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가 널리 알린 대취타(大吹打)
‘명금일하 대취타 하랍신다.’
방탄소년단은 K-POP을 대표하는 월드스타이다. 이들은 한복, 전통음악 등을 세계에 알리는 외교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징을 한번 치면 대취타를 연주하라는 의미의 ‘명금일하 대취타 하랍신다.’로 시작하는 BTS 멤버 슈가(Agust D)의 ‘대취타’는 우리 청소년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우리 전통음악을 친숙하게 느끼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가사에 광해, 뒤주 등의 이야기가 섞여 미쳐버린 왕을 컨셉으로 악플과 안티에 대해서 저격하는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다. 오늘은 이 ‘대취타’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한다.
거대한 행렬 속에서 음악과 함께 나타나는 존엄한 존재
‘대취타’는 조선시대 군악대라 할 수 있는 취타대가 연주하는 악곡을 말한다. 취타대의 취(吹)는 부는 악기를, 타(打)는 두드려 소리내는 악기를 뜻하는 단어로 관악기와 타악기로 이루어진 악대이다. 군대의 행렬에서 군악대를 운용(運用)한 역사는 고대 삼국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고구려 안악 제3호 고분의 벽화에는 수레를 탄 인물의 앞뒤로 군대뿐만 아니라 악대까지 편성되어 있어 그 오랜 역사를 확인하게 해준다. 군인들만 행렬하는 것 보다 군악대의 음악과 함께하는 군대의 행렬이 훨씬 장엄과 씩씩함을 뽐냈을 것이 분명하다.
3d로 복원한 고구려 안악 제3호분 고분 벽화 (https://www.youtube.com/watch?v=fjCVkTahTi8)
조선시대 『악학궤범』을 보면 타악기와 관악기로 편성된 고취악(鼓吹樂)의 형태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대궐의 뜰 안에서 연주하는 전정고취와 전후고취로 왕이 행차를 위해 정전을 나설 때부터 궁궐을 벗어날 때까지의 음악을 담당하였는데 이를 전악(典樂)이라 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로 왕이 가마에 올라 행진할 때 음악을 담당했으며 이를 행악(行樂)이라 하였다.
행악은 임금님이 탄 수레를 기준으로 앞에 편성된 전부고취, 뒤에 편성된 후부고취가 연주하였다. 전부고취의 악대에는 관악기로 태평소(호적)가 선율을 담당하고 그 외 나각, 나발 등 단음을 연주하는 악기가, 타악기로 징, 자바라, 운라, 용고 등이 편성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명나라의 영향으로 전부고취를 취고수, 후부고취를 세악수로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악(細樂)은 비교적 악기의 음량이 작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해금, 피리, 대금, 장고 등으로 취고수의 음악에 비해 소리가 작다. 이 세악수의 악기편성을 다른 말로는 ‘삼현육각’이라고 한다.
취고수들이 연주한 악곡은 ‘대취타’였고, 세악수들이 연주한 악곡은 취타, 길군악, 길타령, 별우조타령 등 다양하였다. 행렬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임금이 행차할 때 임금의 앞부분에서는 취고수들이 당당하고 씩씩한 대취타를 연주하고 임금의 수레가 지나고 나서는 세악수들이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떠들썩한 음악과 함께한 임금님의 행차에서 백성들이 느꼈을 감동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정조대왕 능행반차도의 취타대
청계천에 가면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를 그린 도자기 타일을 붙인 벽화를 찾아볼 수 있다. 가로×세로 30cm의 백자 도판 5,120개를 붙여 만들었으며, 벽화는 높이가 2.4m에 길이 186m에 이르러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안장된 수원 융릉으로 참배하기 위해 이 거대한 행렬을 붕어할 때까지 매년 실시하여 13차례나 이어갔다. 청계천에 벽화가 된 이 반차도는 13번의 능행(陵行) 중 1795년 아버지의 회갑을 기념하여 모친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행차한 과정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벽화로 옮긴 것이다.
청계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벽화
8일간 진행된 이 행차에는 문무백관 6,000여명이 동원되었는데, 김홍도 등 당대의 일류 궁중 화원들이 완성한 의궤에는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그려져 있다. 청계천의 벽화는 이 의궤의 행렬도를 모사(摹寫)한 것이다. 거대한 규모의 그림이 임금 행차의 장엄한 위엄과 정조대왕의 효심을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다. 해학적인 인물 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임금의 수레의 앞 뒤로는 51명의 취고수와 세악수가 말을 타고 가면서 대각, 나각, 나팔, 북, 점자, 자바라, 호적, 해금, 피리, 장고, 징 등 10여 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들이 연주했을 대취타의 웅장한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정조는 왜 매년 막대한 국고를 들여 가면서 이러한 거대한 행렬의 행차를 했을까? 그의 입장이 되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정조 이산에게는 척결해야 할 정적이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계했던 노론 세력 중 일부는 정조가 왕이 되면 자신들이 화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의 즉위를 반대하고 암살까지 시도하였다. 정조는 즉위식에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한 뒤 이들을 척결하였다. 매년 거행한 정조의 능행은 이들 세력에 동조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메시지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국가였다. 유교는 예를 바탕으로 한 수직적인 위계를 나라의 기틀로 삼는 이념이다. 군사부일체라 하여 임금은 백성의 부모로 간주하였다. 임금이 비록 죽은 아비이지만 그에게 극진하게 효도로 예를 다하는 것은 신하와 백성들에게 부모와 다름없는 임금을 극진한 예로 모시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정조의 극진한 효도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벽화 속 취타대가 그 뜻을 대변하듯 당당히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궁궐 수문장 교대식의 취타대와 국군취타대
취타대의 연주는 임금의 행차 이외에도 다양한 장면에서 연주하였다. 행악으로는 관찰사의 행차, 사신의 영접, 조선통신사의 행렬에 쓰였다. 이 밖에도 군영에서는 다양한 장면에서 악대의 연주가 활용되었는데 군대의 출정식, 개선 및 승전 축하 등 병사들의 사기 앙양 등 군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목적의 연주, 전쟁 중 공격과 후퇴 등을 알리는 신호 등 병영생활의 신호 수단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고취악은 단절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조선말 태평소를 부는 취타수(조라치)였던 최인서선생이 이 음악을 잊지 않고 있었고, 이분의 예능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현행의 취타대는 후부고취는 사라지고 전부고취인 취고수가 연주하는 대취타만 전한다. 행악에서 재현되지 못한 후부고취 세악수들의 연주는 다행히도 조선 후기 민간에서 성행한 풍류방에서 ‘취타풍류’라는 작품이 되었다. 취타, 길군악, 길타령, 별우조타령, 염불타령, 삼현타령, 별곡타령, 군악 등 7곡이 모음곡으로 전하고 있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의 용고와 운라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재현된 취타대의 연주는 무형유산으로 보전될 뿐만 아니라 국군취타대가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편제되어 각종 경축일, 국빈 영접 등 국가 의식행사, 국제 축제 무대 등에서 공연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등의 수문장 교대식에서 의식 음악으로 활용되고 있어 상시로 관람이 가능하다. 국방부 국군취타대의 영상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국방부 군악대대 전통악대(https://www.youtube.com/watch?v=XvlMn-vRgeg)
<참고자료>
김영운 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민속원, 2007.
황인근. 「국군취타대의 기능과 활동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2011.
이숙희. 「조선후기 지방 군영 취타악대 연구」, 『한국음악연구』 40집, 2006, 237~280쪽.
허유성. 「정악취타와 민간풍류취타의 비교분석」,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