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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7]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7]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광대와 재인청 2

 

모가비와 비가비의 연리지
우리 민족은 축제의 민족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부족국가의 제천의식에서 비롯된 축제문화는 신라의 팔관회와 고려의 연등회처럼 국가 차원의 문화이다. 그런데 국가가 운용하는 국가의 축제이니만큼 축제를 이끄는 주역은 최고의 기예를 갖춘 당대 최고의 예인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주역이 신라에서도 화랑이었고 고려에서도 화랑이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화랑은 기예뿐만 아니라 국방과 국정 전반에까지 훈련된 신라의 미래이자 핵심 엘리트 세력이었다. 천 년의 제국 신라를 구축한 힘은 화랑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신라가 쇠약해지고 고려가 다시금 통일 국가를 만들면서 태조 왕건은 신라의 힘을 벤치마킹했다. 신라의 팔관회를 계승하고 불교를 국교로 세웠던 만큼, 연등회까지 국가 축제의 장으로 펼쳤다. 이런 고려의 근간이 필연적으로 화랑의 후예들을 선택의 여지 없이 축제를 담당할 주역으로 발탁한 것이다.

 

신라 화랑의 후예들 입장에서는 고려의 이러한 선택이 최소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한다는 점과 최고의 기예를 전수해야 한다는 전제조건만 갖춘다면, 일자리의 세습이라는 매력적인 헤게모니를 갖게 된 것이다. 신라가 필요 인재를 양성하였다면, 고려에서는 자신이 일정한 능력만 갖추면 대접받는 시대로의 전환이었다.

 

결국 화랑의 후예들은 이에 부응하여 ‘광대廣大’라는 전문 예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 광대들을 등장시키면서 국가가 먹여살리는 콘텐츠가 아닌 자생력을 갖추는 콘텐츠의 전환을 만든 것이다. 이 덕분에 고려 후반, 원의 복속 시대를 거치면서 축제의 시대가 점차 저물어가는 와중에도 광대들은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다. 더구나 조선시대의 광대는 천민이라는 신분의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자신들을 세력화하고 유지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 결과물이 민간 예인들의 조직이라는 핸디캡에도 국가의 행사를 독점하는 ‘재인청才人廳’의 탄생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질긴 생명력도 한일합방 이후의 양상은 조직으로서 광대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고 만다. 다행히도 멸절滅絶은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김인호와 그의 제자 이동안이 있었다. 두 춤꾼은 재인청 예인의 계보를 끝끝내 붙들었던 위대한 광대였다. 특별히 이동안 선생의 경우는 재인청 고유의 훈련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서도 재인청 광대 반열에 오른 분이다. 오로지 스승 김인호의 역량에 의해 조련되고 단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재인청의 마지막 도대방이란 평가를 받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는 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인청 광대의 반열에 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오로지 춤의 언어, 춤의 문법만으로 세상을 사셨던 이동안 스승은 어찌 그 광대의 지평을 몸으로 들이셨을까? 사실 광대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모가비와 비가비가 그것이다. 스승께선 모가비다. 매년 ‘재인청 춤판’으로 공연을 하다가 2016년 국립국악원의 수요춤전에서는 색다르게 ‘재인청 춤의 연리지連理枝’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벌인 것은 광대와 재인청의 메커니즘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여기에 전문을 소개한다.

 

‘광대’라는 단어는 흔히 예인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지만, 실은 그 한계가 없는, 지고의 경지에 오른 예인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 광대에도 그 성장 과정에 따라 ‘모가비’, ‘비가비’로 나뉜다. 모가비가 예기藝技를 세습적으로 이어 내린 광대라면, 비가비는 일반인이 광대의 경지에 이른 이들을 지칭한다.

 

신라를 대표하는 광대 집단은 화랑이었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였던 신라에서 화랑은 상무정신尙武精神으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호국의 영령들께 그 간절함이 닿을 수 있도록 예악禮樂에 있어서도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했다.

 

흔히 우리의 전통무용이 무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화랑의 예악 속에 깃들었던 제사 형식의 의식적 요소가 후일 지나치게 강조되었던 까닭이다. 신라는 망했으나 화랑의 예악과 예기들은 축제의 시대 고려로 이어져 내렸고 화랑 출신들은 여전히 그 주역들이었다.

 

이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전문 예인, 즉 광대로의 변신에 성공한다.
이들의 역할이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선조에 이르러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하긴 하였으나 도처에서 광대 집단을 만들어 세력의 힘으로 버티어나갔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해서는 생계의 문제가 곧 생존의 문제가 되면서 절대다수의 광대들이 산산이 흩어졌고 스스로 광대이기를 포기하고 만다. 일부 광대들은 생존의 위험을 피해 그래도 먹거리가 풍성한 전라지역으로 숨어들었고, 이들은 예기보다 무속의 영험함을 파는 전략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가 하면 수도권에 남아있던 일부 광대들은 무속으로의 포장을 거부하고 오로지 예기에 의한 생존을 고집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다행히도 역사는 재인청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한말 고종황제는 김인호(金仁浩, ?~?)라는 재인청 광대를 가까이했고 덕분에 김인호 광대는 이동안이라는 걸출한 제자 하나를 키워내게 된다. 다시 이동안(李東安, 1906~1995) 선생은 정주미라는 춤꾼을 키웠고 여전히 재인청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재인청 춤을 종합하면, 신라 진흥왕 재위 12년, 팔관회를 필두로 1,500여 년을 축제의 역사를 담당해온 예인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내린 춤으로 팔도의 춤과 전통 장단의 특성을 종합한 춤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춤판에서 전승되는 여느 춤들보다 한결 우리 춤의 원형에 가까운 춤이다. 동시에 재인청은 우리 민족이 성립시킨 광대의 역사다.

 

그리고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광대의 뿌리, 화랑이 도맡았던 예기들은 모가비와 비가비로 구분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하나가 되었던 이들이 이 땅에 구축한 미학이다. 마침내는 우리 고유의 전통미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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