가곡을 익히는 교육 과정을 마련해 그들에게 한국 문화의 깊이를 체험하게 했다. 더불어, 입양아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창작 국악극을 선보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예술로 표현해 대중과의 소통을 도왔다.

 

이영희 명인은 단순히 교육 프로그램에 그치지 않고, 해외 입양아들이 한국을 방문해 전통 문화를 체감할 기회를 제공해 국악 캠프와 명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들의 한국적 뿌리를 재발견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게 했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 전통문화가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 정체성과 치유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영희 명인의 노력은 해외 입양아들에게 국악이 곧 고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그들의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다. 이영희 명인은 국악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국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를 예술과 사회를 연결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국악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국악협회의 사회적 책임을 재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악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방일영국악상

 

이영희 명인의 제31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은 그의 평생 헌신과 업적을 기리는 자리임과 동시에 국악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의미 있는 행사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정은 국악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귀감이 되고 있으며, 전통 예술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번 수상은 국악계와 문화예술계가 함께 국악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널리 알리며 전통의 힘을 재확인하는 자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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