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서 본 종묘
눈으로 듣고 장엄함에 빠져드는 종묘제례악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이면, 종묘(宗廟)에서는 종묘대제가 열린다. 그런데 그 현장을 직접 관람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매사이트가 열리기가 무섭게 입장권은 금세 매진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장을 직접 마주한다는 건 큰 행운이 따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에는 그런 행운 대신에 자원활동가로 지원하여 면접을 보고 다행히 선발되었지만, 하필이면 당일 비가 내려 음악도, 일무(佾舞 : 줄을 지어 추는 춤)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1년을 기다린 올해는 본 칼럼을 연재해 온 덕분에 국악타임즈의 취재기자 신분으로 현장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침 일찍 도착한 종묘는 맑은 날씨 탓인지 덩달아 설레는 마음 탓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유난히 경쾌하게 느껴졌다. 올해의 종묘대제는 특히 의미가 깊다. 6년간의 보수공사를 마친 정전에서 오랜만에 제향(祭享 :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이 봉행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종묘대제의 음악인 종묘제례악은 대한민국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처음 지정한 예술이자, 1995년 종묘제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작품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역시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니 오늘의 행사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단한가.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종묘를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판테온과 나란히 언급하며 신전으로서의 위엄과 엄숙한 위용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수식들도 화려하여 곧 시작될 제례의 순간들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며 더욱 기대되었다.
종묘대제 : 예(禮)가 바로 선 나라
조선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국가였다. 공자가 받드는 유교의 이념은 그가 살던 춘추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춘추시대는 전쟁과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던 시기로, 왕권은 약해 수시로 왕이 바뀌었으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며 사회 전반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공자는 이러한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왕을 정점으로 위계질서가 확립된 사회 구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질서와 규범,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는 핵심 원리가 ‘예(禮)’였다.
이러한 예의 출발점은 가정이었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여 모시고, 백성과 신하들은 임금을 부모처럼 섬기는 위계가 분명한 질서, 가정에서의 예가 사회와 국가로 확장되어야 왕권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이상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의 왕은 이러한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인 예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온 백성의 본보기가 되어야만 했다. 왕의 일상은 그 하나하나가 예의 모범이 되는 수행이었다. 왕의 일과는 예로 시작해 예로 마무리되는 절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하들도 마찬가지다. 왕과 신하 사이의 질서 또한 예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하여 이러한 유교적 위계와 도덕 질서가 집약적으로 구현된 대표적인 국가 의례가 바로 종묘대제인 것이다.
사실, 정통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혼령이 이승을 떠돌며 머문다고 보지 않았다. 유교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혼과 백이 결합된 존재이며, 죽으면 이 둘이 분리되어 정신에 깃든 혼(魂)은 하늘로 가고, 육체에 깃든 백(魄)은 땅으로 간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례의 본질은 조상의 혼령이 실제로 와서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이 도덕적 의무를 다하고 예를 실천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예악사상과 제례악
원래 종묘 제향에 쓰이던 제례악은 고려 예종(1114년)때, 중국 송나라 황실에서 악기와 함께 준 선물이었다. 당시 송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패해 북방을 잃기도 했고 여진 세력도 막강해지고 있어서 고려와의 화친이 매우 필요했다. 이때 선물 받은 축, 어, 편종, 편경, 금, 슬, 약, 지, 소, 훈, 생 등의 악기를 아악기라고 했으며 그 음악을 우아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아악(雅樂)이라 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궁중 제례에 중국식 아악 제도가 도입된다.
헌가에 진설된 장고, 축, 편경, 운라
이때부터 우리 궁중의 악기와 음악은 송에서 보내온 아악, 예종 이전에 중국에서 전해진 음악인 당악, 우리 전통의 음악인 향악(또는 속악)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송나라에서 전해 준 아악은 궁중에서 행해지는 의식 절차에 주로 쓰였다.
유교의 통치 철학에서 악(樂)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예의 근간인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불손한 마음을 다스리는 역할을 악(樂)이 한다고 보았다. 예(禮)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樂)을 통해 감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을 수양한다는 이 사상을 예악사상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궁중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식에는 음악이 함께 했다.
세종이 만들고 세조가 채택한 종묘제례악
도대체 세종대왕은 못하시는 게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현재 듣는 종묘제례악은 세종이 지은 음악이다. 세종은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음악에 능통하였다. 『태종실록(1431년)』에는 충녕대군 이도(세종의 이름)는 서화(書畫), 화석(花石), 금슬(琴瑟: 거문고, 가야금) 등 모든 유희 애완(愛玩)의 격물(格物)을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며, 형님인 세자 양녕대군에게 금슬을 가르쳐 주며 화목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충녕대군 시절 세종은 본인이 왕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마음껏 음악과 예술을 즐기며 그 기예에 능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세종 시대에 연주되던 제례악은 고려로부터 전승된 송나라의 아악(雅樂)이었다. 이에 세종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어서는 아악을 듣게 되겠구나”라고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세종실록』 1434년 기록에 전해진다. 세종은 선대 왕들의 문덕(文德)을 찬양하는 《보태평》 15곡과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정대업》 11곡을 창작하였다. 하지만, 이 곡들은 궁중의 회례연(會禮宴 : 임금이 베풀던 연회)에서만 사용되고 제례악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 음악이 창작 당시 제례악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악장의 내용과 구조로 보아서는 세종의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세종 곁에는 박연이라는 걸출한 음악가가 있었다. 그는 세종과는 달리,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되던 시기 전란으로 훼손된 송나라 아악 체계를 바로잡는 것이 국가의 예악을 정비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향악이 제례악으로 채택되기 어려운 분위기는 세종의 한글 창제가 당대 성리학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세종의 한탄은 납득할 만하다.
역시나, 세종의 이 회한은 그의 둘째 아들 그 유명한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비로소 해소된다. 세조 역시도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음악성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세조가 가야금을 타니 세종이 ‘진평대군(세조의 첫 대군 칭호)의 기상으로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며 감탄하였고, 세조가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다. 세종이 또 문종에게 이르기를 ‘악(樂)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칭찬한 일화도 전한다.
세종 23년(1441년) 10월의 어느 날, 세종의 아들 형제들이 함께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멀리서 관악기인 소(簫) 소리가 두 번 들려오자 수양대군(세조의 두 번째 대군 칭호)은 그 소리의 음고가 ‘청협종’과 ‘청임종’ 음이라고 알아맞힌 일화도 있다.
문종은 아우인 수양대군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보고 전악서와 아악서 등의 궁중 음악기관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니 그의 음악적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양대군 이유(李瑈)의 권력욕은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을 닮아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피의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음악성은 아버지 세종 이도를 닮아 있었다. 종묘제례의 진찬, 철변두, 송신에서 연주되는 《풍안지악(豐安之樂)》을 새로 짓고 제례에 맞게 악곡의 길이를 수정하여 《보태평》과 《정대업》을 각각 11곡으로 줄여서 종묘제례악으로 채택하니 어느 신하가 감히 그 서슬 퍼런 권위에 도전하여 반대할 수나 있었겠는가.
세조는 즉위 9년 만에 세종이 작곡한 우리 음악을 종묘제례악으로 채택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
눈으로 듣는 궁중 음악
악공과 악생이 수없이 많았던 궁중에서,, 세종이 정말 신하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악곡을 지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종묘제례악은 단순히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예악사상을 바탕으로 선율 구조, 악기 구성, 의례 순서에 이르기까지 음양오행의 원리를 반영해 만든 음악이다. 단순한 기예로는 불가능하며, 유학에 통달한 이가 아니면 창작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그런 능력과 관점을 지닌 사람은 당시 세종 외에는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소 그의 음악적 재능을 과장한 것일 수 있겠으나, 세종이 직접 막대기를 짚고 땅을 치면서 음절을 삼아 하룻저녁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종묘제례악은 악기의 구성부터 재료까지, 금(金: 쇠), 석(石: 돌), 사(絲: 실), 죽(竹: 대나무), 포(匏: 박), 토(土: 흙), 혁(革: 가죽), 목(木: 나무)의 팔음(八音)이 고르게 갖추어지도록 설계되었다. 하늘을 상징하는 당상(堂上)에는 등가악(登歌樂), 땅을 상징하는 당하(堂下)에는 헌가악(軒架樂), 그 사이에는 사람을 상징하는 일무(佾舞)를 배치하여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을 구현하였다. 음악의 음 또한 음양의 조화 속에서 12율 4청성의 16음을 고르게 배열하였다. 이는 단순한 감상용 음악이 아니라, 당대 유교적 세계관이 소리로 구현된 의식 음악이었다.
궁중음악의 큰 특징은 악(樂)·가(歌)·무(舞)가 조화롭게 짜여 있다는 점에 있다. 악에 대한 대표 문헌인 『예기』에는 ‘춤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악이라 이를 수 있다’고 밝힌다. 이처럼 예로부터 춤은 음악의 필수적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음악은 단지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으며, 반드시 춤이 함께해야 비로소 하나의 음악으로 완성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실, 궁중음악을 단지 소리로만 감상한다면 익숙지 않은 서양의 클래식 음악만큼이나 쉽게 졸음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본래 궁중음악은 단독 감상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의식과 절차 속에서 기능하도록 설계된 음악이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오랜 국악 공부 끝에야, 궁중음악은 그 의식의 절차 흐름 속에서 감상할 때 비로소 그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장엄한 정전 앞에서 펼쳐지는 6년 만의 종묘 제향과 객석에 가득 찬 시민
그런 점에서 춤은 음악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종묘제례악에 연행되는 춤은 줄을 지어 추는 춤이라는 의미의 일무(佾舞)이다. 이 춤은 단지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제례 의식을 한층 더 장엄하고 엄숙하게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인 것이다. 일무의 동작은 신과 인간의 화합을 상징하며, 팔방(八方)의 기운이 순조롭게 흐르도록 기원을 상징하는 몸짓이라고 한다.
이런 철학적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64명의 무용가가 가로세로 여덟 줄을 이룬 팔일무(八佾舞)의 정제된 움직임은 종묘제례악의 장중한 울림과 어우러져 오늘의 제례 의식을 한층 더 깊이 있게 경험하게 해 주었다. 궁중음악은 단순히 듣는 음악이 아니다. ‘눈으로 듣는 음악’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팔일무(八佾舞)가 장중하게 어우러지는 종묘제례악
종묘제례의 절차는 제례악의 연주 흐름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신을 맞이하는 영신(迎神) 의식으로 제례가 시작된다. 이어서, 제물의 목록이 적힌 폐백을 신위 앞에 바치는 전폐(奠幣) 절차가 진행된다. 그다음은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등의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 그리고 세 차례에 걸쳐 술을 올리는 헌작(獻酌) 절차가 이어진다. 첫 잔을 올리는 초헌(初獻),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아헌(亞獻),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終獻)이 그 순서다. 헌작이 끝난 뒤에는 왕이 음복한 후 제물을 거두는 철변두(撤籩豆) 절차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신을 떠나보내는 송신(送神) 의식으로 제례가 마무리된다.
종묘제례악 팔일무(八佾舞) 중 문무(文舞)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정전의 월대 댓돌 위에서는 등가(登歌), 댓돌 아래에서는 헌가(軒架)가 절차에 따라 음악을 나누어 연주한다. 영신, 전폐, 초헌의 절차에서는 선대왕의 문덕(文德)을 기리는 보태평이 연주되고, 팔일무의 일무원(佾舞員)은 문무(文舞)를 춘다. 문무를 출 때는 왼손에 약(籥)이라는 관악기를 들고, 오른손에는 적(翟)이라는 의물을 든다.
약은 예악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이 담긴 악기이고, 적은 용의 머리에 꿩의 깃을 달아 장식한 의물이다. 용은 등용문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출세를 상징하기도 하며, 꿩은 고운 깃털과 머리에 벼슬을 하고 있어 예로부터 문인들이 즐겨 그리거나 옷의 장식으로 사용하던 새였으니, 문무의 의물로 쓰인 상징적 의미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아헌, 종헌에서는 선대왕의 무훈(武勳)을 기리는 정대업이 연주되고 무무(武舞)를 춘다. 무무에서는 앞의 네 줄은 검, 뒤의 네 줄은 창을 들고 춤을 춘다. 진찬, 철변두, 송신에서는 세조가 작곡한 《풍안지악(豐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추지 않는다.
종묘제례악 팔일무(八佾舞) 중 무무(武舞)
고종황제의 종묘제례악 그리고 남은 아쉬움......
조선은 개화기를 거치며 외세의 간섭과 압박 속에 점차 국권을 침탈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 고종은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닌 자주적인 황제국임을 선포하며 국권 회복의 돌파구를 모색했다.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자 황제국에 걸맞은 의례와 제도도 도입한다. 국가 재정뿐만 아니라 내탕금(임금의 개인 재정)까지 투자하여 황제 즉위에 필요한 의식을 준비하였다.
1897년, 그는 덕수궁 앞에 원구단(圜丘壇)을 설치하고, 천자(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원구제를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출범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또한 종묘제례악에서는 기존의 제후국의 격식이던 여섯 줄의 육일무(六佾舞)에서 황제국의 팔일무(八佾舞)를 채택하며 제례의 격식을 높였다. 전정 월대의 당상에 진설된 음악도 등가(登歌)라고 부르던 것에서 궁가(宮架)로 격식을 높이기도 하였다.
정전 월대 당상의 궁가, 앉아있는 팔일무원, 당하의 헌가
오늘의 종묘제례악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팔일무를 진설하고 있다. 즉, 황제의 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상의 음악도 ‘헌가’가 아니라 ‘궁가’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음악이 일제강점기에 단절된 연유로 인해 현재 연주되는 악기의 종류가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조 시절에는 아악기, 당악기, 향악기를 포함한 34종의 악기가 97명의 연주자에 의해 연주되었고, 예악 체계를 『악학궤범』을 통해 정리한 성종 시절에는 36종의 악기를 108명의 악사가 연주했다. 물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며 종묘제례가 단절되었던 시기 이후 악기 편성이 축소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문화 말살로 인해 15종의 악기만 30명이 연주하는 수준으로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오늘날에도 겨우 18종의 악기만 연주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향비파, 당비파, 퉁소, 생황, 노고, 노도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가 복원되어 함께 어우러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종묘의궤』 등에 따르면, 무무(武舞)를 출 때 일무원을 중심으로 동·남·서 삼면에 다양한 기를 든 35명의 의장이 함께한 기록이 있어, 그 위용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현재는 일무원(佾舞員)만이 춤을 추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큰 아쉬움은 진행의 미숙함이었다. 엄숙한 제례 의식과 제례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해설이 끊임없이 이어져 감상에 큰 방해가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한 팜플렛과 자막이 제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춤과 음악이 연주되는 과정에서도 계속 설명이 이루어진 것은 지양해야 할 방식이다.
가마를 타고 왕이 종묘로 행차하는 모습을 재현한 행사 또한 아쉬움이 남는다. 본래 종묘대제를 올리기 위해 왕이 행차할 때 악기는 편성만 있었을 뿐 연주는 하지 않았으나, 관객을 위한 연출 차원에서 연주를 하기로 한 것이라면 ‘대취타’를 연주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닐리리야’, ‘아리랑’과 같은 민요를 연주한 것은 왕의 행차를 재현하는 데 부합하지 않았다.
종묘대제의 현장을 찾지 못한 독자들의 아쉬움을 달려주고자 국립국악원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종묘제례악 공연을 감상곡으로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국립국악원 종묘제례악 https://link24.kr/1c952UL>
<참고자료>
김영숙·이숙희·송지원, 『종묘제례악』, 민속원, 2008.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5.
신종원, 「유교적 죽음관과 제례의 의미」, 『한국종교학회지』, 제33집, 한국종교학회, 2003, 45~66쪽.
조유회, 「현행 종묘제례악의 악기편성에 관한 소고」, 『국악교육』 제34집, 국립국악원, 2008, 143~160쪽.
송상언, 「종묘제례악현 변화에 대한 고찰」, 우석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