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어른이 없다?
전통문화 칼럼니스트
김승국
예술계 안팎에서 “어른이 없다”는 탄식이 들려온 지 오래다. 나도 원로의 대열에 들어서인지 이러한 말이 불편하게 들린다. 후배들이 폭풍우 속에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고목(古木)을 만나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뜻일 게다.
최근 원로 예술인 지원사업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씁쓸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 사업은 평생을 예술에 헌신했으나 사회적 안전망 밖에 놓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는 노령의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누군가에게는 창작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권이자 절박한 기회다.
하지만 지원 명단에는 이미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안정을 충분히 누려온 이들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대학 교수를 정년퇴임해 안정적인 연금을 받는 등 상대적으로 윤택한 삶을 보장받는 이들이, 단돈 몇백만 원이 절실한 동료 원로들의 기회를 가로채려 드는 모습은 예술가적 품격에 대한 깊은 회의를 안겨주었다.
진정한 예술계의 어른이라면 자신이 누리는 혜택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성찰해야 한다. 이미 사회적 자원을 충분히 점유한 이들이 복지 성격의 지원금에까지 손을 뻗는 행위는 ‘창작의 열정’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노욕(老慾)에 다름없다. 품격이 거세된 예술은 기술에 불과하며, 염치가 실종된 원로는 그저 ‘나이 든 기득권’일 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참된 원로의 역할은 단순히 지원금을 양보하는 소극적 태도에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어른은 예술계 내부의 부조리한 관행이나 잘못된 문화 행정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날카롭게 쓴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후배들이 처한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소리를 방패로 내어주는 존재가 있을 때, 예술 공동체는 비로소 건강한 자정 능력을 갖게 된다.
바람직한 원로의 덕목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과 ‘책임’에 있다. 내가 한 번 더 조명받는 것보다 재능 있는 후배나 당장 창작 공간을 잃을 위기에 처한 동료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야말로 원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술적 성취다. 후배들이 보고 배우는 것은 거장의 작품 이전에, 그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숲에 큰 나무가 없으면 어린 나무들은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한다. 하지만 큰 나무가 그늘만 넓게 드리우고 햇빛을 독점한다면 그 숲은 결국 고사하고 만다. 이제 원로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때다. 당신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이정표인가, 아니면 그들의 생존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인가.
존경은 강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서야 할 곳과 비워야 할 곳을 명확히 아는 이의 뒷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향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