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14]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살다보니 2
지팡이가 된 춤꾼
안남국 여사로부터 한 번 들르라는 전화를 받았다. 찾아뵈니 지팡이 하나를 내어놓으신다. 선생의 지팡이였다. 그동안 내게 필요할 것 같은 선생의 유품들을 찾아 챙겨놓았는데, 유족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 다 가져갔다고. 요행히도 이게 남아서 꼭 전하고 싶었다고. 다음 말씀이 지팡이를 살아 움직이게 하셨다. “선생께서도 힘드셨는데 우리 정 선생도 하시면서, 힘들 때 지팡이로 쓰라.”
나는 그렇게 지팡이가 되신 스승을 모시고 왔다. 동행했던 운정 선생이 하나의 상징이니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 한다. 마침 눈 쌓인 무용실 앞에서 눈에 꽂은 지팡이와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무용실 한켠에 세워두었는데, 문득 불쑥 무용실을 찾으셨던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원한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신 것이었다.
한여름인데 흰 양복 정장에 흰 구두, 하얀 중절모를 쓰고 문 안으로 먼저 들어오는 지팡이가 또렷이 떠 오른다. 작은 체구에도 단단한 자세다. 반듯한 걸음걸이가 자세를 더욱 당당하게 만든다. 저 노구에도 이렇게 당당한 것은 최고의 줄광대로도 산 뛰어난 균형 감각이 몸에 밴 덕택일 것이다. 그래, 이 지팡이가 그날의 방문을 잊지 않고 다시 온 것이구나.
나는 이 지팡이를 출연시키기 위해 엇중몰이신칼대신무에 인트로 춤인 상주춤을 만들었다. 이후부터 이 상주춤에는 반드시 이 지팡이가 출연한다. 그리고 2019년에 올린 재인청춤판은 김인호, 이동안,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재인청 춤 승계의 연결고리로 더 큰 역할을 맡겼다. 비록 하나의 상징이지만 우리 회원들은 어느덧 우리 공연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여긴다. 부수적으로 이 지팡이가 재인청 이야기를 꽃피우는 매개체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선생께서 작고하시고 3년인가 지났을 겨울, 하루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미망인이 되신 사모께서 전화를 주셨다. 그간 갖고 있던 선생의 유품들을 이리저리 다 뺏기다가 보니 이거 하나 남았는데, 이것만은 정주미가 주인이라며 고이 내어주신 것이 선생의 지팡이였다. 지팡이를 받아들고 보니 선생께서 내 연구소를 불쑥 찾아오셨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흰 양복에 흰 중절모로도 모자라 백구두로 치장하고 눈부시게 오셨던 선생께선 예의 이 지팡이를 짚고 문 앞에 서 계셨다. 지팡이만이 흰색이 아니어서 오히려 두드러졌던 지팡이. 선생께선 그날,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어린 춤꾼 정인호의 머리를 살뜰히 쓰다듬어주고 가셨던 기억! 그 어린 춤꾼이 무용을 전공으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석사과정까지 거치더니 전통예술의 행정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나는 이 지팡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의 지팡이는 무대의 소품으로, 재인청춤의 가교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