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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9]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9]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광대와 재인청 4

 

광대의 길
광대 이동안은 광무대 활동으로 차곡차곡 자신의 명성을 쌓아나갔다. 그 명성은 자연스럽게 일본 공연단의 일원으로 선발되기에 이른다. 1927년, 일본 순회공연을 앞두고 부민관에서 태평무와 학춤을 춘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2011년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재인청 춤판을 펼쳤는데, 당시의 공연은 요코하마 일본국립대(현 수도대)에 재직하고 있던 다케다 요코 교수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요코 교수는 15년째 일본에서 한국을 오가며 재인청 춤을 배우고 있는데, 13년 차에 일본에서 자신의 춤판을 펼칠 정도로 재인청 춤의 재일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가 섰던 동경의 능무대(能舞臺, 노부다이)는 일본 전통의 가무악 공연을 펼치는 전용 무대다. 리허설을 준비하면서 잠시 “선생의 일본 공연은 어땠을까?” 했었는데 놀랍게도 공연 후, 분장실로 찾아온 선생의 공연을 직관한 분들을 만난 것이다. 선생은 일본 공연을 여러 차례 펼쳤던 모양이다. “그분의 제자를 만나다니!”와 “스승의 관객을 만나다니!”로 세월을 뛰어넘은 소통의 기쁨이었다.

 

선생의 첫 해외 공연이자 첫 일본 공연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1927년에는 임방울, 이화중선을 포함한 명창들과 같이 아예 대동가극단을 조직하여 중국, 만주를 비롯 러시아의 국경지대까지 다니며 해외무대를 넓혀나갔다. 1937년에는 한성준이 만든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재인청 춤을 가르치는 강사로 초빙되기에 이르면서 선생의 명성은 실력으로 증명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이동안 선생은 신무용가이자 월북무용가인 최승희에게 태평무, 장고춤, 승전무, 입춤 등을 가르쳐 그녀가 세계적인 무용가로 성장하는 기틀을 만드는 데 일조를 하였노라 자랑하곤 하였다. 광복 후, 선생의 명성은 생애의 최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화양연화花樣年花를 구가하신 것이다.

 

당시의 화려한 선생의 화양연화는 고 정범태 사진작가의 기록으로 엿볼 수 있다. “내가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광복 후 1946년 그가 서울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였다. 도대체 어떤 분인가 궁금하던 차에 당시 서울 장안의 명사 부인들이 주최한 이동안 선생 후원회에서 그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나는 그가 천하의 재주를 타고난 것을 알게 되었다. 재주만큼이나 화려하게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활동했다.” ‘장안의 명사 부인들이 주최한 후원회’라니! 선생은 광복 이후의 그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팬덤을 형성시킨 놀라운 인물이었다.

 

1957년에는 부산에서 여성농악단을 조직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공연을 한 이력도 있다. 덕분에 부산대, 동아대, 부산교대에 초빙되어 춤을 가르쳤다. 서울에서는 선화예고, 리틀엔젤스 어린이무용단, 전통예술고 등에서 춤을 가르치는 등, 서울, 경기, 대전, 부산 등지에서 무용연구소를 열었고 이를 통해 선생의 춤을 익힌 수강생과 내로라는 춤꾼들의 명단은 길고도 길다.

 

문제는 그 긴 명단을 들고서도 선생의 춤을 물려받아 전승하겠다는 제자를 두지 못한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에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도사리고 있었다. 춤이 아닌 발탈로 인간문화재를 받은 분에게 어렵사리 배워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셈법과 ‘무형문화재 종목이냐, 아니냐? 입시 또는 콩쿠르 종목이냐, 아니냐?’를 두고 효용성이 매겨지는 현실에서 재인청 춤의 역사적 가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선생의 춤이 무형문화재가 되고도 남는다는 기대가 오랜 세월 속에서 점점 멀어져간 것은 치명타였다. 붙어있던 문하생마저 떠나버린 데다 교습소를 찾는 발길마저 거의 끊기고 만 것이다. 보호하겠다고 만든 무형문화재 제도의 역설이었다.

 

선생께선 이 역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하신 게 틀림없다. 전혀 감행하지 않았던 ‘이수증’을 내게 주시고 태평무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였노라 하셨으니! 얼마나 다급하셨을까 싶다가도 이 지혜로운 구속 덕분에 오늘도 나는 재인청 춤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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