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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18]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18]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춤이 된 인생

 

2. 질곡의 시기

 

'한국의 명무’ 저자이신 고 정범태 선생의 전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후 선생의 삶은 처참한 것이었다 한다. 수소문 끝에 대전에서 선생을 발견한–‘발견’이라 하셨–다. 그만큼 힘들게 찾았으니 마침 주류언론의 기자였던 정 선생은 이를 기사화했고, 이를 본 고 심우성 민속학자의 주선으로 온양에 거처를 마련하고 건강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한다. 어찌 아사 직전까지 이르도록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을까?

 

사실, 선생의 화양연화는 딱 두 시기에 불과했다. 광무대 시절, 그리고 광복 직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였다. 재인청 바지춤의 전통을 이은 유일한 광대였으며 최고의 춤꾼이었음에도 신무용의 바람과 여무만이 흥행이 되는 시대의 트렌드 변화를 이길 수는 없었다. 광복 직후 반짝 인기도 한국전쟁으로 묻히고, 이후 등장한 군사정권의 정책적 억압과 질시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꿀 수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선생의 문하생으로 교습소를 드나들던 시기도 사실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발탈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유자에게 지급되는 약간의 보조금이 전부였던 생활. 보유자로서 매년 의무적으로 올려야 했던 공연비를 충당하기에도 힘들었던 선생의 삶. 어쩌다 심사위원으로 갈라치면 좋은 평을 기대하는 뒷돈은 무섭게 물리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춤집 좋다”가 전부인 심사평이라니! 월사금을 싸들고 찾아가도 알아듣게 가르치기를 하나, 배워봤자 전수증도 이수증도 받을 수 없으니 써먹을 데 없어도 왠지 춤이 좋아서 찾아갔더니 툭하면 가차 없는 야단만 치시니! 오래 붙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선생께선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의 사사를 허락하신 이후로는 어떤 교습생도 받지를 않으셨다. 그러니 가욋돈이라 해봤자 내가 지불하는 작품비와 교습비가 전부일 터. 알고 보니 선생께선 그 수입을 보태 재인청 정기 춤판을 더 키운 것이다. 태평무를 무려 일 년씩이나 질질 끈 것도 모자라 장단을 배우라니! 나는 선생의 의중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이만한 교습비를 ‘하필, 왜, 내게 요구하는지 어디 한 번 봅시다’ 했던 오기로 시작했던 내가 아직도 부끄럽다. 광대란 지고지순의 경지에 이른 예인의 이름인 것을. 그 경지가 자존심인 것을. 어찌 얄팍한 오기를 부렸단 말인가!

 

 

이 빛바랜 그림은 선생께서 엇중몰이신칼대신무를 추시던 장면을 캐리커처한 것이다. 항일시대와 한국전쟁, 전통은 케케묵은 고리짝 취급을 받아야 했던 군사독재 시절을 거친 동안에 선생께서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사지경까지 내몰렸던 그야말로 질곡의 시기. 선생께선 어찌 견디고 벗어나셨을까? 선생께선 그 질곡의 시기에도 진도를 방문하신 모양이다. 거기서 만난 진도씻김굿에서 이 춤의 모티브를 따왔다는 선생의 고백이 있었다 하고 피폐했던 대전에서의 생활에서 구출되어 서울로 이거했을 즈음 이 춤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질곡의 시기 내내 이 춤을 창안하고 다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춤의 전개 구조는 이렇다. 영면에 드신 아버지를 그의 딸이 저승으로 안전하게 인도한다는 줄거리다. 핵심 키워드로 요약하면 한과 해원의 과정을 거쳐 신명으로 나아가는 우리 일반의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춤이다. 선생께선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질곡의 시간을 이 춤을 갈고 닦으면서 극복해내는 힘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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