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춘향영정] 독립운동가 집안의 아들 강신호가 그린 ‘춘향 영정’이 진짜다! 100주년을 앞둔 춘향제, 학술세미나로 정체성 확립하고 영정 문제 해결해야

남원의 춘향 영정 논란은 예술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국악타임즈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김양오 선생의 의견을 통해 춘향 영정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 논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소개합니다.

 

김양오 선생은 춘향제의 본질과 의미를 재조명하며, 춘향 영정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연구와 주장은 춘향제가 가지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되찾기 위한 방향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악타임즈는 김양오 선생의 의견을 통해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아들 강신호가 그린 ‘춘향 영정’이 진짜다!

100주년을 앞둔 춘향제, 학술세미나로 정체성 확립하고 영정 문제 해결해야

 

글 / 김양오

 

대한뉴스 214호 흑백영상 ‘춘향 향토전’을 클릭하면 “에헤야 데헤야...” 민요가 흥겹게 흘러나오며 한복을 입은 두 여성이 사당의 문을 연다. 그러자 단아한 여인의 초상화가 드러나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성이 술잔을 올린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94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춘향제의 1959년 모습이다. 그 초상화가 바로 성춘향의 영정이고 술을 올리는 인물이 바로 춘향제를 위해 평생 헌신한 최봉선 선생이다. 지금 최봉선 선생은 세상에 없지만 그 영정은 아직도 존재한다. 바로 이 것이다.

 

2020년 9월에 촬영한 최초 춘향영정,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 소장

 

이 영정은 64년째 남원 향토박물관 수장고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 2020년 9월까지는 거의 모든 시민들이 그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친일 잔재 청산의 하나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이 사당에서 내려진 뒤 59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 영정은 당시 남원시장(이환주)까지 동의하여 봉안을 준비했으나 일부 시의원의 반대로 봉안이 이뤄지지 못한 채 4년이 다 돼가는 오늘까지도 남원시의 최대 갈등 사안이 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남원의 역사와 관련된 활동을 해 온 작은 시민 모임 ‘남원역사연구회(회장 강경식)’는 일제시대 신문자료부터 춘향제 관련 논문, 과거 사진과 문헌 자료를 찾아내 춘향제 역사를 정리해 나갔다.

 

1931년 춘향사당과 최봉선이 등장한 신문

 

그 결과 춘향제는 조선팔도의 예기조합(일본식 이름 ‘권번’) 기생들(남원예기조합 대표 최봉선)과 남원(남원 신간회 부지회장 이현순), 진주(형평사 대표 강상호)의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모아 탄생시킨 대단한 민족문화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이런 민족문화운동을 일제가 악용하기 위해 춘향영정을 새로 그렸다는 놀라운 사실도 밝혀냈다.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야기인 ‘춘향전’의 주인공 성춘향을 가장 처음 영정으로 형상화한 사람은 진주의 서양화가 강신호다. 강신호는 진주의 뼈대있는 독립운동가 가문의 막내아들로 부모는 민족교육 운동과 빈민 구제 활동을 하셨고 첫째 형은 백정들이 일으킨 인권운동 ‘형평사 운동’의 전국 공동대표였으며 둘째 형은 방정환과 함께 소년운동을 하고 최초로 어린이날 행사를 한 강영호다. 이러한 내용은 2023년 12월 국립경상대 안영숙 교수가 <진주의 민속과 예술>에 발표했다.

 

강신호 화백의 개인전 소식이 실린 신문 기사

 

강신호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유학한 진주 최초의 서양화가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화가였지만 춘향 영정을 완성하지 못하고 1927년 사망한다. 마무리를 한 사람이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양화가 임경수였다. 이러니 낙관을 찍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영정에는 보통 낙관을 찍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낙관이 없고 기록이 없어서 최초 영정은 60여년 만에 세상에 나왔지만 올바른 대접을 못 받았다. 참고로, 최초 영정이 서양화라는 것은 남원시의 연구 용역(2020년 원광대 산학협력단)에서도 이미 밝혀졌다. 영정 그림의 모든 부분에 징크화이트라는 유화 물감이 섞여 있고 동양화에서는 쓰지 않는 ‘음영기법’(그림자 기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최초 영정 레이저 분석 자료 부분

 

그리고 최초 영정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춘향이는 16세 아가씨여야 하는데 머리를 올린 ‘유부녀’로 그렸고 옷 색깔이 ‘녹의홍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광한루에 그네를 타러 나올 때 댕기머리를 하고 푸른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었다는 표현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린 머리‘에 대해서는 조금만 생각해도 답을 얻을 수 있다. 춘향이는 이도령과 백년가약을 맺고 이도령이 떠날 때 반지를 나눠 끼고 머리를 올렸다. 조선 후기 병풍 그림을 비롯해 오래 된 춘향전 레코드 음반 표지와 자료 사진에는 올린 머리를 한 춘향이가 대부분이다. 춘향이는 젊고 이뿐 아가씨여서가 아니라 정절을 끝까지 지킨 ’열녀‘였기에 추앙받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도령과 혼인하고 나중에 어사부인, 정렬 부인된 부인의 모습으로 그린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왜 이 영정이 박물관에 있을까? 1963년 최봉선 선생이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남원땅의 노학(老學)들이 고증(古證)과 추리를 거듭한 끝에 그려놓은 춘향아씨의 영정이 너무 나이 들고 예쁘지 않대서 일본 관헌들이 새 그림을 갖다놓고 예당초의 것은 그 뒤로 밀어 제쳐 버릴 땐 참으로 눈물이 났다.’

이 자료뿐 아니라 김은호가 쓴 <서화백년>에도 일본인 하야시 시게조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그 사람은 누구이며 왜 춘향 영정을 새로 그렸을까? 정말 예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을까? 몇 년에 걸쳐 찾아낸 자료를 통해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옷 색깔은 누가 봐도 태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옛 춘향사당 사진에서 태극 문양을 찾아냈다. 지금은 없어진 옛날 사당(광한루 누각 바로 오른편에 있었는데 아무 기록도 없이 1970년대에 현재 자리로 옮긴 것으로 확인됨) 양쪽 출입문에 태극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사진이다. 또 현재 남아 있는 사당의 제단에도 화려한 연꽃 무늬 속에 8괘 태극이 네 개나 그려져 있는 것을 찾아냈다. 이 제단은 나무 재질로 봐서 일제시대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고 문화재 전문 대목장도 말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태극기는 당연히 금지 물품이었고 태극 역시 주술에서 사용할 때 빼고는 금지 문양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도령에 대한 정절을 조선을 향한 정절로 승화시킨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춘향사당 태극 문양들

 

이렇게 사당과 영정을 준비하고 1931년 봄 드디어 첫 춘향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춘향제의 핵심은 성춘향에게 지내는 제사다. 제사를 지낸 다음 광한루에 올라가서 전국의 명창들이 판소리 대회를 하고, 활쏘기, 풍물굿을 했다. 첫 회부터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렸고 해가 갈수록 더했다.

 

만세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뒤 문화통치를 하던 중이었던 일제는 처음부터 막지는 않았지만 점점 규모가 커지자 행사를 막았고 결국 1937년과 38년에는 오밤중에 몰래 제사만 지내야 했다. 그러던 1939년 봄, 일제가 갑자기 춘향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지원하여 전국에서 10만 명 가끼운 인파가 남원으로 몰리게 된다. 어찌된 일일까?

 

춘향 영정을 새로 그리자고 합의한 하야시 시게조와 현준호 기사

 

그것은 조선 식산은행 총재 하야시 시게조의 아이디어였다.

식산은행은 우리 민족의 돈을 닥닥 긁어 일본으로 보내던 은행이었고 하야시 시게조는 총독부 재무국장을 지낸 고위 관료였다. 하야시 시게조가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일본 신협극단의 연극 ‘춘향전’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신협극단은 ‘내선일체’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의 대표 소설 ‘춘향전’을 선택,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 형식으로 만들어 일본과 조선 순회 공연을 하고 있었다.

 

하야시 시게조는 춘향전이 일개 기생의 연애담인 줄 알았는데 ‘충신장’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충신장’은 일본 사무라이의 전설적인 의협충절물이다. 그래서 춘향이를 보러 광한루에 왔다가 자기가 생각했던 춘향이가 아니라서 호남은행장 현준호에게 새로 그리자고 한 것이고 현준호는 돈이 얼마가 들든지 해내겠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일본신문에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김은호는 자서전 ‘서화백년’에 하야시 시게조가 기존 춘향 영정이 ‘너무 저급하고 페인트로 쓱쓱 그려놓아’ 새로 그리기로 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내선일체’ ‘충신장’이라는 표현을 싹 감췄다.

 

 ‘내선일체 예술의 약수’라고 홍보하고 있는 일본 신협극단의 춘향전>

 

김은호는 당시 일제가 알아주는 최고의 화가였다. 특히 ‘봉차금납도’라는 대작을 그렸는데 조선의 부인들이 패물과 돈을 모아 일제에 바치는 그림으로 이 그림은 총독부 로비에 걸렸고 엽서로 제작해 전국에 뿌려졌다. 이것 말고도 친일행적이 너무 많아 반민족친일인명사전에 여러 장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 미술계 대표 친일파다.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영정은 화가의 정신을 담는 그림이다.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에는 우리민족의 얼이 담겼을까? 황국신민 정신이 담겼을까? 만약 정신을 담지 않은 영정을 그렸다면 진짜 실력자가 아니다.

 

이렇게 새로 그려진 영정은 1939년 제9회 춘향제 때부터 사당을 차지했지만 6.25 전쟁 때 누군가가(북한군이라는 말이 전함) 칼로 찢어 놔 최초 영정이 사당을 되찾았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1 박정희 정권 때 내각수반 송요찬이 김은호가 다시 그린 춘향초상을 가지고 내려와 최초 영정을 또다시 몰아내고 만다. 송요찬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이쁜 춘향이로 대치하라(1965.5.11 조선일보)’라는 말을 남겼다. 김은호는 일제 때 그린 것과 거의 똑같이 다시 그렸고 이 일을 주도한 것은 남원의 일부 유지들이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다시 내쫓긴 강신호의 춘향 영정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된 채 60년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송요찬이 다시 가지고 온 김은호 작 춘향영정과 그 앞에 고개 숙인 최봉선

 

4년 동안 끌어 오고 있는 춘향 영정 문제. 지난 3년 동안 남원시는 시민들끼리 싸우도록 방치해 놓다가 새로 취임한 시장(최경식)의 독단으로 괴상망측한 새 영정을 그려서 봉안, 전 국민의 원성을 샀다. 새 영정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남원시민들은 엄청난 모멸감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정신과 말살되어 가는 민족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만든 춘향제가 일제와 군사 정권에 의해 변질된 것을 바로 잡는 일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바로 잡는 일이다. 그 방법은 일부 시민들의 감정 싸움이나 말싸움이 아니라 올바른 근거와 사료를 가지고 토론하는 공론의 장이다.

 

지방 정부는 품격있는 발표회장을 만들어 춘향제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릴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해야 나락으로 떨어진 남원시민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100주년을 목전에 둔 춘향제의 위상을 바로 잡을 수 있으며 조상님들께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을 쓴 김양오 는 인하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남원 역사  해설사로 15년동안 활동했으며 역사 동화 <도자기에 핀 눈물꽃> <백 년 동안 핀 꽃>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 이화중선을 주인공으로하는 판소리 청소년 소설 <아리아리 아라리요> 등을 집필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은 국악타임즈의 입장과 다를수 있습니다

 

 

국악타임즈의 모든 기사는 5개 국어로 실시간 번역되어 세계와 소통합니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