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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12]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12]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재인청 춤, 네 개의 스타일 4

 

슬픔과 환희의 아포리아, 엇중몰이신칼대신무

 

이동안 선생께서 지니고 계셨던 그 많은 재인청 춤들 중에 이 엇중몰이신칼대신무 만큼은 유일하게 선생의 창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선생께선 아니다 하였으니 창작이라는 단정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선생의 80년 춤 인생에서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 춤을 추었다는 사실과 이 춤을 사사한 제자가 나타나기까지는 선생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춤을 추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다.

 

고 정범태 사진작가께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남도씻김굿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춤이라는 구체적 주장도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재인청춤전승보존회와 진도씻김굿보존회와 인연을 맺고 15년 넘게 협연을 이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엇중몰이신칼대신무 덕분이다. 2009년, ‘춤과 굿의 시나위’라는 이름으로 함께 큰 판을 벌인다. 진도의 무형문화재와 그의 이수자들이 총동원되고 우리 쪽 수석 춤꾼들이 하나가 되었던 무대. 재인청 해청의 이전에는 함께 연희를 했었을 재인청과 세습무가의 후예들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드디어 다시 만난 것이다. 아전인수라 해도 좋다. 과천의 대극장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탄성과 탄식 소리가 내 귀에는 민족 축제의 역사를 주도했던 주역들이 재결합하는 일대 사건 앞에 선 감탄사였던 것이다.

 

이동안 선생은 이 춤의 이름에 신칼을 춤 도구로 쓰는 까닭에 신칼대신무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엇중몰이’를 덧댄 것은 지극히도 무속의 용어인 신칼대신무와는 전혀 다른 춤의 미학을 의도적으로 강화한 작명이다. 그런데도 이 신칼대신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결국은 ‘엇중몰이춤’이라고만 부르셨다.

 

사정이 이러하니 여기서 장단의 이름인 엇중몰이가 이 춤의 핵심 이름이 된 연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춤꾼의 문법, ‘재인청 춤과 장단’에서 다룬 바 있다. 중요하고 중요하니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엇중몰이신칼대신무에는 엇중몰이장단이 없다. 단 한 박도 연주조차 되지 않는 장단이다. 그런데도 선생께서 엇중몰이를 춤의 이름으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재인청 춤을 제대로 추었을 때, 칭찬의 언어가 되는 “눈마디 또는 눈대목을 찍었다”, “눈이 박혔다”는 평가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재인청 춤을 익히고 추면서 선생의 몸에 새겨버린 그 ‘눈’을 아무리 강조해도 제대로 구현하는 제자가 없어 많이 안타까우셨던 게 틀림없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엇중몰이를 이 춤 이름에 넣은 것은 눈이 박힌 재인청 춤을 제대로 구현해보라는 선생의 친절이다. 장단은 엇모리장단인데 춤꾼은 엇중몰이장단을 떠올리면서 춤을 춘다면, 춤은 장단에서 미세하게 어긋나게 된다. 선생께선 이걸 노린 것이다. 어긋남의 미학, 이른바 ‘오브제’ 효과가 보다 용이하게 만들어지니 말이다.

 

그런데 선생께선 이게 관객에게도 부지불식간에 같은 효과를 준다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관객들이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간다고, 이 춤에 대한 객석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퇴원하면 정말 멋진 엇중몰이신칼대신무를 추겠다 하셨을 정도다. 아쉬운 것은 이 마지막 소망을 결국은 실현하지 못하신 것이다.

 

신칼대신무를 춤의 이름에 넣었다, 결국 빼는 선택을 하셨지만, 이 춤에서 신칼의 역할은 지대하다. 긴 대나무에 흰 창호지를 오려 대나무 양 끝에 매달아 너슬대는 신칼은 춤꾼의 감정선을 절묘하게 시각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양팔을 돌리고 뿌리거나 휘돌리는 맵시는 경건하기도 하고, 뜨거운 울음을 참아내는 듯 앙다문 입술 사이로 서슬퍼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칼은 이렇듯 슬픔의 아포리아였다가 문득 투명하고도 맑은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드디어 신칼은 하늘의 기운을 모으고 춤꾼은 자신의 디딤새로는 지기地氣를 이끌어 올려 천지가 합일合一하는 신이神異한 신명이 터져나온다. 생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해탈과도 같은 희열! 신명의 아포리아마저 이 춤은 만들고 마는 것이다.

 

 

‘엇중몰이신칼대신무’ 이 긴 이름의 춤을 좀 줄이자고 간청드린 적이 있다. 선생께선 단호하셨다. 아무런 설명도 없으셨다. 필자는 이 춤을 들고 어디 안 간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이 춘 춤이다. 숱한 춤의 반복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이 춤의 어느 부분에도 엇중몰이 장단이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마음에는 엇중몰이 장단을 떠올리면서 춤을 추게 되는 것은 순전히 이름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덕분에 놀랍게도 춤사위는 실제 장단과 상상의 장단 사이를 벌리고 엇박의 춤을 추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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